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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14/16)

14장

어둠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하며 빛을 발했다. 두 번도 울리기 전에 길게 뻗은 손이 핸드폰을 낚아챘다.

“말해.”

“일어나계셨습니까.”

동트기 직전인데도 바로 전화를 받는 박승혁에게 명준이 용건 대신 인사를 건넸다. 박승혁이 다른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됐으니까 말해.”

“이 경위님이 회사를 빠져나가셨습니다.”

박승혁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잠결에 진동 소리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손부터 뻗은 거라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힐긋거려 본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그걸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전날 오랜만에 등을 끌어안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잠이 들면 별실을 빠져나갈 거라고. 그럼에도 그를 묶는 등 여타 다른 장치를 하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지훈이 머리를 굴려 그토록 바라던 ‘소원’을 들어준 셈이 되거나, 아니면 그도 지쳐 이대로 제품 안에서 아침이 되도록 잘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중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에게 맡긴 셈이다.

결과는 전자였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데다 거친 정사를 견딘 몸으로 기어이 여기서 빠져나갔다.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빈소에 가 직접 마지막 인사라도 하겠다는 게 우스웠다. 그놈이 뭐라고.

“어떡할까요?”

아무 말 없는 큰형님에게 명준이 다시 물었다. 박승혁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닥에 너저분한 정사의 흔적 속엔 자기가 찢어 버린 정복 셔츠도 있었다.

“언제 나갔는데.”

“삼사십 분쯤 됐습니다. 경비가 보고 불렀으나 무시하고 나갔답니다. 나가자마자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하고요.”

“경비가 보기에 직원처럼 보이진 않았나 보지?”

“네. 시간도 시간이지만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답니다. 경비가 부른 것도 수상해서가 아니라, 걷는 것도 불편해 보이고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불러본 거랍니다. 옷도 자기 몸보다 큰 걸 걸치고 있어 눈에 뜨였고요. 몸이 안 좋아질 정도로 야근한 직원 정도로 생각하길래, 그냥 뒀습니다. 방금 영상 확인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명준의 보고를 들으며 협탁에 반쯤 걸치도록 던져놨던 양복 재킷을 뒤적였다. 예상한 대로 지갑이 없었다. 현금이나 카드를 써야 어디로 가든가 뭔가를 사든가 할 테니까. 카드는 뭐가 신용카드이고 체크카드인지 일일이 확인하기 힘드니 일단 통째로 들고 나갔을 것이다. 그래도 카드보단 되도록 현금을 사용하려 하겠지만.

통화를 스피커 모드로 바꾸고 문자 내역에 들어갔다. 예상한 대로 거래처나 영업소 관리자들에게 온 문자 몇 개 빼고는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역시 카드는 쓰지 않았다. 옷은 급한 대로 붙박이장에 있는 내 옷을 걸치고 나갔겠지. 

옷도 모자라, 허락도 없이 대부업체 이사 돈까지 빼갔다 이거지. 하여튼 간 큰 새끼.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이자 쳐서 받아 내야겠네.”

“네?”

“아니다.”

박승혁은 양복 재킷을 침대 위로 던지며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신인 채로 별실 문을 열었다. 널찍한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현재 소재지는, 파악했냐?”

“일단 김준영 형사 빈소 앞에 부하들 몇 보내놨습니다. 저는 이 경위님 집으로 가고 있고요.”

“어젯밤부터 빈소 마련됐다면서. 그럼 곧 조문객들 몰려올 거다. 형사인 만큼 경찰들 많이 들락날락할 거야. 병원 안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만 지켜보라고 해. 그놈들 병원 안에서 어슬렁거리면 분명 눈에 뜨여서 말썽 일으킬 거다.”

“이 경위님을 보면 어떻게 하라고 할까요?”

“놔둬.”

“······제가 집 앞에서 경위님을 보면요?”

“나한테 보고만 해.”

사무실 서랍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꺼내며 본 서랍 내부엔 며칠 전부터 넣어놨던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액정이 박살 났던 핸드폰. 하지만 차 키는 그대로였다. 소리 없이 비식댄 다음 서랍을 닫았다.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인 담배 사이로 희뿌연 연기를 뿜어냈다. 차 키는 챙기고 나가봤자 짐만 될 게 뻔하니까 놓고 갔겠지. 자차 몰고 다니면 바로 꼬리가 밟힐 거니까. 급하게 나간 와중에도 머리 굴려 필요한 것만 챙겨간 게 우습다.

명준은 가만히 있었다. 아마 제가 모시는 큰형님의 말이 이해되지 않은 듯하다. 별실에 묶어두고 감금시킬 정도로 빈소에 가는 걸 싫어하시는 것 아니었나, 싶겠지.

“그 정도로 가고 싶나 보지.”

“······그럼 경위님이 김준영 형사 조문하는 걸 말리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

박승혁은 담배를 피우며 소파에 앉았다. 나신이라 몸에 닿는 소파 가죽이 차가웠다.

“내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형님이요?”

“그래.”

“······네.”

폐건물에서 오갔던 대화를 알 리 없는 명준은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궁금해도 제 큰형님이 말하는 것에 토 달 마음도, 생각도 없다. 그저 그런 말을 꺼낼 정도로 어젯밤이 좋으셨나 짐작할 뿐이다. 지훈의 부탁을 들어줘 그가 요청한 ‘물건들’을 손수 가져다준 건 자신이니까.

뜸을 들인 대답에 박승혁이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이해 안 가지? 어쩌겠냐. 세상엔 이해되지 않는 게 있는 법인데. 네가 나한테 보고하지 않고 이지훈한테 약 갖다준 것처럼.”

어떤 말이라도 일단 네, 하고 대답부터 하고 보던 명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된다고 내 입으로 먼저 말하기도 했고, 너야 나를 위해서 말하지 않았겠지. 우리 형님, 많이 쌓이셨을 텐데 이참에 깜짝 이벤트나 도와드려야겠다, 하고.”

“형님······”

“네가 뭘 알았겠냐. 이지훈이 약 태운 술 나한테 처먹일 줄 알았겠어?”

“예?”

박승혁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말했었지? 이지훈은 미친놈이라고.”

“······저도 보통이 아니시라고 말씀드렸던 적 있죠.”

“그래.”

“죄송합니다,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걱정할 거 없다. 다 풀었으니까.”

재떨이에 회색 재를 탁 털어냈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에 명준이 “네”라고 짧게 대꾸했다.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어.”

“어떤 건지······”

“일단 밑에 애들한테 얘기해. 병원 밖에서 지켜보되, 이지훈이 들어가도 가만히 놔두라고. 보고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마. 어차피 걔 택시 타고 올 거다. 택시가 병원 안까지 들어갈 리는 없고, 정문에서 내리겠지. 알아보기는 쉬워. 단, 이지훈이 병원 들어갔다가 나온 뒤부터는 거리를 두고 미행해. 보낸 애 중에 철성이도 있나?”

“없습니다. 경위님 보자마자 바로 데려오라고 하실 줄 알고······ 철성이한테 지금 당장 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애들 다 빼고 제일 믿음직한 놈 한 명만 남겨놔. 어차피 다 철성이보다 어린 애들일 거 아니야. 무조건 철성이 말만 들으라고 해. 물론 너나 내가 나타나면 다르겠지만.”

“둘만 맡겨도 괜찮을까요? 혹시나 그 여자가······”

“숫자 많으면 미행에 걸리적거린다. 미행 가장 잘하는 놈한테 맡겨. 그년이 움직인다 싶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하고. 철성이야 뭐, 자기 목숨보다 이지훈이 목숨을 더 지킬 놈이니까 연락받고 달려갈 때까진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그년도 담이 작아 절대 먼저 나서진 못할 거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그때도 내가 움직이니까 그제야 선수 쳐 버리는 거 봐라.”

“네. 알겠습니다.”

이철성은 작년 지훈이 백가연에게 납치됐었던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물어 제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그도 자기가 믿어 왔던 동생인 김구정에게 속았던 거였고, 그걸 고려한 박승혁이 철성에겐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으나 명준이 말리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엔 혼자서 지금까지 지훈을 미행하고 보호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융통성은 없어도 쓸데없이 정 많고 우직한데다 충성스러운 놈이다. 미행하며 봐온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무엇보다 제가 모시는 큰형님이 이지훈을 생각하는 정도의 깊이를 짧지 않은 시간을 통해 깨달았을 거다. 

지금의 철성은 자기 목숨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명준이나, 심지어는 박승혁보다도 이지훈을 먼저 지키고 볼 놈이었다. 박승혁도 그걸 알고 있기에 인원을 감축해도 철성 하나만으로도 믿음직한 걸 테다. 게다가 철성은 몇 개월 동안 미행만 한 놈이라 미행 쪽에선 제일 믿을 만하기도 했고.

“더 보고할 건.”

“없습니다.”

“그럼 됐다. 이지훈 나타나면 보고만 하고 직접적으로는······ 아.”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박승혁이 반쯤 짧아진 담뱃대를 손가락으로 굴리다 물었다.

“너 집 앞엔 도착했냐?”

“네. 형님과 통화하는 중에 도착해서 지금 주차장에 있습니다.”

“아직 나오진 않았겠고.”

“네. 이 시간에 검은색 정장을 구할 순 없을 거라 집에서 갈아입고 나올 겁니다. 몸도 좀 추스르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

담뱃대를 굴리는 손가락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생각하는 동안 스스로 만든 회색 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명준은 박승혁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지금 시간에 근조 화환 배달되나?”

“네. 될 겁니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대부업체 이사로서, 여러 영업소를 둔 조폭으로서 오랫동안 거래처를 상대해와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명준은 모른 척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망설이고 있는 거다. 이유야 알고 있다.

마른 혀가 입술을 쓸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후에야 말했다.

“······지금 바로 하나 주문해서 거기 보내.”

“네. 경위님 가시기 전까지 도착하게 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박승혁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놨다. 핸드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착지했다.

“쯧.”

머리를 쓸어 넘기는 표정이 못마땅함으로 가득했다. 짜증스럽게 손을 내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인 환심 사려고 싫은 놈에게 근조 화환 보내는 꼴이라니. 부하에게 질질대는 모습만 보여준 것 같다.

고작 이 정도에 네 기분이 풀릴까. 내 이름이 적힌 근조 화환을 알아보기나 하고, 내 의도를 알아차리기나 할까. 내 입으로 말하기엔 쪽팔린 것들. 

네가 스스로 먼저 알아봐 줬으면 하는 내가 치졸한 놈인 걸까.

‘그럼 왜 내가 여기 갇힌 건데. 왜 김명준 시켜서 나를 여기에 처넣고, 이지균은 나한테 전화해서 왜 좆같은 소리 늘어놓는 거고, 준영이는 왜 죽은 건데.’

당시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데다 니코틴과 양주를 다량으로 부어 온전치 않은 머리는 쉬이 돌아가지 않았다. 왜 뜬금없이 지훈이 이지균이란 이름을 입에 올리는지 의아하면서 다른 게 더 거슬려 질투심이 일었었다. 내 앞에서 김준영 형사만 성을 떼고 친근하게 불렀다는 게. 그런 자신이 치가 떨리도록 짜증 났었다.

시간이 흐른 후 떠오른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명준에게 핸드폰을 주며 모든 내역을 뒤지게 한 후에도 의아함은 가득했다.

그 상황에서 뜬금없이 왜 그놈 이름을 입에 올렸을까. 너는 분명 가족과 연을 끊었냐고 물었던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설마 내가 그 기생충 같은 놈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입에 올렸던 거냐? 그 정도로 내가 너한테 믿음을 못 줬나? 그 기생충과 나를 엮어서 오해할 정도로?

후에 핸드폰을 뒤져 나온 내역을 보고 내가 별실에 도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통화했다는 걸 알았다. 그 이전엔 다행스럽게도, 통화하거나 연락한 기록이 없었다.

통화한 것 자체를 탓하지는 않는다. 핸드폰에도 이지균이 보냈던 추악한 메시지가 가득했으니까. 경찰인 네가 도저히 무시하지 못하는 내용이었지. 문제는 어떤 통화를 했냐는 거다. 

내가 별실에 들어가기 몇 시간 전에 했던 통화에서 분명 어떤 말을 들은 거다. 그 새벽에.

후에 거기에 관해서 물어보자니 이미 너는 나에게 불신만 가득했다. 내가 뭘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을 거고,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았을 거다. 

할 말은 없다. 너를 속여 별실에 가뒀고, 감금된 뒤에 김준영이 사망한 소식을 타인에게 듣게 했으니까. 나를 의심해도 할 말은 없지.

그래도 내 속도 상했다는 걸 알기는 할까.

핸드폰을 뒤져 어머니에게서도 저주 내용이 담긴 카톡을 이따금 받는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걸 알았을 땐 답답함에 한숨이 나왔다. 번호도, 문자도 차단했으나 카톡은 차단하지 못했다는 것부터가 네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련을 말해주고 있었다.

미련한 놈. 어리석은 놈. 

너에게 고통만 안겨준 것들인데 뭐가 남아서 그렇게 끊지 못하는 건지. 이따금 보내는 연락이라곤 그딴 내용만 담긴 건데, 그거라도 보고 싶은 거냐? 그것도 어머니라고?

안 그래 보여도 정에 휘둘리고, 끊어내질 못하는 게 답답하면서도 그런 네가 좋았다. 까칠한 표정에 건들거리고 욕설을 내뱉고 건방져도 속은 여리고 사춘기 온 소년 같았다. 겉으론 흙탕물이어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물속이 훤히 비치는 사람. 여전히 가족에게서 정을 갈구하는 사람이다.

나로는 그게 안 채워졌던 걸까. 힘들어할 때 옆에 있어 줬건만. 물론 그 속엔 음흉한 의도도 있었지만, 너를 위한 마음이 컸는데.

미간을 구겼다. 담배를 깊이 빨아당겨도 답답한 속은 여전했다. 그날처럼 양주가 당기는 듯했다. 지훈과 별실에서 날 선 대화를 하기 몇 시간 전, 김준영 형사를 죽이려고 했던 때가.

평소답지 않게 감정 조절을 못 해 줄담배를 피우고, 속에 양주를 들이부은 건 김준영을 처리하려고 했던 계획을 시행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계획대로 했다면 후련함에 노래라도 불렀겠지.

백가연. 그년이 낚아채 갈 줄이야.

명준에게 시켜 지훈을 속이고 별실에 감금한 것엔 김준영을 처리하고, 일을 수습하는 동안 지훈이 눈치채지 못 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백가연으로부터 숨기려는 게 컸다. 숨겨서, 아무도 못 찾게 해 어떠한 수작질도 부리지 못 하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백가연이 두려운 건 아니다. 김준영으로 인해 그가 백가연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김준영은 사망하기 며칠 전, 지훈이 근무하는 서로 찾아와 그와 만났고, 카페에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철성이 녹음한 파일을 명준에게서 보고 받아 알고 있다. 보고는 즉각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준영을 미행하던 자가 있었다는 내용을 들은 명준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김준영의 최근 정황을 알아보는 며칠간 보고를 미뤘던 탓에, 보고는 조금 늦어졌다.

내용이야 박승혁이 예상한 거였다. 끝까지 저 혼자 욕먹기는 싫어 포장하려는 같잖은 놈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거기에 넘어간 지훈의 착잡한 목소리까지 더불어서 짜증만 일었었다.

다만 철성의 보고에서 마음에 걸렸던 건 ‘김준영 형사를 미행하는 자가 있었다’였다. 미행한 자가 백가연 끄나풀이라는 것 정도야 쉽게 유추해냈다. 문제는 왜 백가연이 김준영을 미행했느냐다. 김준영은 백가연 쪽 사람이 아니었나?

깨끗한 척은 해도 결국엔 지훈의 납치 사건을 계기로 이쪽 세계와 유착관계를 형성한 비리 형사 중 하나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왜 미행당하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자신과 지훈처럼 성적으로 얽힌 관계이고, 백가연이 그가 다른 짓 하지 못 하게 하려고 미행을 지시한 거라고 하기엔 서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섰다는 게 걸렸다. 

무엇보다 백가연이 한창 이 바닥에서 공공연하게 소문이 날 정도로 어린 남자들을 끼고 놀 때, 취향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김준영이 백가연의 취향도 아니거니와, 그 자신도 제 나름대로 깨끗한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기준을 넘어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남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김준영이 백가연에게 감시받는 꼭두각시라는 것. 김준영은 백가연과 유착관계를 형성해 그녀의 후원을 받는 게 아니라, 약점 잡힌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면? 그래서 허튼짓 따윈 하지 못하게 감시당하는 거라면? 

그럼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넘어가 버렸다면서 지훈 앞에서 질질 짜는 행동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나는 겉보기엔 조폭의 꾐에 넘어가 선배 형사를 납치당하게 일조했으나 실상은 그들의 감시를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꾐에 넘어간 것도 내가 너무 순진해서 그런 거다, 라고 자기연민에 빠졌겠지.

생각할수록 한심하다. 경찰이면서 백가연 같은 년에게 약점이나 잡혀 꼭두각시 취급이나 받는 놈. 제가 가진 걸 이용하려는 시도조차 못 하는 놈. 확실히 불리해도 일단 앞발 세우고 덤비는 게 제 스타일이다. 지훈이 그런 스타일이고.

자기 상대가 못 되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반항하고 달려드는 그를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비식댔다. 혼자 우습게 비식대는 걸 알아차리곤 혀를 차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생각에 잠기느라 담배는 어느새 반 이상 줄어있었다.

김준영은 백가연에게 약점 잡힌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거기엔 조금의 연민도, 동정도, 관심도 없다. 그냥 거기까지인 놈일 뿐이다. 

다만 우려되는 건, 백가연이 김준영을 미행하도록 한 목적 끝엔 지훈이 있을 것 같다는 감을 느꼈다. 그래서 일단 지훈을 별실에 숨겨 놓고, 그 참에 계획을 시행하려고 했다. 더 이상 봐주면 또 서까지 찾아올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전부터 김준영을 미행해왔을 백가연이 먼저 알아채 손을 써버렸다. 봐주고 봐주던 먹잇감을 사냥하기 직전에 뺏겨버렸다는 생각에 줄담배를 피우고 양주를 들이부었다. 

별실에서 지훈과 날 선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과적으론 지훈을 노리는 게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김준영은 백가연에게 꼭두각시보다도 버릴 날을 기다리는 장기 말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장기 말을 버린 이유는 당연히 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겠지. 김준영은 나를 엿 먹이기 위한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지균과 백가연의 관계야 지훈을 감금시켜 둔 동안 뒷조사를 통해 알아냈다. 김준영의 사망부터 이지균과 오래전부터 유착관계를 형성한 걸 보면 그 일을 겪고도 이지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다. 징글징글한 년. 

작년 서에 출두했을 때도 이지훈 이름 석 자를 끝끝내 언급하지 않은 걸 보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지훈에 대한 집착이 높은 듯했다. 그래서 이지균에게도 접근했겠지.

백가연에겐 김준영보다 이지균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죽이 잘 맞는 놈이었을 거다. 둘의 목적도 같고, 대놓고 시궁창인 걸 인정하는 것들이니 거리낌이 없었겠지. 

김준영의 사망과 이지균이 지훈에게 전화해 저에 대한 의심을 심어놓은 것까지, 다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짠 계획이었을 거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박승혁이 등을 젖혀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마지막으로 연기를 내뱉고 짜리몽땅이 된 담배를 재떨이에 던졌다.

내가 너무 마음 놓고 있었나. 지훈이 내 옆에 있다고 너무 안심해서, 나도 모르게 방심해버렸나. 몇 개월 전 오피스텔에서 같이 지낼 땐 처음 느껴 보는 안정감에 영원히 이렇게 살고 싶다는 어린애 같은 착각에 빠졌었다가, 지훈이 독립한 후엔 아쉬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영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조차 낯설다. 누군가와 같이 눈을 뜨고 같이 생활하고 지내는 게 이리도 편안할 줄은 몰랐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푹 빠져 지냈음을 깨달았다.

백가연은 작년 사건 이후 호되게 당하고 본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지하세계로 숨어버렸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동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저 깊이 숨어버려 안심했으나, 그게 더 패착을 몰고 온 셈이다.

자책에 시달릴 법도 하건만, 박승혁은 재떨이를 무표정하게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표정엔 후회도, 낭패감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막 떠오른 해가 사무실 안으로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가운이라도 입어야 곧 들어올 비서가 놀라지 않을 거다.

* * *

병원 정문에 가까워지자 한 남자가 스쳐 지나갈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곳을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움츠린 몸은 스쳐 지나간 남자가 멀어지고서야 폈다.

정문을 나온 지훈의 표정은 음울했다. 피로와 병색이 완연하게 묻은 얼굴이 어두웠다. 검은색 정장 재킷 단추를 풀었다. 제 몸보다 헐렁해진 양복 재킷이 걸을 때마다 사방으로 펄럭였다. 재킷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콜록댔다.

조금 전, 드디어 준영의 빈소에 찾아가 조문했을 때를 떠올린 지훈은 감정이 복받쳐 입술을 깨물었다. 동이 튼 지 얼마 안 된 이른 아침이라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아는 사람을 만나 붙들리진 않았으나 대신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들을 마주 봐야 했다.

영정 사진을 보면 눈물이 터질 줄 알았는데, 상주들을 보니 우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삼켰다. 

저보다 어린 후배 사진 앞에 분향을 올리고 절을 하는 기분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이렇게 인사는 하고 보내게 되어 다행이라는 자기 위안적인 생각이 혐오스러우면서도 살 것처럼 목구멍을 뚫어줬다.

박승혁에게 약을 먹이고, 정복 입은 채로 섹스해서라도 빠져나와 조문하지만 결국 이것도 저를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지독한 자기혐오가 일었다. 잘 가라는 인사나 사과하려는 마음도 사라지고 얼른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부의금을 내고 바로 돌아서려는데 상주들에게 붙잡혔다. 뿌리치려고 하다가 준영을 빼다 박은 앳된 얼굴에 결국 자리에 앉았다.

먹지 않겠다고 말해도 준영의 여동생들은 식사를 차려주며 지훈에게 준영과 어떤 사이인지, 직장에서 어땠는지, 최근에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할 정도로 힘들었는지, 동아줄처럼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 얼굴을 마주 보기 힘들어 고개만 숙였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운 거라 일부러 사람 없는 시간대에 간 건데, 대신 조문객이 저 혼자라 그 질문들을 혼자서 상대해야 했다.

“몇 개월 전 인사이동 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만 하고 입에 밥을 밀어 넣었다. 모래알처럼 씹히는 밥알을 꾸역꾸역 먹었다. 초점 없이 뚫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받아 내는 속이 얹힐 것 같았다.

생기라곤 없는 차갑고 가라앉은 분위기에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다. 한쪽 구석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저 같은 놈이 슬픔을 드러내는 행동조차 실례였다. 쳐다보는 얼굴들을 최대한 무시하고 밥과 육개장을 비워내자마자 일어섰다. 도망치듯 인사하고 빠져나와 1층 화장실에서 게워내고 나왔다.

위액까지 뱉어낸 몸이 탈수 증세를 느끼고 있었다. 지훈은 현기증을 느끼고 인도를 걷다가 한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에서 물병 하나를 꺼내와 카운터에 올린 다음, 담배 이름을 얘기하며 앞에 진열된 라이터도 하나 집어 올렸다.

“세 개 계산해주세요.”

“네.”

직원이 바코드 스캐너를 들어 라이터부터 찍으려는 때였다. 지훈이 지갑을 꺼내다 머뭇거린 다음 말했다.

“그냥 물 하나만 계산할게요.”

“네.”

‘삑’하는 소리와 함께 직원이 “950원입니다”라고 말했다. 지훈은 주머니에서 검은색 지갑을 꺼내 들었다. 두툼한 지갑 안엔 카드와 현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돈지랄은 씹······’

머뭇대던 손가락이 지폐가 든 칸으로 들어갔다.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고, 직원은 “만 원 받았습니다”라며 거스름돈을 건네주었다. 대충 지갑 안에 동전까지 쑤셔 넣고 닫았다.

지훈은 편의점을 나가지 않고 카운터 근처에 서서 물 한 병을 뚜껑을 따자마자 한 번에 비워냈다. 빈 병을 버리고 밖에 나온 그는 편의점 앞에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지 오 분쯤 지났을까, 택시 한 대가 다가와 편의점 앞에 멈췄다. 지훈은 잽싸게 택시 문을 열고 올라탔다. 손님을 태운 택시가 출발해 어디론가로 향해 달려갔다. 

편의점에서 거리를 한참 남겨두고 갓길에 세워져 있던 차에 시동이 걸렸다. 차에 타 지훈을 지켜보던 철성이 차를 출발하며 옆에 대고 말했다.

“명준 형님께 전해라. 방금 택시 타셨다고.”

“예.”

보조석에 있는 앳되고 덩치 큰 사내가 대답하며 핸드폰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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