소설리스트

2화 (2/14)

강 대표는 미선당으로 떠나고, 나는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강 대표가 택시비 하라고 쥐여 준 돈이 있지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쓰지 않기로 했다.

‘아가야. 집 잘 찾아갈 수 있어?’

‘저 9살 아닌데요.’

‘길 잃어버렸다고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한 게 어디 사는 누구더라.’

떠나기 전, 다시 능글맞은 태도로 돌아온 강 대표가 신뢰가 전혀 담기지 않은 얼굴로 5만 원짜리 지폐 네 장을 손에 쥐여 주었다. 과했다. 택시 기본 요금도 모르면서 ‘택시 기사가 이상한 곳으로 빠지면 오른쪽 문 열고 뛰어내려. 잊지 마, 오른쪽이다.’ 하고 훈수를 뒀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5만 원짜리 지폐를 2장씩 나눠, 양쪽 바지 주머니에 각각 집어넣었다. 혹시 잃어버릴까,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매끈한 지폐의 감각에 지문이 닳아 버릴 것 같았다.

“백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알바 소개시켜 준 애. 그 옆에는 모르는 애. 학교 애들이다. 습관처럼 가슴팍에 달려 있을 명찰에 시선을 내렸다가, 오늘은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름을 기억해 내려 눈알을 굴리자, 같은 반 남자애가 어설프게 웃었다.

“나 재민이….”

“알아. 공재민.”

나는 냉큼 대답했다. 옆에 서 있던 모르는 애가 껄렁하게 물었다.

“야. 어디 가냐?”

너 나 알아?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집.” 하고 짧게 대꾸했다.

“우리 사거리에 놀러 갈 건데 니도 낄래? 여고 애들까지 합쳐서 6명인데.”

사거리.

그 술집이 있는 곳이다.

“아, 근데 너 저번에 문자 보고도 씹었더라? 나 모르냐? 나 4반 박건수.”

모르는 애가 끝도 없이 주절거렸다. 듣자 하니, 저번에 공재민이 친한 척 남긴 문자를 얘가 대신 보낸 것 같았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버스 전광판을 확인했다. 버스 번호들이 스크린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내가 타야 할 버스 번호도 보였다.

“아. 대답 좀.”

박건수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채근했다. 타이밍 좋게 버스가 승강장으로 들어온다. 나는 교통카드를 꺼내면서 입을 열었다.

“미안. 나 바빠. 버스 와서 먼저 간다.”

공재민에게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고 버스를 향해 걷는데, 뒤에서 침을 퉤 뱉는 소리가 들린다.

“존나 뻗대네. 김국현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조져졌을 게.”

김국현이랑은 3년 연속 같은 반이지만 딱히 친구 사이는 아니다. 그냥 같은 반 애일 뿐. 그걸 모르는 박건수와 김국현의 우정의 깊이도 알 만했다. 얄팍하다.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언뜻 보이는 박건수의 얼굴이 흉흉했다. 옆에 서 있는 공재민도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학교에서 나는 ‘그 애’다. 거기에 알바 자리만 소개 받고 쌩 까 버리는 인성 쓰레기라는 말이 더해져도 크게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아가’들이 만들어내는 소문은 더 이상 무섭지도 않다. 강 대표에 비하면.

‘괜히 힘 빼지 마. 업소랑은 진작에 얘기 다 끝냈으니까. 변호사 놈한테 극존칭 써 가며 굽신거릴 필요 없다고. 대신에 그 주변엔 얼씬도 하지 마라, 아가야. 아저씨한테 또 혼나기 싫으면.’

나는… 혼나기 싫은 것 같다. 강 대표는 화나면 무서우니까.

‘나는 너랑 계약을 한 거야. 애새끼 데려와서 자선사업 벌이는 게 아니라.’

나는 강 대표의 새까만 눈동자를 떠올린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눈. 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떠올린다. 타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생각해 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목도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이상했다.

속이 가라앉고, 한없이 고요해지는 느낌.

마치 소각장으로, 양호실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곳으로 숨어든 기분이었다.

눈.

그 새까만 눈동자.

강 대표는 무섭지만,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게 조금은… 고마운 것 같다.

“미친….”

나는 헛기침을 하며 버스 차창을 살짝 열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멀어지고, 새잎이 돋아나는 가로수 나무들이 시야를 채웠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내쉬었다. 온몸에 스며드는 서늘한 공기가 시원하다.

* * *

그날, 강 대표는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으로 나가 인사를 하자 그의 얼굴 위로 미약한 당혹감이 떠올랐다.

“안 잤냐.”

“네.”

“아가야. 늦게 자면 키 안 큰다.”

“…저 내일모레면 스물인데요.”

강 대표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성장판 이미 닫혔죠.”

“아저씨는 군대 가서도 10cm는 더 컸어요. 들어가서 자라.”

강 대표는 충혈된 눈으로 손을 휙휙 내저었다. 구두를 벗으려던 강 대표가 발치에 치이는 운동화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내가 황급히 치우려고 허리를 숙이자, 강 대표가 발로 운동화를 밀었다. 낡은 운동화 한 짝이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아….”

무심코 흘러나온 내 짜증에 눈썹을 치켜뜬 강 대표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 와. 와 봐.”

나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왜요. 아저씨가 먼저 막, 발로 그랬잖아요.”

그는 널브러진 운동화 한 짝을 똑바로 세우며 “됐지?”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세워 한 걸음 만에 성큼 앞으로 다가온 강 대표가 내 어깨를 꾹꾹 눌렀다.

“너 돈은.”

“네?”

“택시비 줬잖아.”

“…다시 드릴까요?”

“내가 양아치냐. 줬다 다시 뺐게.”

애새끼면 애새끼답게 돈 생기면 생각 없이 바로바로 쓸 것이지. 강 대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나는 강 대표가 드디어 택시 기본 금액이 얼마인지 알아냈는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아저씨. 택시비가 얼마인지 알아요?’ 하고 질문하려는데, 강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신발 몇 신어.”

“사이즈요?”

“그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275요.”

“쪼만한 게 발은 또 크네.”

“…저 다 크거든요?”

“글쎄….”

강 대표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닌 것 같던데.”

그가 뭘 떠올리고 있는지,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강 대표의 차에서 교복을 갈아입는 게 아니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아저씨, 변태예요?”

강 대표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우리 아가가 진짜 변태 새끼들을 아직 못 만났나 보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강 대표가 몸을 돌렸다. 나는 강 대표의 뒤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500ml 생수를 꺼내던 강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너.”

“…왜요?”

“밥은?”

나는 두 눈을 꿈뻑거렸다. 왜 뜬금없이 새벽 세 시에 밥을 먹었냐 물어보지? 강 대표는 나만 보면 밥을 못 먹여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구는 것 같다. 나는 아침에 먹었던 엄청난 코스 요리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왜요?”

“배고파서 기다린 거 아니야?”

“아닌데요.”

강 대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왜 기다렸어.”

“기다린 게 아니라. 자려다가 소리 들려서 나와 본 거예요.”

아. 작은 탄성을 뱉은 강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 근데 왜 아가가 아저씨 뒤를 졸졸 쫓아다닐까.”

“그런 적 없는데요.”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 한마디 덧붙였다.

“저… 물 마시려고요. 주세요. 물.”

내가 들어도 어색했다. 속으로 자책하는 동안, 강 대표는 냉장고에서 새 생수병을 꺼내 주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처구니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괜히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나는 딴지를 걸었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되묻는 내 목소리 끝이 튀었다. 강 대표가 시선을 맞춰 왔다. 짙은 눈썹 밑으로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반으로 접혀 있었다.

“나만 보면 물을 찾네.”

아저씨 보면 목이 바짝바짝 마르냐? 강 대표가 다가와 내 이마를 톡톡 쳤다. 나는 질색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저씨. 진짜 변태예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 네가 더 변태 새끼지. 아저씨는 멍멍 짖는 개새끼 생각했어요. 밥 주고 물 주고.”

아이고…. 이래서 개새끼를 키우나. 귀엽네.

놀리는 듯한 강 대표의 말투에 발끈했다. 나는 강 대표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따라다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발끈한 티를 내면 오히려 진실이 되는 법이다. 이럴 때는 무시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교복을 입은 순간부터 장장 6년간 헛소문에 시달린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였다. 나는 강 대표의 손에 들린 생수병을 낚아챘다.

“물 가져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빠르게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강 대표에게 술집이 위치한 사거리에 얼씬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했던 계획이 단 한 마디에 망가졌다.

나는 약속을 아주 잘 지키고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거실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 * *

“으….”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를 벗어났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늘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어젯밤에는 강 대표에게 약속을 지킨 걸 알려 주기 위해—정확히는 보고에 가깝다—새벽 세 시까지 버텼더니 더 정신이 없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퉁퉁 부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슥슥 매만지며 방문을 열었다. 소파 위에서 강 대표는 오늘도 안경을 쓴 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말끔한 와이셔츠 차림으로.

대표는… 원래 일요일에도 출근을 하나?

비몽사몽인 와중에 강 대표의 출근 시간에 대하여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아가야. 와 봐.”

신문을 반으로 접어 소파 위에 둔 강 대표가 나를 불렀다. 표정이 꽤 어두웠다. 안경을 쓴 강 대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들었다.

심각한 분위기에, 반쯤 감긴 눈이 번뜩 뜨였다. 별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덜컥 겁이 났다.

“…왜요?”

…어쩌면 아빠를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엊그제 손가락에 붙인 대일밴드를 떼어 내고, 반쯤 남은 거스러미를 뜯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불안한 시선으로 강 대표를 채근하듯 바라보자, 강 대표가 다가와 내 안색을 살폈다.

“너 어디 아픈 데 있냐?”

“네?”

강 대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떻게 멀쩡한 사람이, 씨발, 12시간을 넘게 처자.”

강 대표가 커다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안 나는데. 너 건강검진은 받은 적 있냐?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강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장난이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강 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인 것 같았다.

“죽은 줄 알고 의사 부를 뻔했잖아, 아가야.”

“죽은 줄 알았는데 의사는 왜 불러요?”

혹시 강 대표가 아직 장기매매의 꿈을 아직 저버리지 못한 건 아닐까? 나는 의심했다. 그것도 잠시….

“살려내야지. 고작 19년밖에 안 살았는데.”

강 대표가 단호하게 말했다.

“억울해서 쓰겠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였다. 강 대표는 진심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낼 결의가 담긴 얼굴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뭐라고…. 이제는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였다. 늦잠 한번 잤다고 아픈 애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늦잠 잔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아저씨. 저 어제 늦게 자서 그래요….”

“뭐?”

“늦게 자서 피곤해서 그렇다고요.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오래 잔 거죠. 원래 이 정도로 안 자요.”

“원래는 얼마나 자는데.”

“한 8시간… 가끔 10시간이요.”

“학생. 너 고3 아니지?”

그 정도면 신생아 아니냐? 무슨 10시간을 처자. 굳어 있던 강 대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고3이라고 다… 못 자는 건 아니에요.”

죽어도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하기 싫었다. 강 대표는 나를 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식탁 위에는 온갖 일회용 용기들이 늘어져 있었다. 불어 터진 쫄면, 식은 볶음밥, 차가워 보이는 콩나물국, 떡끼리 붙어 있는 떡볶이… 메뉴가 다양하기도 했다.

아마, 내가 퍼질러 자고 있어서… 다 식어 버린 것 같다. 그냥 깨우지. 나는 예상외로 친절한 강 대표에게 당부하듯 말을 건넸다.

“아저씨. 앞으로는 그냥, 저 자고 있으면 들어와서 깨우셔도 돼요.”

“아가야.”

“네?”

“기억 안 나면 앉기나 해.”

“네.”

여러 번 깨운 모양이었다. 나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

식거나 불어 터진 음식들이 전자레인지에서 하나둘씩 나왔다. 꽤 먹을 만했다. 배 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머리가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질문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 음식들은 왜 시킨 걸까? 강 대표는 늘 내 끼니를 챙겨 줄 생각인 걸까? 왜? 같이 사는 사람이라서? 월세 계약만 했지, 하숙집 계약은 안 했는데. 갚아야 할 돈에 식비까지 추가되면 어떡하지….

나는 일어나자마자 짜고 기름진 볶음밥을 배 속에 밀어 넣으며, 숟가락을 든 강 대표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아저씨 얼굴 뚫린다. 왜.”

“…그냥요.”

“싱겁기는.”

“짠데요.”

“너.”

강 대표가 경고했다.

“어디 가서 농담하지 마라. 아가야. 그냥 입 다물고 있어. 그게 나아.”

아니면 얼굴을 써먹어. 뭐가 됐든 입 다물어라. 강 대표가 덧붙였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과민 반응하는 강 대표 때문에 민망해진 나는 침묵 속에서 숟가락을 움직였다. 강 대표는 퍽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근데요. 아저씨.”

“야.”

“아니… 농담 안 할 건데요.”

“뭐. 말해.”

“원래 집에서 밥 안 해 먹어요?”

강 대표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아저씨는 아주 바쁜 사람이에요. 요리할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걸 하지.”

“그럼 맨날 사 먹어요? 아저씨 요리 못하죠?”

“아가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돈으로 해결하는 게 좋아. 그게 편하고 쉬운 길이거든.”

너도 내 나이만큼 먹으면 이해될걸. 돈은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이라는 게. 강 대표가 덧붙였다.

강 대표만큼 나이를 먹으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이다. 자식은 부모의 인생을 닮는다는데, 어쩌면 나는 평생 그런 삶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입맛이 떨어져 젓가락을 내려놓는데, 강 대표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살면서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제일 어려운 문제지.”

새까만 눈동자가 다시 한번 나를 담는다.

“골치가 아프거든.”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떠올려 봤지만 마땅한 정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주관식에 매우 약한 편이다. 물론 객관식이라고 다를 건 없지만. 객관식은 적어도 찍어 볼 수는 있으니까.

그럼 강 대표는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1번 강 대표는 화났다.

2번 강 대표는 슬프다.

3번 강 대표는 진지하다.

4번 강 대표는 힘들다.

5번 강 대표는 꼰대다.

암울한 선택지들을 떠올린 나는 부러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저씨 요리 솜씨처럼요?”

강 대표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조각 같은 얼굴 위에 얼룩져 있던 암울한 선택지들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웃을 거면서. 어차피 내 농담에 웃을 거면서. 왠지 모를 승리감에 도취된 내 입꼬리가 절로 씰룩댔다. 다시 작게 웃음을 터트린 강 대표가 내 뒤통수를 슥슥 매만졌다.

“그래. 새끼야.”

돌아오는 대답은 손길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일순, 뒤통수를 타고 정수리까지 전율이 일었다. 만져지는 건 머리카락인데 이상하게 머리 안쪽이 찌릿찌릿했다. 강 대표는 생각보다 남의 머리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

“…….”

시선이 틈 없이 맞부딪혔다. 새까만 눈동자 위에 가득 차오른 내 모습이 보인다. 낯설다. 낯설고…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밀리는 소리가 평화로운 집 안에 요란하게 울렸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제가, 제가 치울게요.”

식탁 위, 하얀 일회용 용기에 담긴 배달 음식의 잔해물을 따로 모아 치우려 하자 강 대표가 제지했다.

“냅둬.”

“그냥 냅두면 누가 치워요.”

“나한테 돈 받는 사람이.”

강 대표가 짧게 대꾸했다.

“…그럼 그거 제가 하면 안 돼요?”

강 대표가 픽 웃었다.

“너. 내 돈 받아먹기 쉬운 줄 알아? 아저씨는 경력자만 우대하는 사람이에요. 네가 경력이 있어, 뭐가 있어.”

“지금부터 쌓으면 되죠.”

“공부나 해라.”

강 대표가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억울한 표정으로 강 대표를 노려보니, 강 대표가 어처구니없는 음성으로 “청소해 주는 이모 따로 온다. 왜. 남의 밥줄 끊어 먹으려고?” 했다.

아. 그래서 집안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구나. 그제야 이해가 갔다. 하긴 이 넓은 집을 강 대표 혼자 걸레를 들고 돌아다니며 청소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안 어울리긴 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젓자, 강 대표가 내 손에 물이 가득 담긴 컵을 쥐여 주었다.

“아가야. 이제 뭐 할 거야.”

딱히 계획은 없었다. 집에 있을 때 나는 주로 TV를 보거나, 잠을 잤다. 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강 대표가 다시 물었다.

“공부?”

“…네에.”

거짓말이다. 내가 공부를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차려 준 밥—배달 음식이었지만—을 양껏 먹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양심에 찔렸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너덜너덜한 노트를 본 강 대표가 “공부 열심히 하나 보다?” 하고 감탄했다. 아닌데. 재작년부터 썼던 노트인데.

“이거 그냥 노트인데요….”

나는 괜히 뻘쭘해져서 말꼬리를 흐렸다.

“책은.”

“사물함에요.”

“안 들고 다녀?”

“무겁잖아요.”

“그래. 넌 무거운 거 들고 다니지 마. 키 좀 더 커야지.”

새벽부터 자꾸 키 타령이었다. 나는 객관적으로 키가 크다. 물론 강 대표보다는 아니지만. 반에서도 몇 명을 제외하면 나는 꽤 큰 축에 속했다. 

“저 키 큰데요.”

“딱히.”

“저 177 쫌 넘어요.”

“너랑 나랑 세대가 다른데. 아저씨보다 작으면 어떡하냐. 잘 먹고 잘 자고 쑥쑥 커야지, 아가야.”

“아저씨보다 큰 사람이 어딨어요.”

강 대표는 족히 190cm는 돼 보인다. 커다란 근육질 몸매 때문에 그런가,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잘 먹고, 잘 자도 강 대표보다 더 클 것 같지 않은데.

“노력해 봐.”

강 대표가 내 머리를 꾹꾹 눌렀다. 목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나는 “아. 하지 마요.” 하고 강 대표의 손을 떼어 냈다. 강 대표는 이것 좀 봐라,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지나갔다.

세상에는 노력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강 대표도 그걸 알아야 한다. 이미 성장을 멈춘 키는 절대 크지 않는다는 걸. 속으로만 투덜거리는데,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온 강 대표가 내 옆에 앉았다.

“너. 공부 좀 하냐?”

표지 끝이 닳은 낡은 노트에 강 대표의 시선이 닿았다. 내게 성적을 물어본 사람은 강 대표가 처음이다. 아빠가 자주 외상을 하던 슈퍼 아저씨가 때로는 “몇 학년이여?”라고 물어본 적은 있어도. 성적이 중요한가? 졸업만 하면 됐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이건 진짜 공부 열심히 한 게 아니라요. 노트가 이거밖에 없어서….”

하지만 괜히 찔려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줄줄이 토로했다. 사실은 강 대표가 성적표를 가지고 오라고 할까 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입학할 때부터 쓴 거라 오래돼서 낡은 거예요. 공부해서 낡은 게 아니라.”

나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강 대표가 부디, 오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뒤에서 3등을 한 성적표를 가져가기엔 조금 쪽팔리니까. 나는 괜히 목이 타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강 대표의 표정을 제대로 읽었어야 했는데.

* * *

“행님. 이거 어쩔까요?”

“야. 2층! 2층!”

오후부터 집 안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갈색 박스를 들고 부산스럽게 2층 계단과 현관을 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조폭이었고, 나쁘게 봐 주면 쌩 양아치처럼 보였다. 강 대표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숨으려던 건 아니지만, 그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까 물 많이 마셨는데. 설마 저녁 전까지 안 나가진 않겠지? 화장실 가고 싶을 것 같은데. 근데 갈색 박스는 뭐지? 사과 박스 같은 건가. 영화 속에 나오는 현금 박스 같은….

그 후로는 의미 없는 생각의 나열이었다. 나는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봤다. 내 방문이 열리기 전까지.

“아가야. 와 봐.”

강 대표가 손짓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슬쩍 물었다.

“아저씨. 저 방 안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가 왜.”

“아까 아저씨들 막 2층으로 올라가던데요.”

“다 갔어.”

짧게 대꾸한 강 대표가 “굴러떨어진다. 조심해.” 하고 애새끼 다루듯이 말했다. 나는 부러 다리를 쭉쭉 뻗어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강 대표가 작게 혀를 찼다. 단 한 번도 올라온 적 없는 2층에는 방이 단 두 개밖에 없었다. 활짝 열려 있는 하나는 서재인 듯싶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게 다 뭐예요?”

“공부 실컷 하라고.”

“네?”

공부방? 나는 강 대표와 방 안을 가득 채운 문구용품들을 번갈아 보았다.

“말했지. 아저씨는 네 미래에 투자하는 거라고.”

“…….”

“우리 아가가 공부 열심히 해야, 졸업해서 더 좋은 직장에 가지. 그럼 아저씨 돈을 더 빨리 갚을 거 아니야.”

강 대표가 능글맞은 말투로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나는 벙쪘다.

“그렇다고 이걸….”

과하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문방구 하나를 털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샤프, 샤프심, 지우개, 노트, 연필, 색연필… 다양한 모양의 각도기와 컴퍼스. 가위와 풀 그리고 왜 있는지 모를 문구용 칼 더미들과 지우개 도장 만들기 세트. 나는 박스째로 있는 노란 연필 세트들을 훑다가 강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이런 거 한 번에 많이 산다고 갑자기 1등급 받고 그러지 않아요.”

“뭐. 대신 네가 열심히 하겠지.”

강 대표가 씩 웃었다.

“아가야. 열심히 할 거지?”

다른 의미로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소리를 꽥꽥 지르고 싶었다. 누가 대체 공부를 시작하는 데 학용품을 이렇게 무식하게 사냐고. 7등급은 아무리 연필을 새로 깎아도 7등급일 텐데.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아저씨. 이건 좀….”

강 대표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럼 공부해라, 라는 말과 함께.

나는 태어나서 처음 가져 보는 형형색색의 문구 세트들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평생치의 학용품을 한꺼번에 다 몰아서 받은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속이 울렁거렸다. 왠지 모르게 목이 막히는 기분에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싫은데… 좋다.

유치찬란한 캐릭터가 그려진 색연필 세트를 매만지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갈색 박스들 사이로 유명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박힌 주황색 운동화 박스를 발견한 탓이었다.

275. 내 신발 사이즈였다.

* * *

강 대표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같이 새벽 서너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역시 ‘대표님’은 바빴다. 도어록 기계음 소리가 들리면, 나는 현관문으로 나가 인사를 했고, 가끔은 야식을 함께 먹었다.

강 대표의 귀가 시간은 점점 앞당겨졌다. 내가 아침마다 눈을 제대로 못 뜬다는 게 이른 귀가의 사유였다. 덩달아 학교에 지각하는 나날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내가 부지런한 학생이라서가 아니라….

“신발 신어. 가는 길에 내려 줄 테니까.”

“아저씨. 악수하러 가요?”

“그래. 악수하러 간다.”

사채업자답지 않게 부지런한 강 대표가 차 키를 손가락에 끼고 휙휙 돌린다. 나는 현관문으로 달려 나가, 신발장에서 검은 구둣주걱을 꺼내들었다. 강 대표가 알려준 이후로, 나는 줄곧 구둣주걱을 애용했다. 오늘도 역시 발이 편하게 들어간다. 새 운동화가 기분을 더 좋게 만들었다.

“가자.”

강 대표가 씩 웃었다.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 대문 앞에 서서 차고에서 나오는 강 대표의 차를 기다렸다. 조수석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맨 나는 자연스레 조수석 서랍에서 강 대표의 선글라스 통을 꺼냈다.

“아저씨. 여기요.”

강 대표는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나는 통을 다시 조수석 서랍 안에 넣었다. 강 대표가 핸들을 꺾는 사이, 나는 창문을 쭉 내렸다. 만연한 봄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크고, 작은 건물들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고 학교가 있는 언덕길을 올랐다.

“야. 뒤에 차. 차.”

“아씨. 뭐야.”

자동차의 엔진음에 교복을 입은 애들이 가장자리로 비켜 지나갔다. 얼굴을 찌푸린 아이들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강 대표와 나를 번갈아 가며 스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가야. 친구냐?”

“아니요.”

나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창문 스위치를 쭉 올렸다.

정문이 가까워질 즈음, 강 대표는 차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끽, 하는 소리와 함께 기어를 중립에 둔 강 대표가 손을 휙휙 저었다.

“가.”

수업 잘 듣고. 땡땡이치지 말고. 애들 삥 뜯지 마라.

강 대표가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았다. “안 그러거든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강 대표는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짧게 덧붙인 후, 차에서 내렸다. 골목길에서 나와 교문을 통과하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쟤. 맞지?”

“어. 아까 그 새끼네.”

“헐. 대박. 소문 진짠가 봐. 운전하는 사람 개잘생겼던데. 아가라고 부르는 거 들었어?”

어떤 소문인지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내 발걸음이 천천히 늘어졌다.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박건수가 저번에도 쟤 봤다잖아.”

“뭔데? 나 처음 듣는데.”

설마… 강 대표를 본 건가? 아닌데. 식당에서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었지. 바로 코앞은 아니었는데.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 목소리가 너무 컸나?’ 하는 표정의 여자애와 ‘뭘 꼬나봐, 보면 어쩔 건데’ 하는 표정의 남자애가 서 있었다. 얼굴이 낯익었다. 4반 애들인 듯싶었다.

…지랄이야.

나는 표정을 구기고 다시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대화는 끊겼지만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소각장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샘솟았다.

수업 잘 듣고… 땡땡이치지 말고….

나는 속으로 강 대표의 말을 주문처럼 읊었다.

삐죽 빼쭉 마음을 콕콕 찌르던 충동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뒤에서 떠들던 애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얼굴 표정을 싹 바꾸고 나를 앞질러 갔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3학년 교실은 가장 높은 층에 있다. 계단을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똑같은 교복에 비슷한 머리를 한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가끔은 나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이대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그냥… 사라지고 싶다. 그럼 강 대표는 나를 찾으러 와 줄까? 아마 그럴 거다. 강 대표는 내게 받아 낼 게 아주 많은 사람이니까. 꼭 찾으러 와야만 한다.

“후….”

이상하게 숨통이 트였다.

나는 강 대표가 내 소문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 강 대표가 나를 영원히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강 대표가 나를 데려다주다가 저런 말을 우연히 흘려듣게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다 서늘했다. 그렇다고 강 대표가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4반 애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4반 뒷문이 반쯤 닫힐 때, 나는 곁눈질로 교실 안을 살폈다. 큰 소득은 없었다. 우리 반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소문의 근원지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박건수.

교복 와이셔츠 위에 마이 대신 검은 후드티를 입은 박건수는 김국현의 책상 위에 걸터앉아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여고 애들 존나 잘 놀아. 너 그 여자애랑 나가고 나서 우린 노래방 한 시간 더 추가하고 서비스까지 꽉꽉 채워서 놀았어.”

“미친 새끼들. 노래 부르러 갔냐?”

김국현의 타박에 박건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재민, 이 새끼가 여자애들한테 말도 못 붙이고 구석에 짜져 있어서 그랬지.”

박건수가 낄낄대며 “야. 그렇지?” 하면서 공재민의 뒤통수를 툭툭 쳤다. 공재민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 존나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지.”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박건수가 “인정. 와꾸 존나 빻아가지고. 불알친구 될 듯.” 하며 크게 웃었다.

박건수가 웃을 때마다 반 애들의 시선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었다. 모두 쟤는 언제 자기 반으로 돌아가냐,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시간표를 확인하고 책상 서랍에서 수능 특강 책들을 시간표대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모두 강 대표가 준 ‘택시비’로 구매한 것들이다. 그사이에도, 박건수가 조잘거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거슬린다.

나는 작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조용한 곳에 숨고 싶었던 충동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나가려 한다. 가만히 있으면, 잠시 숨만 고르면 넘어갈 일이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나갈 거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나만 아니면 되는 일이니까.

“미친. 야. 이거 봐 봐.”

“뭔데.”

“내가 맞다 했지? 김국현, 사람 말 존나 안 믿어. 내가 공재민이랑 같이 봤다니까.”

박건수가 액정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노란색 말풍선 옆으로 하얀 말풍선이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단톡방인 듯싶었다. 박건수가 “노려봤대. 아. 존나 무섭네.” 하고 웃었다. 저건 분명… 내 얘기다. 어쩌면 강 대표도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뭐야.”

나를 올려다본 박건수가 눈썹을 구겼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단톡방에는 ‘ㅋㅋㅋㅋ’가 가득했고 간간히 ‘소문 인증 ㅇㅈ?’ ‘성격 개더럽네’ ‘얼굴값’ ‘원조교제’ 같은 말이 끼어 있었다. 역시 내 얘기가 맞았다. 강 대표 얘기도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일순, 분노가 차올랐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박건수가 전원 버튼을 짧게 눌렀다. 핸드폰이 검은 화면을 뱉어 냈다.

“왜 부르냐고. 백지오.”

좆같이 구네, 갑자기. 박건수는 당황을 숨기려는 듯 부러 실실 쪼개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우습지도 않았다. 진짜 무서운 강 대표에 비하면 박건수의 센 척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핸드폰을 향해 턱짓했다.

“네가 뭘 봤는데?”

“…….”

“고작 버스 정류장에서 본 걸로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헛소문 좀 작작 퍼트려. 너야말로 사람 좆같이 굴게 만들지 말고.”

박건수가 “하!” 하며 어처구니없는 숨을 뱉어 내며 김국현을 바라보았다. 김국현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한테 할 말 있으면 나한테 와서 해.” 

나는 힘을 주어 덧붙였다. 박건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키가 엇비슷한 탓에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했다. 매섭게 노려보는 꼴뚜기 같은 눈이 시야 안에 정면으로 불쑥 들어왔다.

“내가 뒷담 깐 증거 있냐? 증거 있어? 존나 시비 터네, 기분 더럽게.”

증거가 가득한 단톡방에 들어가 있는 박건수가 말했다.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을 믿는지,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고함을 쳐 가며. 덩달아 반 애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침묵의 시선은 고함보다 시끄럽다. 속이 점점 시끄러워진다.

악질적인 소문에서는 악취가 난다. 구정물을 끼얹은 것처럼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 거다. 소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더 큰 소문들이 달라붙는 이유다. 조용히, 숨만 쉬면 되는걸… 일을 더 크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소용이 없다. 내가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강 대표에게도 구정물이 쏟아질 거다. 그건 싫다.

나는 자꾸만 얼굴을 들이대는 박건수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쳐냈다.

“적당히 해. 선 넘지 말고.”

“씨발, 근데 이 새끼가!”

뒤로 살짝 밀려 나간 박건수가 열이 바짝 오른 얼굴을 했다. 내 멱살을 잡으려는 듯 손을 쭉 뻗었다. 그 순간, 김국현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친구야. 너 이제 니네 반으로 가라.”

박건수의 손을 쳐낸 김국현이 이죽거렸다.

“백지오가 존나 비싼 호텔에서 나오다가 너네랑 마주쳤다면서요. 아. 이 새끼들 구라는.”

호텔?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공재민과 박건수와 마주쳤던 버스 정류장은 5성급 호텔 앞에 있기는 했었다. 강 대표와 식사했던 식당은 그 호텔 옆에 있었고. 결국 박건수는 지 좆대로 해석하고, 말을 옮긴 거였다. 김국현이 물었다.

“백지오. 너 그날 진짜 호텔에서 나왔어?”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다.

“야. 아니라잖아.”

내 반응에 김국현이 되레 날뛰었다. 박건수는 왜 저 지랄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님 말고. 씨발놈아. 왜 네가 더 지랄이야.” 하며 벌컥 화를 냈다. 박건수의 반응에 김국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 새끼가 내가 도와준지도 모르고.” 했다.

“박건수. 너, 그 학폭 걸려서 강전 당한 새끼 기억나냐? 왜 우리 일학년 때 그 씹돼지 새끼.”

“어. 근데.”

“백지오가 입학하자마자 그 새끼한테 의자 던진 적 있잖아. 헛소문 퍼트린다고.”

김국현이 키득댔다.

“백지오 건드리지 마라. 얘 성격 더럽다.”

김국현이 자기소개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내 어깨에 친한 척 팔을 둘러 감쌌다. 무겁고… 기분이 더럽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쾌한 것들투성이다. 열일곱 살 때 일을 꺼내는 김국현도, 걸쭉한 욕설을 내뱉는 박건수도, 태연한 척 지켜보는 공재민도.

미친놈들. 센 척은.

나는 더 이상 이 바보 같은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다. 내 어깨에 올라온 김국현의 팔을 거칠게 털어내자, 김국현은 장난스럽게 양손을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박건수가 터질 것 같은 교복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었다.

“씨발. 존나 무섭네. 지리겠어.”

비아냥대는 말투로 중얼거린 박건수가 뒷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 남은 공재민이 어색하게 김국현과 내 쪽에 가깝게 섰다.

“난 너 믿어.”

김국현이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입바른 소리를 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김국현은 굴하지 않고 두꺼운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라, 어?”

의기양양한 태도까지 아주 완벽했다.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선 주제에 꼴값이었다. 김국현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근데 저번에 그 아저씨야? 너 오늘 데려다준 사람.”

“…….”

“아, 왜 저번에 소각장에서… 씨발. 됐다.”

공재민을 힐끔 쳐다본 김국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틈이 생긴 공재민이 “백죠. 오해하지 마. 내가 호텔에서 봤다고 한 거 아니야.” 하고 둘러댔다. 제 친구를 팔아넘기는 모양새가 본인도 민망했는지 서둘러 덧붙였다.

“건수도 긴가민가하다가 네 신발 보고 그런 걸 거야.”

“내 신발이 뭐.”

“전문 셀러들도 밤새 줄 서서 사는 한정판 에디션이잖아.”

“근데?”

“진짜 구하기 힘든 건데. 모델이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린 후부터 부르는 게 값이거든. 신발 하나에 리셀가가 천만 원까지 올라서….”

나는 내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못생겼지만 편한 신발인 줄 알았다. 깔창을 깔지 않아도 자체 키 높이가 있는 신발이라, 강 대표 옆에 있을 때 키 차이가 조금은 줄어들어 좋았는데… 천만 원이라니. 그렇게 비싼 건지 전혀 몰랐다.

“아무튼 너무 신경 쓰지 마. 백죠. 건수도 이제 아닌 거 알았으니까….”

공재민이 말꼬리를 흐렸다. 신경이 엄청 쓰인다. 여러모로.

나는 결국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택시를 잡아 집으로 곧장 향했다. 잘 관리된 정원을 지나, 도어록 비밀번호 6자리를 꾹꾹 누르고 문을 활짝 열고 뛰쳐 들어갔다.

“아저씨!”

급한 마음에 신발을 마구잡이로 벗어 던지려다가 1000만 원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가지런히 정리했다.

“아저씨! 어딨어요!”

아직 안 들어왔나? 하긴. 이 시간은 보통 강 대표가 집에 없는 시간대이기는 했다. 나는 가방을 현관문 앞에 던지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과 연결된 부엌에서 무언가를 뜯어내고 있는 넓은 등이 보였다.

강 대표다.

“아저씨!”

강 대표가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커다란 뿌리가 그려진 붉은 박스가 들려 있었다. 강 대표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가야. 아저씨 아직 안 죽었다. 왜 오자마자 호들갑이야.”

“아저씨.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저거 비싼 신발이라고? 왜 그런 걸 선물로 주는데요? 저것도 그냥 투자예요? 왜요?

모든 질문들이 목구멍에서 꽉 막혀 새어 나가지 않았다. 강 대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말하지 않은 명백한 이유를 깨달아서다.

“왜. 뭐. 계속 말해.”

강 대표가 말을 이었다. 나는 애꿎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강 대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가야.”

바로 저게 이유다. 강 대표는 내가 눈치를 보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필요한 거 사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택시비’를 쥐여 줄 정도로.

강 대표가 비싼 신발이라고 했으면 나는 틀림없이 눈치를 봤을 거다. 부담스러워서 신고 다니지도 못했을 거다. 아니, 어쩌면 팔아넘겼을 수도 있다. 나는 빚을 빨리 갚아야 하는 입장이고, 거지꼴로 다니던 나에게는… 학교 애들이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과분한 선물이니까.

나는… 강 대표가 싫어할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선물은 선물로 알고 받으면 되는 거고, 고맙다고 인사만 잘하면 된다. 강 대표의 말처럼 나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면 되는 걸 거다. 어차피 나중에 내가 다 갚아야 하는 것들이니,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애써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냥요. 아저씨 집에 없는 줄 알고….”

“너. 맨날 그러냐?”

강 대표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흡사 반려견이 집에 혼자 남아 하루 종일 기다리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주인의 표정이었다.

괜히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맨날 그러는 건 아니다. 가끔은… 그럴 때도 있지만. 나는 모양 빠지게 대답하는 대신 다른 화젯거리를 떠올리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다행히도 붉은 박스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 그건 뭐예요?”

“말 돌리기는.”

가볍게 타박한 강 대표가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개별 포장된 홍삼 진액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어르신들이 먹는 건강식품 같았다. 강 대표는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갓 달여 나온 듯 포장지가 따뜻했다. 그렇게 밤낮없이 일하더니 드디어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나 보다.

“아저씨… 벌써 홍삼 챙겨 먹어요?”

내 안타까운 목소리에 강 대표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잠시….

“아저씨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어딘가 자신감이 느껴지는 능글맞은 음성으로 받아쳤다.

“다 네 거야.”

“네? 저요?”

나는 홍삼과 강 대표를 번갈아 봤다. 강 대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애새끼들 보니까 다 너보다 튼튼해 보이던데.”

“튼튼해 보이는 거죠. 저도 엄청 튼튼한데요.”

“너는….”

강 대표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왜 먹여도 먹여도 살이 안 찌냐. 말라비틀어져가지고.”

발끈할 틈도 없었다. 강 대표는 한 걸음 만에 성큼 다가와 내 손에 들린 홍삼 진액을 앗아가 포장지의 모서리를 뜯어냈다. 힘으로 단면을 깔끔하게 뜯어낸 강 대표가 “마셔.” 하고 다시 내 손에 쥐여 줬다.

나는 슬쩍 입을 대 보았다. 이상한 향이 났다. 잠시 망설이자 강 대표가 “좋은 말로 할 때 마셔라.” 하고 강요했다. 마시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인 강 대표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꿀꺽꿀꺽 마셨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쓰고, 이상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나는 혓바닥 위를 죄다 밀어내고 싶었다. 혀를 살짝 내민 상태로 앞니로 쓸며 인상을 구겼다. 강 대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입술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쓰냐?”

“…으, 아저씨가 마셔 봐요.”

“나는 필요 없다니까.”

“저 아직 학생인데요. 마실 거면 아저씨가 마셔야죠. 으… 빨리요.”

“원래 가는 데는 순서가 없어요. 오래오래 사셔야지, 학생.”

놀리는 듯한 음성에는 진지함이 섞여 있었다. 불공평하다. 혓바닥에 아직 남아 있는 쓴맛에 침이 자꾸 고였다. 나는 인상을 팍 쓰고 혀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반절 남은 홍삼 진액을 모조리 삼키고 나서야 강 대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모자라, 강 대표는 팩 하나를 더 꺼내 내 손에 쥐여 주려 했다.

“또요?”

나는 질색하며 손을 뒤로 뺐다. 강 대표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내 손목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강제로 홍삼 진액팩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빼내려고 손에 힘을 줘도, 강 대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루에 세 번.”

날카롭게 뻗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알아서 마셔, 아가야. 억지로 먹이기 전에.”

강 대표가 타이르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하루라도 빼 먹으면 깔때기를 입에 꽂고 부을 기세였다. 12시간을 잔 이후로 내내 환자 취급을 받아 오긴 했지만… 이럴 줄이야. 아무것도 아닌 소문으로 열을 내고, 바로 집으로 달려온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전혀 팽팽하지 않은 힘겨루기 끝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마실게요.”

“그래.”

손목을 놓아준 강 대표가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건드렸다.

“앉아.”

나는 소파 위에 털썩 눕다시피 앉아 몸을 푹 기댔다. 강 대표가 물었다.

“수업은.”

“…듣고 왔어요.”

“공부는.”

정곡을 찌르는 강 대표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강 대표가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톡톡 쳤다.

“학교를 잘 다녀야지. 출석만 하면 아저씨처럼 된다.”

“아저씨처럼 되는 게 뭐 어때서요.”

“뭐?”

“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한 나는 내 대답과 강 대표의 반응에 당황했다. 하지만 역시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었다.

“뭐? 깡패 새끼가 뭐 어때서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사납게 구겨지는 얼굴에 나는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아저씨, 대표님이잖아요….”

“말이 좋아 대표님이지. 아저씨는 깡패 새끼예요, 깡패 새끼. 너 깡패가 뭐 하는지나 알아?”

“아니, 박 사장도 그렇고, 아저씨도 그렇고… 돈도 잘 버는 거 같고…. 원래 직업에 귀천이 없다잖아요.”

“직업에 왜 귀천이 없어.”

강 대표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언젠가, 가로등 밑에서 봤던 그 표정이다. 그때처럼, 무지막지하게 화를 내는 건 아니지만 눈빛이 비슷하다. 눈빛에 살갗이 찔리고, 베이는 기분. 강 대표는 화를 내고 있었다. 특별히 싫어하는 짓도 안 했는데 왜….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귀천 있어.”

뒤따라온 강 대표의 커다란 손이 내 턱을 고정시켰다. 피할 틈도 없이, 새까만 눈동자가 그대로 꽂혀 들었다. 강 대표는 짓씹듯이 속삭였다.

“내가 하는 건 아주 저열하고, 더러운 일이야.”

“…….”

“선택지가 없었지.”

선택지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까지 혼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만약 강 대표 밑에서 일을 하면, 강 대표에게는 차라리 좋은 거 아닌가? 빚을 금방 갚을 테니까? 왠지 모를 억울함이 치솟았다.

강 대표가 나한테 뭘 바라는지 모르겠다. 나는 부모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다. 도망가지 않고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는 채무자가 되겠다는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내 얼굴 표정을 확인한 강 대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가야. 너는 선택지가 아주 많아.”

“…….”

“내가 줄 거니까.”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공부나 해. 열심히 투자했더니 고작 깡패 새끼 될 생각 하지 말고. 너 아저씨가 다 지켜볼 거야. 알았어? 강 대표가 덧붙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강 대표의 얼굴 위로 얼룩져 있던 분노는 사라져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평소보다 조금 더… 따스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온기를 쫓아 강 대표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내 턱을 쥔 강 대표의 손가락이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살갗에 닿는 온기가 뜨겁게 느껴진다.

지켜볼 거라고? 언제까지?

강 대표의 말은 꼭,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상하게 몸에도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얼굴도, 귀도, 목도 다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건 다 홍삼 때문이다.

“하?”

짧은 숨을 뱉은 강 대표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나는 고개를 젖혀 강 대표를 쳐다봤다. 나를 내려다보는 강 대표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 깨달은 것 같기도 했고, 어쩐지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배고프면 뭐 사 먹고.”

지갑에서 5만 원권 몇 장을 대충 빼낸 강 대표가 소파 팔걸이 위에 돈을 올려놓았다.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강 대표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직… 선물 고맙다고 말 못 했는데.

* * *

어젯밤, 강 대표는 결국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만 했다. 내심 마음을 졸이며 교실에 들어갔지만, 우리 반을 자기네 반처럼 들락날락거리던 박건수와 김국현 패거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박건수와의 말싸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국현과 공재민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거슬리던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건 반 애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평소보다 교실이 더 평화로웠다.

“1번 문제에 답은 4번. 2번에 5번. 3번에 2번. 4번에 1번이다. 문제를 잘 살펴보면 그 속에 다 답이 있어.”

정년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흰머리가 흘끗한 윤리 선생님이 졸린 모기 목소리로 줄줄이 문제의 답을 줄줄이 알려 줬다. 나는 유치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빨간펜을 들어 찍찍 비 내리는 표시를 긋다가, 마지막에서 동그라미를 그렸다.

틀린 문제를 자세히 보니, 문제 안에 답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챕터 1인데….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는 기분은 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적어도 이번 모의고사에서는 뒤에서 3등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옆 분단을 힐끔 바라봤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나머지, 첫 번째 줄부터 끝까지 모두 전멸이다. 개중에는 아예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는 애도 있었다. 윤리 선생님은 반 애들이 듣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나이를 먹으면… 더 이상 타인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걸까?

감탄도 잠시, 나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대신에 강 대표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너는 선택지가 아주 많아. 내가 줄 거니까.’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내게 선택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인생은 항상 답도 없는 주관식이었지, 답이 있는 선택지가 여러 개가 존재하는 객관식이 아니었으니까.

강 대표는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나는 고민했다. 부모님한테도 못 들어본 말을, 일개 사채업자가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은…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이 엄청 울렁거리고, 동시에 간지러웠다. 그 순간만큼은 강 대표가 진짜 내 가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정도였으니까.

나는 몰래 핸드폰을 꺼내 책상 서랍에 반쯤 걸쳤다. 윤리 선생님에게 티가 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숙여 강 대표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아저씨. 어제 왜 안 들어왔어요 11:0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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