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천사광신도 4인방의 모임
재즈풍으로 바뀐 White Christmas가 남자 흑인 가수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잔잔히 들려오는 작은 바였다.
창가에는 꼬마전구가 커튼처럼 드리워져 은은히 빛나고, 조명이 켜진 크리스마스트리, 눈사람 인형과 포장된 선물 상자들이 구석에 놓여 있었다.
중앙에 위치한 작은 난로 위 올려진 주전자가, 따뜻한 겨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빈티지 바였다.
기다란 통나무 바 테이블에 족히 187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날렵한 근육질의 남자가 떡 벌어진 어깨와 큰 손 때문에 유독 작아 보이는 맥주병을 들고 입가에 가져갔다.
검은색의 활동하기 편한 바지에 꽈배기 모양이 들어간 갈색 니트를 입고 있어서 언뜻 대형견같이 보이는 인상의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짙은 블루 블랙 스포츠머리와 숱 많은 눈썹에 쌍꺼풀 없고 날카로운 눈빛이 다가가기 힘든 외모지만, 자세히 보면 보이는 순박한 눈망울과 조금 쳐진 눈꼬리가 보이는 것보다 순한 성격으로 보였다.
광택이 나는 구릿빛 피부는 바 근처에 자리 잡은 여자들이 모두 감탄을 흘릴 만큼 탄력이 있어, 묵직한 분위기와는 달리 20대 중반으로 짐작되었다.
이런 스타일의 남자는 한번 사귀면 충실한 진돗개처럼 바람도 피우지 않고 자신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보였다.
근처의 여자들이 침을 흘리며 혼자 앉아 있는 남자를 흘끔거렸다.
구두가 아닌 검은 스니커즈가 활동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짐작이 되고 조금 더운지 팔뚝까지 밀어 올린 니트 밑에 보이는 단단한 근육은 여자라면 누구나 만져보고 싶은, 아니 안겨보고 싶은 남성 호르몬이 넘쳤다.
딸랑.
작게 울리는 종소리에 고개를 돌린 덩치 큰 남자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반겼다.
새로 들어온 남자는 차갑고 섬세한 느낌의 남자로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칼같이 주름이 잡힌 진한 회색 양복을 입고 있는 차가운 도시 남자의 전형으로 보였다.
은색 시계가 왼손 손목에 감겨 있고, 푸른 계열의 넥타이에는 은색 넥타이핀이 단정히 꽂혀 있었다. 같은 모양의 은색 커프스가 소매에 살짝 보여 세련미가 돋보였다.
브라운 계열의 머리카락은 염색한 것이 아닌 원래 천연색으로 보였다. 앞쪽 머리는 덜도 더도 아닌 젤로 깔끔하게 만져져 있고, 옆머리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넘겨져 있었다.
하얀 피부에 차분하고 서늘한 눈빛의 미남으로 얇게 진 쌍꺼풀과 눈매가 금욕적인 매력이 넘쳤다. 눈동자도 밝은 고동색이었으나 부드러운 이미지라기보다는 이지적인 느낌이 큰 이유는 가로로 길게 뻗은 눈매 때문인 듯했다.
한 치의 흠도 보이지 않는 비즈니스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델로 보이는 이 남자는, 전체적인 깔끔한 모습에 잘 손질된 손톱까지 완벽주의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구두 역시 좌우가 대칭을 이룬 끈으로 칼같이 묶여 있어 왠지 이 남자 앞에서는 긴장감이 들게 했다.
곱상한 외모의 도시적 미남이지만, 차분한 분위기와 이런 성격이 함부로 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경고 같았다.
바 근처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이 남자를 보고, ‘저렇게 차가워 보이는 남자가 사귀면 나에게는 따뜻하겠지’라는 상상을 하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보이는 것과는 달리 독한 술을 좋아하는지 향이 좋은 코냑 엑스트라를 손에 쥐고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 박동수가 걸려온 전화를 받아 길을 설명했다. 박동수가 맥주를 추가로 한 병 더 시켰을 무렵, 종소리가 울리며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문재준이 손을 살짝 들자, 그곳으로 걸어가며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과장해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습관인 듯 진한 갈색 가죽으로 된 큼직한 가방을 손에 쥐고 하얀 치아가 보이게 환한 웃음을 얼굴 전체에 띠고 있었다.
184센티미터 정도 되는 길쭉한 몸을 접어 의자에 풀썩 앉아 가장 덩치 큰 사내의 어깨는 친근하게 툭툭 치고, 차가운 인상의 남자에게는 애교 있게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중간 회색 톤에 네이비와 와인 색의 체크가 포인트로 있는 핏이 딱 떨어지는 캐주얼 정장을 입었다. 아이보리 캐시미어 터틀넥을 안에 입고, 붉은 실크 스트라이프 행커치프로 모양을 낸 패션에 민감한 차림이었다.
앞에 살짝 나온 갈색의 부드러운 양가죽 구두를 신고, 양말까지 전체적인 패션에 어울리는 캐시미어 재질의 진한 회색이었다.
밝게 웃는 남자가 도착하자, 조용했던 분위기가 깨지며 원래 와 있던 두 남자도 간간이 웃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성격이 활발하고 대인관계에 능숙해 주변을 잘 배려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의 여자들은 하나둘 이들의 일행이 도착할 때마다 눈을 빛내며 온갖 상상을 펼치며 관찰을 했다.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는 배려심 있고 친절한 부드러운 도시 남자로 보였다. 옷과 액세서리 역시 고급이고 유행에 맞춘 모습이 멋들어져서 같이 다니면 자랑하고 싶은 남자였다.
나이도 갓 30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해맑게 웃어 보이는 남자는 피터 팬이 떠오르는 장난기 넘치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같이 있으면 종일 다정하고 재미있게 해줄 수 있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이 남자는 바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하며, 한 손으로 목 넘김이 좋은 깔루아 밀크를 마셨다.
좀 전에는 프로즌 마가리타를 마신 걸로 보아서 가벼운 칵테일 종류를 그때 기분에 따라 시켜 마시는 걸로 보였다.
바에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는 세 남자는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워낙 심각하고 때로는 험악해 보이기까지 해서 끊임없이 접근할 기회를 노리던 주변 여자들이 한숨을 쉬며 다가가지 못했다.
“차형욱 회장이……. 천사 같은 우리 은우 님에게……. 전에…….”
“쳇! 우리 천사님을 어떻게……. 차형욱 같은 놈이…….”
“형욱 형님이……. 너무해……. 생일파티…… 보스, 아빠라고…….”
공통으로 계속 들리는 단어로는 ‘천사’와 ‘차형욱’이라는 이름이었다.
바 테이블에서 와인 잔을 닦으며 귀를 쫑긋거리던 바텐더의 생각으로는 차형욱이라는 사람의 뒷담화와 천사를 좋아하는 광신도들이 모인 거로 추측했다.
가운데 자리 잡고 앉은 문재준은 코냑을 홀짝이며 살짝 붉어진 얼굴로 은우의 시아버지 되시는 차현수 보스의 생일잔치 스토리를 듣고 있었다.
그 옆에서 맥주를 물처럼 흡입 중인 박동수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아까부터 반 이상 남은 깔루아 밀크를 테이블에 놓고 입을 놀리는 정도훈이 보였다.
주로 정도훈의 폭풍 수다가 현실감 넘치는 성대모사로 인해 더욱 흥미롭게 대화를 장악하고 있고, 가끔 잊은 부분이나 강조를 위해서 박동수의 보조 수다가 끼어들었다.
그 속에서 회사 일로 인해 그때의 깜찍한 은우 님을 보지 못한 문재준은 마치 자신이 그 생일파티에 가본 듯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정도훈은 역시 최고의 입담꾼이었다.
우직한 박동수가 그때 술 취해 감히 은우 님에게 들이대다 훅 간 불쌍한 놈 이야기를 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를 치는 정도훈과 경비시스템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시어머니 문재준이었다.
그러다 은우가 알아서 처리한 듯 보였던 참혹한 그놈의 얼굴과 죽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며 무서워하기는커녕, 그저 차형욱에게 혼날까 봐 신경 쓰고 오히려 그 짐승 같은 차형욱을 보호하려고 했던 걸 설명하자 다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문재준이 교육자에 빙의한 뒤 은우 교육 프로그램을 빨리 작성해 실행해야겠다고 혼자 잔소리를 시작했다.
정도훈은 악마 같은 차형욱을 욕하며 둘을 떨어트려 놔야겠다고 침을 튀기며 외쳤다.
그 모습에 박동수는 절대 불가능한 말이라며 자신은 그러면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침울해했다.
은우 님 없이 날뛰는 차형욱 회장은 더는 아무도 제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양털을 뒤집어쓰고 천사님의 손길에 메에, 메에, 거리는 초식동물 흉내를 내고 있지만, 언제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모르는 흉흉한 짐승임을 잊으면 안 됐다.
그때, 냉철한 문재준은 이미 스마트 폰 메모장에 ‘은우의 정서발달 학습지 신청할 것’이라고 메모를 쓰고 있었다.
잔뜩 흥분해서 천사 보호를 외치는 정 많은 정도훈과는 달리 현실 파악이 빠른 문재준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우직한 박동수는 회장님과 은우 님의 안전에 좀 더 신경 써야겠다며 혼자 반성 중이었다.
참으로 다른 세 명의 남자는 원래 알고 지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친해진 건 은우 님이 내려오고 나서였다.
역시 천사 광신도들의 모임답게 은우 님의 패션과 교육 관련, 또 안전에 대한 것이 대화의 주를 이루었다.
딸랑 딸랑 딸랑.
바에 달린 문이 연속으로 울리며 단체 손님이 들어왔다. 아까부터 예약이라고 쓰여 있던 테이블이 구석에 있었는데, 그곳의 손님으로 보였다.
카멜 색깔의 롱코트를 입은 190센티미터에 육박한 큰 키에 어울리는 균형 잡힌 큰 덩치를 지닌 남자가 8명의 남녀와 함께 바에 들어오고 있었다.
보기에는 무슨 운동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딱 벌어진 어깨며 근육이 보이는 남자는 따뜻한 느낌의 깔끔한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살짝 놀라 대화의 소리를 줄이고, 눈치를 보는 손님들이지만, 곧 착해 보이는 웃음과 털털하게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에 긴장을 풀었다.
잘생긴 건 아니지만, 중후한 멋이 흐르는 30대 중반의 남자는 부드러운 리더 스타일로 보였다.
성공한 남자의 여유가 흐르는 남자의 표정과 분위기에 바에 있는 여자들의 눈빛이 또 빛났다.
오늘 밤 이 바는 물이 환상적으로 좋았다. 연말 외로운 싱글들의 시선은 황홀감에 불타올랐다.
정말 딱 그 말이 맞았다. 하나만 걸려라…….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이자 성격으로 보이는 새로운 남자의 등장에 많은 시선이 몰렸다. 얼굴을 살짝 붉히고 쑥스러운 표정을 짓던 곰 같은 남자의 눈이 돌연 커졌다.
일행들에게 잠시 실례를 한다고 말한 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바 테이블로 걸어갔다. 남자가 오리지널 킹카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역시 끼리끼리 노는 갖고 싶은 남자시리즈다.
아까부터 3, 4명씩 옹기종기 앉아 주변 여자를 스캔하는 남자들을 모두 송사리에 붕어,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는 죄 많은 남자들이었다.
살짝 바 테이블에 걸터앉은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반갑게 대화를 시작했다.
사무실 직원들 몇 명을 데리고 회식 후 간단히 한잔하러 왔다는 남자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달콤한 아이스 와인을 선택했다.
4명의 남자가 서로 호감을 보이며 잔을 부딪쳐 가볍게 건배를 하고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엿듣던 바텐더는 또다시 시작된 천사님의 이야기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대체 저 대화의 중심인 천사가 누구인지 궁금해 미칠듯한 바텐더였다.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몇 번 회장실에 찾아와 안면을 익힌 구철민 대표와 반갑게 인사를 한 문재준과 박동수다.
정직하고 무난한 성격의 구철민을 내심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박동수는 성격이 둘이 비슷한 면이 많아서 그런지 금세 호형호제를 하며 가까워졌다.
문재준도 평소의 까칠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잘 모르는 정도훈과 구철민을 소개해주었다. 낯가림 없는 정도훈이 구철민과도 살갑게 이야기를 하자, 이들의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이들을 이어주는 천사 은우가 있기에 또, 씹을 대상인 차형욱이 있기에 화제를 찾을 필요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남자들의 수다였다.
“에취.”
갑자기 터져 나오는 기침에 은우가 차형욱을 빤히 올려다봤다.
“아가, 아파?”
발꿈치를 높이 들고 자신의 이마를 만져 오는 하얀 손에 괜찮다고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차형욱이었다.
이상하게 저녁부터 귀도 간지럽고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재채기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짐승 같은 본능을 슬슬 자극해오는 것이 있었다.
오늘 약속이 있다던 박동수!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문재준!
결정적으로 오늘따라 매일 출근하듯 찾아오던 정도훈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턱에 손을 가져가 슬슬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차형욱은 자신을 허리에 매달려 웃는 은우를 보자 반사적으로 피어나는 미소에 아무렴 어쩌랴 하며 넘겼다.
천사 광신도들의 모임을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지켜주는 중이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