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빨리 문 열어 (14/23)

14. 빨리 문 열어

“회장님, 오늘 비서실 회식이 있는데, 참석할 수 있으십니까?”

“회식?”

“네, 송년회 겸입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7시쯤 회사 앞 고깃집으로 오시면 됩니다.”

“별일 없으면 퇴근 후, 잠깐 들리든지 하지.”

문재준이 아침에 챙겨준 따뜻한 율무차에 홀짝거리며, 은우가 길쭉한 과자를 초콜릿에 찍어 먹었다.

테이블 앞에는 얼마 전부터 시작한 ‘우리아이 정서발달’ 학습지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연필을 들고 진지하게 풀고 있는 은우를 문재준은 확인하고 문을 나섰다.

요번에 은우 교육과 관련된 테스트를 해보았는데, 의외로 은우는 외국어를 듣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확인 가능한 여러 나라의 언어를 시험해본 결과 모든 언어를 이해했다.

문재준의 판단으로는 어떤 언어라도 들으면 그 뜻은 이해가 가능한데 말하는 것 자체에 익숙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인간관계, EQ, 상황 설정, 원인 결과, 순서 등을 물어볼 시 많은 부분이 평범하지 않았다.

문재준의 뒤통수를 여러 번 치는 황당한 대답 퍼레이드에 당장 교육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은우 님, 길을 가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돈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본다.”

“아니 왜 그냥 봐요? 돈은 아주 중요합니다. 은우 님 좋아하는 과자도 살 수 있고, 집도 차도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아가 줘.”

하, 한숨을 내쉬며 다음 질문을 던지는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길 가다 지나가는 사람이 어려움에 부닥친 걸 보면 어떻게 합니까?”

“아가한테 가.”

“헉! 그건 또 왜요?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이 간절히 은우 님에게 도움을 청하면요?”

“음…… 빨리 아가한테 가?”

“이, 회장님에게 왜 갑니까? 어려운 사람은 도와줘야지 착한 사람이에요.”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돼. 아가 그랬어.”

고개를 끄덕이며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하는 차형욱 회장을 노려보며 머리를 쥐어뜯는 문재준이었다.

뭔가 많이 이상한 대답인데도 흐뭇해하는 차형욱 회장이 옆에서 계속 방해를 하니, 속만 답답한 문재준이었다. 그렇다고 어려움에 부닥친 모르는 사람을 무조건 도우라고 했다가는 차형욱 회장이 매섭게 노려볼 것이 뻔했다.

짧은 테스트가 끝난 후, 문재준 비서실장의 완벽하게 손질되었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눈을 단호하게 뜨고 강력하게 차형욱 회장에게 은우의 학습지를 주문하겠다고 통보하자 그 박력에 순간 밀려 알아서 하라고 허락했다.

아쉽게도 별로 발전 없는 은우지만, 포기할 수 없는 남다른 교육열을 가진 문재준이었다. 다행히 학습지 풀기를 좋아하는 은우이기에 차형욱 회장도 별말하지 않았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자, 아까 문재준과 약속한 대로 차형욱은 회식 자리에 잠시 참가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 비서실은 소수의 인원이기도 했고, 측근인 문재준을 봐서 얼굴도장만 찍기로 한 것이었다.

은우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차형욱은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예약되어 있는 방 안에 도착하자, 남자 13명과 여자 5명이 있었다.

차형욱 회장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반겼다. 비서실 회식자리지만, 총무부도 막판에 같이 끼어들면서 인원수가 조금 늘어난 회식자리였다.

박동수는 문재준이 미리 불러 같이 식사하고 있다가 은우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은우가 답답했는지, 모자를 뒤로 넘기며 박동수에게 손을 흔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옆을 슬쩍 보고 사태를 짐작한 차형욱 회장이 눈썹을 올리며 은우의 어깨를 감싸서 자리에 앉았다.

다들 은우가 ‘회장님의 미스터리’인 소문의 인물임을 짐작하고 소개를 해주지 않을까 눈을 빛냈지만, 차형욱 회장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형욱 회장은 모르지만, YJ 그룹 최대 미스터리 존재가 바로 은우다.

거의 매일 회장님과 같이 출퇴근하고 회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은우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소문이 존재했다.

어디 외국의 귀족이라는 말부터, 모델, 연예인, 남장 여자, 숨겨둔 자식 등등 많은 추측이 넘나들었다. 무정한 차형욱 회장은 그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은우를 자신과 박동수 사이에 앉히고 조용히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줄 뿐이었다. 아쉽지만 이들은 은우의 얼굴을 가까이 본 것에 만족했다.

한편, 조민경을 제외한 나머지 여직원들은 환상적 미모의 남자가 회장님의 옆에 자리 잡자 눈빛을 빛냈다.

특히 총무부의 노처녀 도유림 대리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차형욱 회장과 은빛 머리 남자를 관찰했다.

오늘 도유림은 계 탄 기분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커플의 조화라니, 두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잘 익은 소고기 한 점으로 쌈을 만들어 은빛 머리 남자의 입에 넣어주는 차형욱 회장님의 모습이 눈에 포착되었다. 황홀했다.

그 모습을 보고 평소 회장님과의 갭이 커서 다들 얼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총무부 도유림 대리의 눈빛은 살아서 반짝였다. 차형욱 회장님의 눈빛은 올곧게 오직 한 사람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위의 어떤 사람도 신경 쓰지 않음이 확실했다.

평소 소설을 쓰는 것이 취미인 4차원의 도유림 대리를 알고 있는 주변인들은 완벽한 머슴공이 어떻고, 미인수가 어떠니 하는, 도유림 대리의 혼잣말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고기를 먹다 말고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드는 은빛 머리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걸 눈치챈 차형욱 회장이 잽싸게 시선을 차단하며 견제하는 황홀한 모습에 도유림 대리가 작게 질투공……이라며 감탄을 토해냈다. 지켜주는 것이 마땅한 커플이라 속으로 울면서 생각했다.

조민경은 불쾌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알고 있음에도 철저히 무시하는 차형욱 회장과 전에 알아듣게 말을 했음에도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은우의 모습에 모욕감을 느꼈다.

전에 우울하고 쓸쓸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차형욱 회장 옆에 들러붙어 음식을 받아먹는 모습이 거슬렸다.

여우 같은 놈!

자신을 겨냥해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일 처리도 제대로 못하는 조상호 사장에게도 짜증이 치밀었다. 분명 자신이 도와주면 YJ 그룹 사모님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하더니 아무런 진전도 없는 상황이었다.

입만 살은 놈!

옆에 앉아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며 계속 말을 시키는 주제도 모르는 총무부 과장도 귀찮았다. 이미지 관리 때문에 웃으면서 받아주니 탁자 밑으로 전화번호를 주고 윙크를 하는 바람에 폭발할 뻔한 걸 겨우 눌러 참았다.

차형욱 회장의 머슴 짓은 회식자리라고 조금도 줄지 않고 계속되었다.

은우 밥 먹이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가지를 먹기 싫다고 하는 은우를 살살 달래 겨우 먹이는 모습에 직원들은 모두 굳어갔다.

이미 경험자 박동수는 여유 있게 대처하며, 비싼 한우 고기쌈을 자신의 입에 열심히 밀어 넣었다. 문재준 비서실장 역시 익숙한 이들의 닭살 행위를 무시하고 은근슬쩍 칼슘이 풍부한 멸치볶음과 DHA가 풍부한 고등어구이를 은우 쪽으로 밀어 놓으며 참견을 하고 있었다.

상석의 네 사람이 침착하게 식사를 하자, 아무 말도 못 하고 식사를 다시 시작한 나머지였다.

오늘 회식의 가장 큰 성과라면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환상적인 남자가 회장님이 죽고 못 사는 연인임을 확인한 것이었다.

남녀를 떠나 사람이라면 모두 감탄할 아름다운 존재지만, 옆에 있는 강력한 존재로 인해 감히 아무도 눈길조차 마주칠 생각을 못 하는 회장님의 연인이었다.

저 차가운 차형욱 회장님이 저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이해가 됐다. 오히려 저런 미친 존재감을 옆에 둔 회장님이 부러워지는 이들이었다.

은우의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 일어서는 차형욱 회장의 모습에 다른 이들도 자리에서 일어서 배웅을 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회장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대표로 인사를 건네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 차형욱 회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은우의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차형욱 회장이 카드를 문재준 비서실장에게 건네고 인사를 하는 동안, 화장실에 간 박동수다. 차형욱은 먼저 은우와 차에 탑승해 기다리려고 했다.

“저기…… 잠시만요. 차형욱 회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차형욱 회장이 고개를 조금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보자, 얼굴을 붉힌 조민경이 식당 문 앞에서 수줍게 서 있었다.

“아주 잠깐이면 돼요. 여쭤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잠시 은우를 쳐다보던 차형욱이 이미 차 안에 앉아 있는 은우 쪽 문을 닫으며 무시하려 했다. 조민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눈썹을 꿈틀하며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급하게 나온 듯 코트도 입지 않은 뛰어나온 조민경이기에 혹시나 어떤 중요한 일이 있나 싶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차형욱은 식당 바로 앞에 주차해놓은 차 안에 은우가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조민경에게 시선을 돌려 쳐다봤다.

“저, 괜찮으시면…… YJ 그룹에 취직해 회장비서실에 근무하게 된 기념으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어서…….”

끼익.

갑자기 가속페달을 밟아 바퀴가 땅에 긁히는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차형욱의 차가 출발했다.

눈이 커진 차형욱이 조민경을 밀치고 급하게 쫓아갔지만, 이미 자동차는 급하게 출발한 상태였다.

식당 입구에서 고작 몇 발자국의 거리였다. 고작…….

차형욱은 출발하는 자동차의 뒤로 몸을 날렸으나 매끄러운 동체에 그대로 바닥으로 뒹굴었다.

뒤늦게 밖으로 나온 박동수는 당황한 얼굴의 조민경을 지나, 뛰어가는 차형욱 회장의 방향으로 급하게 따라 뛰기 시작했다.

차를 더는 볼 수가 없었지만, 전력질주로 10분을 달렸다. 멈춰 선 차형욱 회장은 떨리는 몸으로 꼭 쥔 주먹 틈으로 피를 흘리고 서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멈춘 박동수는 급하게 전화기를 꺼내 본가에 알려 사라진 자동차와 은우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오면 이미 늦는 상황에 가장 빠른 본가에 사건을 알리고, 문재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응급 상황을 전하는 박동수다.

누구보다 상황 판단이 빠른 문재준 비서실장이 본가와는 다른 루트로 은우 님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전화하자마자, 의자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뛰어나온 문재준과 만났다. 전화기를 붙잡고 여기저기 추적을 시작하는 문재준이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박동수의 전화는 차현수 보스와 직통으로 연결되었고, 본가 쪽은 길길이 날뛰는 차현수 보스가 진두지휘해 은우를 찾기 시작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서 있던 차형욱을 눈으로 좇으며 박동수와 문재준이 전화기를 붙잡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차형욱 회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나.

절대 눈길도 보낼 수 없는 존재를 납치하다니 벌써 앞으로의 사태가 두려운 이들이었다.

무엇보다 은우의 안전을 간절히 바라며 전화기를 붙잡고 자동차의 행방을 치밀하게 쫓기 시작했다.

본가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정도훈이 30분 걸리는 이곳에 13분 만에 도착해 떨리는 손으로 넋이 나간 차형욱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이 새끼! 네 앞에서 은우가 납치되게 해? 내가 너 때문에…… 너를 믿었는데, 내가 이러라고…… 젠장!”

차형욱의 얼굴을 보며 분노를 터트리던 정도훈은 텅 비어 죽어버린 눈동자를 마주 보고,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단단히 감췄던 자신의 숨겨왔던 감정이 비집고 나올 뻔한 걸 겨우 눌러 삼켰다. 평생 절대 열어볼 수 없고, 열 생각도 없는 마음의 파편이었다.

문재준은 조용히 정도훈에게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뒤로 당기자 손은 힘없이 떨궈졌다.

전국에 이 소식이 알려지고 차형욱 회장의 자동차를 찾은 건 그로부터 불과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이미 안에 타고 있던 은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야, 이 신발아! 이게 뭐냐고? 어?”

“개떼처럼 몰려드네, 존나 살 떨려서…… 씨발! 우리 이러다 큰일 나지는 않겠지?”

“뭐냐고? 말 좀 해봐! 이 새끼야!”

“씨! 누가 보면 대통령이라도 납치한 줄 알겠네. 길거리에 쫙 다 깔렸어.”

“야! 대장, 부대장이 뭘 납치한 건지 우선 포장이나 벗겨봐라.”

“건들지 말랬는데…….”

“가져와봐, 살짝 보면 어떻게 알아?”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약이라도 썼냐?”

“약? 아니야. 처음 대장이 넘겨줬을 때부터 조용하던데?”

“뭐야? 뭐가 이렇게 가벼워? 사람 들어 있는 거 맞아? 미친! 어린아이 납치한 거 아니냐?”

망설이던 이들이 구석에 놓인 커다란 자루를 가져와 입구를 열었다. 안을 들여다본 이들의 입에서 소리 죽인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들이 발견한 건 긴 은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살짝 가린 하얀 존재였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에 작게 토해져 나온 단어는 하나였다.

“천사…….”

갑자기 일행 중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헛소리를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잠이 든 천사가 들어 있는 입구를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다시 덮으며, 떠들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죽인다. 진짜. 얘 사람 맞아?”

“자는 거 같은데?”

“졸라 부드러워 보인다.”

“미친, 만지지 마! 깨면 시끄럽다.”

“도대체 대장이랑 부대장은 어디서 이런 애를 납치한 거야?”

“정상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자? 진짜 약이라도 먹였나?”

아까부터 큰소리로 욕설을 뱉어내던 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 죽여 대화를 시작했다.

“야! 조금만 기다려 봐! 부대장 온다고 했으니 얘들 단속 잘하고, 우선 밖에 상황이나 꾸준하게 알아보도록 해라.”

끼익 덜컹.

문이 열리며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2명이 들어왔다. 놀란 얼굴로 입을 열어 밖의 상황을 떠들기 시작했다.

“야, 큰일 났어. 지금 우리 킹 스파이크 쫓기고 있어! 장난 아니야! 진짜 조폭 새끼들이 살벌하게 돌아다니는데, 심장 떨려서…….”

“휴, 이게 도대체 뭔 일인지……. 별거 아니라면서? 잠시 누구 데리고 왔다고,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더니…… 일이 제대로 꼬이네. 미친 장난 하나! 지금!”

“그래서? 끌려간 애들이라도 있어?”

“그게 좀 이상하게, 쫓기는 하는데 아직 잡혀간 애들 이야기는 못 들었어. 나도 몰라. 아지트 근처 돌아다니는 살벌한 아저씨들 보고 졸라 튀어 왔으니깐…….”

“어라? 구석에 저건 뭐냐?”

“새끼야, 그거 건들지 마! 대장 올 때까지 접근 금지야.”

젊은 사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지하 창고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자기네끼리 떠드는 이들은 말투나 목소리로 그들의 나이가 성인이 아니라고 짐작되었다.

일부는 바이크 가죽 잠바를 입고 간혹 교복 비슷한 옷들이 섞여 있음에 미성년의 아이들도 포함된 집단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 어……! 어?”

입을 쩍 벌리고 구석에 놓아둔 커다란 자루를 손가락질하는 일행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그곳에는 자루의 입구 부분으로 얼굴만 쏙 빼놓고 방금 일어난 듯 작게 하품을 하는 조금 헝클어진 은빛 실타래에 둘러싸인 하얀 얼굴이 보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창고 문을 통해 시원한 외모의 남자가 들어왔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린 나이에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중간 정도의 피부 톤에 180센티미터가 살짝 넘는 키와 날카로운 턱선, 보기 좋게 높은 코와 장난기를 입에 달고 웃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에 유행했던 ‘짐승남’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성인과 미성년의 중간에 놓인 아슬아슬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비슷한 또래인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까지로 보이는 이들이 신문지를 깔고 둥그렇게 앉아서 짬뽕이나 자장면을 먹고 있었다.

중앙에는 은빛 머리를 길게 내린 아이가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네놈들만 뭘 처먹고 있어? 또, 누구 맘대로 저건 저렇게 풀어놨어? 응?”

붉은 머리의 사내가 이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웃고 있는 사내를 향해 다들 표정을 굳히고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부대장.”

“내 말이 말 같지 않으신가 봐? 응?”

“그게. 어젯밤에는 자느라 조용했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말도 없고 얌전해서 그냥 감시만 했습니다. 도망갈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이던데요? 밥은 먹으라고 해도 안 먹어서 그냥 뒀습니다. 부대장.”

아까부터 자장면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앉아 있는 은우를 향해 붉은 머리 사내가 다가갔다.

일어선 이들에게 가려서 잘 보이지 않던 은우의 모습이 드러나자 눈이 살짝 커진 사내가 작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익.

쭈그리고 앞에 앉은 붉은 머리가 손을 뻗어 은우의 턱을 받치고 위로 올리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고개를 휙 돌려 빼버리고, 다시 자장면 그릇만 보는 은우다.

“아씨! 까칠하긴…… 너 저거 먹고 싶으냐?”

“…….”

“근데, 너 무지 예쁘게 생겼다. 벙어리야? 말해봐. 너 이름이 뭐야?”

“……모르는 사람 말 안 해.”

은우의 은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들어 올려 만져보는 붉은 머리가 보였다.

“나는 킹 스파이크, 부대장 이현우다. 이제 알지? 넌 누구냐?”

잠시 고민이 되는지 생각에 잠긴 은우가 눈을 살짝 내렸다가 올렸다.

붉은 머리 이현우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평소 다혈질과는 다르게 아까부터 쥐고 있던 은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자신의 코밑으로 가져갔다.

“흠, 향기도 좋네. 꽃향기 같기도 하고. 향수 쓰냐?”

“…….”

“야, 말 좀 해봐. 네가 진짜 차형욱 회장이 환장한다던 그놈 애인이냐?”

“…….”

“그러게 애인 잘 만나야지. 인생 꼬였네. 이게 뭐냐? 재수 없게. 그치?”

다리가 아픈지 은우가 다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심히 말을 시키는 눈앞의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고 자장면 그릇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빠져나간 머리카락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가 옆에 같이 주저앉아 은우의 머리카락을 힘을 줘 다시 움켜쥐었다.

작은 은빛 머리통이 흔들린 은우가 붉은 머리 이현우를 슬쩍 쳐다보았다. 은우의 시선이 잠깐이라도 자신에게 향하자 다시 씽긋 웃는 모습에 주변에 있는 ‘킹 스파이크’ 멤버들은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떨었다.

저 정신 나간 붉은 머리 부대장은 언제나 적과 싸울 때, 웃으면서 가장 잔인하게 적을 밟는 걸 좋아해 멤버들 사이에서는 ‘미친개’라고 불렸다.

특히 한 가지에 꽂히면 집착이 장난이 아닌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그 대상이 ‘킹 스파이크’ 대장이었다.

대장이 ‘킹 스파이크’를 만들어 초창기 활동을 할 때, ‘스네이크’라는 폭주족을 이끄는 이현우를 만났다. 그는 온몸에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대장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심심하다고 매일 싸움질에 여자 갈아치우기를 밥 먹듯 하는 걸로 유명한 이현우는 그 싸움 실력만큼은 알아줬기에 스카우트 제의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듣기로는 워낙 싸움질로 유명해 중학교 때부터 조직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고 했다.

“이현우! 심심하냐? 우리 킹 스파이크로 들어와라, 내가 재미있게 해주마.”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네? 네가 재미있게 해준다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대장의 얼굴을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이현우를 피하지도 않고 환하게 웃는 특이한 대장이었다.

그날 이후로 서열 싸움은 하지도 않고 바로 ‘킹 스파이크’에 부대장으로 들어온 미친개 이현우다.

대장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킹 스파이크’를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이현우다.

대항하는 이들을 가장 잔인하게 무너트리고 ‘킹 스파이크’가 명성을 쌓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장 옆을 지키며 싸웠다.

일부 멤버들은 부대장 이현우가 대장보다 더 강하다는 평가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지 심심해서 그리고 대장에게 흥미를 느껴서 '킹 스파이크'에 들어왔다는 평이었다.

그런 재미있는 것에는 환장하는 미친개 이현우의 시선이 다시 흥미로 번쩍이는 것에 ‘킹 스파이크’ 멤버들은 눈치챘다.

꼬르륵.

자기 뱃속에서 나는 큰 소리에 자기가 깜짝 놀란 듯 은우의 어깨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옷 위로 자기 배를 톡톡 건드는 은우를 보고는 이현우가 크게 웃다가 한마디 했다.

“너 뱃속에서 완전 큰 소리나. 근데도 밥 안 먹어?”

“…….”

고개를 좌우로 살짝 저으며 대답을 안 하는 은우의 모습에 이현우가 참다못해 크게 소리쳤다.

“어제도 종일 굶었잖아. 씨, 너 자꾸 그러면 입에 억지로 처넣는다.”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젓는 은우를 보고 미간을 잔뜩 구긴 이현우가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무리 얌전하다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료품 보관을 위해 사용하던 철 기둥으로 막아 놓은 작은 공간에 은우를 데려다놓고 문을 잠가놓았다.

이곳은 특별히 납치를 계획하면서 더욱 보안을 보강하였다. 특수 쇠창살과 최신식 자물쇠로 되어 있어,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문제는 저 현실감 없이 예쁘고 순하게 생긴 놈이 고집은 장난이 아니었다.

화도 안 내고 울지도 않는 놈이라 말도 잘 들을 줄 알았던 멤버들의 뒤통수를 확실히 때려준 천사의 외양만 닮은 고집쟁이였다.

금요일 밤에 납치를 해왔으니 이미 어제 종일 굶고 일요일 오늘 점심이 지났다. 이상하게 기운 없는 은우의 모습에 이유 없이 신경이 곤두섰다.

괜히 본인이 데려다 놓고 아직 이곳에 오지 않는 대장 때문에도 짜증이 솟구친 이현우다. 밥도 안 먹고 풀이 죽은 인질 놈을 보자 속이 더 뒤틀려 괜히 멤버 애들을 상대로 화풀이하는 미친개 이현우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잠만 자는 놈에게 이상하게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놈한테는 화도 낼 수가 없었다. 생긴 건 영락없이 천사를 닮았지만, 사실은 악마 같은 인질 놈이라고 이현우가 투덜거렸다.

Rrrr. Rrrr.

“대장! 전화만 하면 다냐?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빨리 오는 것이 좋을 텐데? 아니면 내가 네 인질 가지고 좀 놀아볼까 하는데…… 네가 원하는 복수 내가 지금 할까? 말해! 전화 끊으면 내 마음대로 한다.”

알 수 없이 계속되는 짜증에 이현우는 전화로 일부러 대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본심은 아니지만, 뭔가 대장에게 자극을 주고 싶었다.

결국,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툭툭 뱉었다. 한참 후 겨우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닌 급박한 대답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맘대로 해. 젠장! 건들지 마! 이현우, 건들면 죽는다! 알았으니깐, 기다려.”

1시간쯤 흐른 뒤, 낡은 창고 문이 열리며 알 수 없는 로고가 쓰인 가죽 재킷과 검정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들어왔다.

들어오자 보이는 건 부대장 이현우가 잠든 은우의 옆에 앉아 말랑한 볼을 툭툭 건들고 장난치듯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큰 걸음으로 쇠창살 안으로 걸어가 이현우의 뒷덜미를 낚아채 뒤로 당겼다.

“대장, 드디어 오셨나? 아씨! 너 지금 뭐 하냐? 목숨 걸고 납치에 동참해줬다만 얘만 달랑 여기다 두고 장난해?”

“이현우, 닥쳐!”

“복수하고 싶다면서? 지금 이게 복수냐? 아무것도 모르는 애 잡아두고 너 지금 뭐 하냐? 이용과 협박은커녕 납치해놓고 인질 얼굴도 못 쳐다보는 이게 뭔 똥개 같은 상황이야?”

검정 헬멧의 사내가 잔뜩 흥분해서 부대장 이현우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방어 없이 뒤로 밀린 이현우가 쇠창살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큰 소리를 낸 둘 사이 잠시 정적이 흐르자, 작은 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렸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졸린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고 있는 은우가 보였다.

눈을 돌려 그 둘을 보던 은우가 갑자기 검정 헬멧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눈이 동그랗게 변한 은우가 벌떡 일어나 검정 헬멧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온몸을 크게 움찔하며 놀라는 검정 헬멧이 은우를 살짝 밀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은우가 잽싸게 앞으로 다가가 검정 헬멧에게 다시 반갑게 매달리며 말했다.

“민석이다.”

3일간 잠을 거의 못 자 다크서클로 바닥에 그림자를 만든 문재준 비서실장은 월요일 아침 출근을 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보이는 차형욱 회장을 보고 문재준은 인사조차 잊을 만큼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 내내, 은우를 찾기 위해 모든 본가의 정보망과 경찰 자료까지 모두 동원하고 있는 응급상황이었다. 차형욱 회장이 출근할 거란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나 얼음같이 무표정한 얼굴은 은우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온 평소의 차형욱 회장인 것 같았다.

말없이 회장실로 들어가는 차형욱 회장을 쫓아 문재준은 서둘러 회장실로 들어갔다.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잠을 한숨도 자지 않은 듯 붉게 충혈된 차형욱 회장의 눈을 제외하고, 그의 얼굴은 흥분과 분노보다는 고요하고 냉철한 모습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정상이 아님을 주위 사람들은 알기에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지금 본가에 가 있는 박동수는 차형욱 회장과 황성파에 얽힌 모든 관계를 뿌리까지 조사하는 중이었다. 조사 결과 처음 은우를 태우고 달아나던 차량이 중간에서 오토바이를 만났다.

도로 CCTV와 증인을 통해 검정 오토바이에서 내린 또 다른 용의자가 은우를 데리고 달아난 걸로 드러났다. 그 사이 차형욱 회장의 차를 타고 1명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며 시선을 잠시 끌다가 사라졌다.

귀신같이 CCTV나 기타 정보망을 피해 달아나며 여러 번 오토바이와 차로 갈아타며 옮긴 이유로 추적이 느려지고 있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납치라는 증거였다.

문재준 비서실장은 각오를 다시 다지고 오늘의 브리핑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회장실을 나와 비서실로 갔다. 책상에 앉은 문재준은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은우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마 납치범은 은우의 가치를 안다면 함부로 해를 끼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무언가 요구하거나 협박을 위해 데리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 본가의 모든 걸 동원해 차현수 보스가 직접 현장 지휘를 하며 은우를 찾고 있었다.

범인은 몸을 바싹 낮추고 깊이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전국의 거리에 황성파의 영향력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거의 20년을 현장에 나서지 않던 잠자는 호랑이 차현수 보스가 직접 나섰다. 그 의미는 어떤 조직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조직과 연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손으로 범인을 색출해 끌고 올만큼 모든 조직이 자신들의 내부부터 샅샅이 훑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범인은 숨도 못 쉬고 압박을 받으며 도망도 치지 못하는 암담한 상황일 것이다.

“여기가 오토바이 끌고 다니는 애새끼들 모임이냐?”

“넌 누구신가?”

“애새끼가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말본새하고는…… 나 남부파 두목 황두식이다.”

“뭐래? 이미 차형욱 회장한테 다 망해버렸다고 들은 조직 아니야? 두목은 쥐구멍에 숨어 있어서, 안 죽었나 봐? 용케 그 뱃살을 다 숨기고 있었네.”

뚱뚱한 볼살에 눌려 작은 눈이 잘 보이지도 않는 170센티미터 중반의 키에 120kg은 넘어 보이는 고도 비만의 남자가 볼을 실룩거렸다.

“뭐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의 새끼가 두목한테 건방지게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뒤에 서 있던 목 전체에 문신이 새겨진 동네 양아치 느낌의 사내가 침을 바닥에 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들이닥친 10여 명의 사내들에 인해 긴장감이 감도는 지하실에 남아 있던 ‘킹 스파이크’ 클럽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을 주머니에 반쯤 넣고, 다른 손으로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킹 스파이크’ 부대장인 미친개 이현우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기가 제대로 막히네. 미치게 재미있는 놈이네.”

쿠쾅.

갑자기 밀쳐진 목 문신 사내가 뒤로 넘어지며 구석에 놓인 상자 더미 속에 처박혔다.

빠득!

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몸을 튕기고 올라온 목 문신이 미친개 이현우에게 달라붙었다. 동시에 옷이 뜯어져라 둘이 엉켰다.

키가 좀 더 큰 이현우가 목 문신의 목을 한 손으로 감아 뒤쪽으로 당긴 후,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순간 다른 쪽 다리로 목 문신의 복부를 인정사정없이 찼다.

으윽 소리와 함께 구역질하는 사내의 복부를 순식간에 반복해서 차올린 뒤 갑자기 달려드는 남부파 두목 황두식 뒤에 서 있던 2명의 사내에 의해 두 손이 포박되어 물러났다.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킹 스파이크’ 멤버들 중 4명이 부대장 이현우의 팔과 어깨를 잡고 있던 사내들에게 주먹을 날리자 이현우의 몸이 자유로워졌다.

이현우는 풀려난 몸으로 아까 바닥에 눕힌 문신 놈에게만 달라붙어 다리를 뻗어 밟기를 계속했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수그린 목 문신 사내가 몸을 뒤로 굴려 피했다.

죽기 살기로 따라가 그놈 하나만 공격하는 이현우는 정말 미친개 모습 그대로였다. 남부파 조폭들조차 질린 얼굴로 그런 이현우를 노려봤다.

짝짝짝.

큰 박수 소리가 살벌했던 싸움판에 흐름을 끊고 들려왔다. 살이 올라 두껍기 그지없는 손으로 손뼉을 쳐 시선을 끈 자는 남부파 두목인 황두식이었다.

그 와중에도 이현우는 계속해서 살기를 띠고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으나, 바닥에 쓰러진 목 문신의 이미 기절해 있는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만하지? 쓸만하군. 나중에 우리 남부파에 들어오면 받아주겠다. 우선 납치한 놈이나 데려와라.”

“퉤, 나님이 왜 네놈 말씀을 들어야 하나요? 네?”

움직임이 없는 목 문신의 몸을 한 번 더 퍽 차고서야 멈춘 이현우가 남부파 두목 황두식에게 한쪽 입술만 얄밉게 올리고 비웃듯 말을 뱉었다.

“그 말은 내가 하지.”

소란으로 들리지 않았던지, 열린 문 앞에 양복을 입은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 남자와 검정 헬멧을 옆에 들고 있는 차민석이 보였다.

“어이, 대장 왔어? 근데, 그쪽은 누구지?”

“나는 자네들 대장 차민석의 외삼촌 되는 사람이라네. 자네가 요번 일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민석이한테 들었네. 내 잊지 않도록 하지.”

이현우가 조상호 사장을 슬쩍 봤다가 대장 차민석에게 시선을 고정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차민석은 주변을 둘러보며 ‘킹 스파이크’ 멤버 4명의 얼굴에 보이는 상처와 남부파 두목 황두식의 일행을 보고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이현우의 눈빛을 살짝 피해 고개를 돌리는 차민석이었다. 전에 조상호 사장이 의뢰했던 차형욱 회장의 차량 습격 사건으로 어렵게 일군 남부파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들도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한 의뢰였지만, 차기 황성파 보스의 후계 싸움이라는 점에서 차민석의 편을 든 것뿐이었다. 어이없게 조상호 사장과 시작한 EXTS03 신약 사업 때문에 중국에 간 사이 조직이 무너졌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차형욱 회장 놈이었다. 최대한 뺏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뺏고, 그놈의 것은 다 망가트리고 나중에 그놈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은 남부파 황두식 두목이었다.

“그래, 차형욱 새끼 애인이라는 놈은 어디 있어? 당장 끌고 와!”

황두식이 거친 어조로 은우를 찾자, 차민석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쪽에서 납치하는 조건으로 데리고 있겠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뭐냐? 대장이랑 내가 데리고 왔는데, 왜 그쪽이 나서? 나서길?”

대장 차민석의 어깨에 어깨동무하며 부대장 이현우가 황두식 두목에게 시비조로 말을 걸자, 외삼촌인 조상호 사장이 나섰다.

“이쪽 황두식 사장님도 차형욱에게 쌓인 것이 많으신 분이라 그러네. 어차피 다들 같은 목적으로 모였는데, 이렇게 험한 분위기가 될 필요는 없지 않나? 누가 데리고 있으면 어떤가?”

“뭔 개소리? 야! 차민석! 똑똑히 말해봐. 너 우리냐? 아니면 저 돼지 놈 패거리랑 같이 하기로 했어?”

“외삼촌.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현우 너도 적당히 해라.”

조상호 사장이 화가 나서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변한 남부파 두목 황두식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큼, 황두식 사장님, 당분간 여기에 두도록 하지요. 여기 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황 사장님의 원한이야 잘 알지만, 저희 쪽에서도 꼭 필요한 인질이고 함부로 망가지거나 하면 골치가 아파서요.”

“아니 누가 우리 쪽에 아예 데려가겠다는 건가? 조금 손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쯧쯧.”

‘킹 스파이크’와 돌아온 남부파 두목 황두식 일행들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의 조상호 사장이 조카인 차민석의 굳은 얼굴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상호 사장의 조카라 들었는데. 참 인물이 좋구먼.”

호쾌한 척 뚱뚱한 뱃살이 흔들리게 웃는 황두식 두목이 차민석을 칭찬하더니 먼저 분위기를 바꾸러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차민석의 모습에 조상호 사장이 옆에서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자,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손을 맞잡더니 한참을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황두식 두목이 웃으며 검지로 살살 차민석의 손바닥을 긁자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털어내는 차민석의 험악한 모습을 보고 조상호 사장이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우리끼리 그만하시죠. 같은 편인데. 우리 민석이가 앞으로 황성파를 맡게 될 텐데…… 지금 이러면 서로 좋지 않습니다.”

억지로 손을 뗀 차민석은 여전히 살벌한 눈빛으로 황두식 두목을 마지못해 쳐다봤다.

“우선, 납치했다니 얼굴은 볼 자격이 된다고 보는데? 당분간 같은 편이니 그 정도 신뢰는 보여줘야 하는 것은 애송이라도 알겠지?”

금방이라도 미친개 이현우가 달려들 듯 육중한 몸매의 황두식을 견제했다.

대장 차민석이 손을 들어 그를 말리며 은우를 가두어 둔 곳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를 쫓아 걷는 황두식과 일행들을 노려보며 뒤를 따르는 이현우다.

쇠창살이 처져 있는 작은 식료품 보관소 구석에서 자고 있는 은우가 보였다. 어두웠지만, 눈부신 은우의 외모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쇠창살 밖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숨을 삼켰다. 특히 감탄을 토해낸 남부파 보스 황두식이 잠긴 쇠창살 문을 당장에라도 열려고 했다. 피둥피둥한 얼굴에 욕정을 가득 품은 눈으로 차민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 저런 물건이라면 진즉 찾아올 것을……. 큭큭! 뭐해? 빨리 문 열어.”

“그만하시죠.”

“어허! 민석아, 그냥 열어드려라. 잠깐 보시겠다는데…….”

조상호 사장이 나서서 남부파 두목 황두식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했지만, 차민석이 단호하게 외면했다.

그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황두식이 크게 헛기침을 하며 조상호 사장에게 눈치를 줬다. 차민석답지 않은 반항에 조상호도 불쾌한 기분으로 자신의 조카 차민석을 관찰했다.

바쁘고 무뚝뚝한 차현수 보스 대신 자신이 늘 외로운 차민석을 아버지처럼 돌봤다. 언제나 자신의 말이라면 잘 따르던 차민석의 이런 모습이 낯설고 불쾌한 외삼촌 조상호다.

그렇다고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서 평소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 먹을 수도 없는 처지다 보니 아까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는 중이었다.

얇은 검정 슬립을 입은 여자가 두 손에 붉은 와인이 들어 있는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를 향해 요염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욕정을 가득 담은 남자, 조상호 사장이 와인 잔 대신 얇은 허리를 휘감아 자신의 옆에 앉히며 끈적이게 만지작거렸다.

“여기 잔부터 빨리 받아요. 떨어지겠어요. 축하주 한잔해야죠.”

“우리 딸이 워낙 예뻐서 그렇지…….”

높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오며 허리를 살짝 비틀어 남자의 손을 자연스럽게 떨어트리는 여자였다.

“또, 왜 이러실까? 자꾸 이러면 곤란하죠. 곧 결혼할 딸한테.”

“예뻐서 아빠가 딸 좀 안아 주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튕기나 우리 따님이?”

“분명 전에 YJ 그룹 회장 사모님 자리에 앉혀준다더니 시간 끌어서 얼마나 짜증 났는데요. 더구나 남자 애인이랑 동거하고, 차현수 보스도 허락했다니 그동안의 노력이 무너지는 줄 알고 진짜 걱정했잖아요. 다들 미쳤어. 진짜.”

“흠…… 그게 내가 또 그럴 줄 알았나? 뭐 얼마나 가겠어? 조금만 더 기다려봐. 거의 다 됐어.”

“겨우 YJ 그룹 비서실 들어가긴 했는데, 차형욱 회장 얼굴 보기도 힘들단 말이에요. 맨날 그놈이나 끼고 출퇴근하고 문재준 미친 사이코가 회장실 출입도 못 하게 한다고요. 전에 잠깐 들어갔다가 사람들 앞에서 살벌하게 경고 받았어요. 기분 나빠! 그 사람. 쳐다보는 눈길도 감시하는 거 같고 지가 뭐라고. 여우 같은 놈이 멍청하게 납치를 당해서 다행이지요. 누가 어디에 납치한 건지 말 안 해줄 거예요? 저도 그때 일 도와줬잖아요. 갑자기 문자로 당장 차형욱 회장의 시선을 끌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데……. 조 사장님이 직접 납치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라고만 하고…… 궁금해 죽겠어요.”

조민경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리자,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래듯 입을 여는 조상호 사장이었다.

슬슬 손을 내려 허벅지를 쓰다듬자,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오는 손을 교묘하게 막으며 조민경이 튕겼다.

“뭘 그렇게 궁금해하시나? 황성파는 내 조카 차민석이 물려받고, 너는 YJ 그룹 차형욱 회장 사모님이 될 텐데, 그럼 결국 우리가 다 갖게 되는 거야. 나중에 아들 하나만 낳아! 여차하면 나중에 차형욱 처리하면 좋고. 기다려봐. 쿡! 나만 믿어.”

“정말 확실하죠? 우리 처음 약속했던 것 절대 잊으면 안 돼요.”

“당연하지!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남자 아니야.”

“전에 우연히 차형욱 회장 애인 만나서 우선 가볍게 경고는 해줬었는데, 소심한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알아듣게 말했는데, 절 싹 무시하더라고요. 뻔뻔한 놈!”

“그러게 그냥 지가 떨어져 나가면 좋았지. 다른 계획이 있으니깐, 나만 믿으시고 했잖아. 우리 따님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허허허.”

“이젠 좀 후련해요. 다행히 차형욱 회장도 평소처럼 출근한 걸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사랑한 건 아닌가 싶어요. 이 틈을 노려도 될 듯해요.”

“그래, 우리 민경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우선, 납치한 아이를 정이 뚝 떨어지게 좀 굴려서 입 막아야지. 돼지 새끼가 엄청나게 밝히는 변태라고 들었는데 잘됐어. 차형욱도 돌아버리거나 폐인 되면 좋고. 기회를 봐서 망해버린 남부파 돼지 놈한테 뒤집어씌우고 정리하면 딱 좋아.”

“호호, 좋은데요? 나 기대할게요.”

붉은 입술을 유혹하듯 올리며 조민경이 조상호 사장의 와인 잔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가는 팔을 내밀어 목을 감싸 안았다. 두툼한 중년 남자의 목에 매달려 콧소리를 흘리는 조민경의 눈은 냉정하고 강한 탐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기도 잘 안다.

조상호 사장이 아직 모든 패를 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위치는 다른 여자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자신은 죽더라도 이 기회를 놓지 않을 것이다. 아마 조상호 사장은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자신까지 처리할 수 있었다. 완전범죄를 위해서.

그 전에…… 어두운 실내조명 속에 반사된 조민경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보육원 원장은 예쁘장한 자신을 어려서부터 예뻐했지만, 문제는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였다. 사탕을 쥐여 주고 볼을 쓰다듬던 원장의 가벼웠던 손길이 조금씩 끈적이게 변해갔다.

죽도록 공부를 했었다. 암울한 현실을 유일하게 바꿀 미래는 공부밖에 없었으니깐. 그 흔한 학원 한번 다녀보지도 못 했지만,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매일 밤늦게까지 학교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보육원에 와 이불 속에 몸을 숨기고 떨었다. 가끔은 원장을 피해 화장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을 잤다.

어느 날, 고등학생인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는 원장의 머리를 재떨이로 내리치고 돈을 훔쳐 도망을 갔다. 아직 어린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었다.

형편없는 아르바이트 시급에 지쳤다. 쓸만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여자가 간 곳은 강남에서 최고로 치는 유흥업소였다. 그때 만난 사람이 조상호 사장이었다.

고등학교과정은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나만의 특별함을 위해 죽도록 공부했다.

남자들은 정말 쉬웠다.

돈, 명품, 외제 차와 아파트를 가져다 바치는 멍청한 남자들은 수도 없었다. 그곳의 얼굴만 예쁜 머리 빈 여자들과 자신은 달랐다. 그 사실에 조상호 사장의 눈도 차츰 달라졌다.

그의 제안으로 업소에서 나와 미국 유학도 갔다 왔고 모든 과거는 사라지고 새롭게 조민경이 탄생하였다.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코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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