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눈동자만 내려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꺼진 핸드폰을 아무 데나 던졌다. 세 번째로 던져진 핸드폰이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동시에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보인 사람은 예상대로 박승혁이었다. 박승혁을 제외하곤 이곳에 들어올 사람은 없다. 그의 명을 받은 명준이라면 모를까.
문이 열리자마자 욕설을 내뱉으려 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그 면전에 대고 쏟아내고, 멱살을 틀어쥐려고 했다. 힘의 차이가 나 밀리면 어디를 깨물어서라도 이곳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사무실에서 튀어나온 경찰이라고 알려지든 말든, 뛰쳐나가 준영의 집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선 채로 그를 쳐다볼 뿐이다.
손을 뒤로 해 문을 닫는 박승혁의 모습은 결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늘 정장을 빈틈없이 갖춰 입었던 그인데 몇 시간 전의 명준보다도 더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피곤한 낯빛이었다. 짜증이 지독히 묻은 얼굴은 어두웠다. 문을 걸어 잠그는 손짓까지, 짧은 모습만으로도 취기가 느껴졌다.
“······”
예상외의 모습에 가만히 노려보던 지훈은 손을 들어 코를 만졌다. 그의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흡연자인 자신이 맡아도 ‘나도 피우고 싶다’라는 생각보다 인상이 먼저 찌푸려질 정도였다. 희미한 술 냄새까지, 이 정도면 줄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신 거다. 술 중에서도 양주.
음주운전 했나. 경찰이라고 어지러운 머릿속에 든 생각이다.
화를 내고 노려볼 사람은 저인데, 오히려 박승혁이 그를 무표정으로 노려봤다. 장난기 없는 무표정. 오랜만에 이곳에서 보는 얼굴이었다. 몇 가닥 내려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서늘했다. 순간 작년 기억에 지훈이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적반하장의 모습에 할 말도 들어갔다.
“······음주운전 했냐?”
“허.”
어이없게 터진 웃음이 지훈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다른 곳을 보며 짧은 헛웃음이 날린 박승혁이 혼잣말했다.
“꼴에 경찰이라고······”
비웃는 게 다분한 말투였다. 지훈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놨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뭐가.”
“내 입으로 말해야 처 알아듣냐? 부하 시켜서 별실로 오게 속이고 감금한 거랑······”
“그거랑 뭐.”
바닥에 놓인 핸드폰을 쳐다보는 고개가 삐뚜름했다. 별실에 차오르는 담배 냄새와 양주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그만큼 지훈의 분노도 점점 강해졌다.
박승혁이 삐뚜름한 고개를 까딱였다.
“뭐. 말을 해봐.”
“박승혁. 하나만 묻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르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지훈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나한테 일어난 일, 전부······ 전부 너랑 관련된 거냐? 네가 한 거야?”
하아······ 박승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쳤다기보다는 너무 들어서 짜증이 배인 듯한 한숨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상황만 보면 자신이 애인에게 물었던 걸 또 물어 닦달하는 치졸한 놈이었다.
길게 내쉰 한숨이 멎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
“당연한 거 물어서 짜증 나게 하지 마. 기분 안 좋다.”
할 말을 잃고 쳐다봤다.
“내가 너 억지로 여기 처넣었어? 나는 최대한 매너 지켜서 데려오라고 했어. 핸드폰도 안 뺏고. 여기서 며칠만 기다려. 서엔 알아서 병가 처리할 거니까. 며칠만 있으면 알아서······”
“내가 착각했네.”
“······”
“조폭 새끼 맞는데. 좀 잘해줬다고 그걸 잠깐 잊었네. 잊은 내가 병신이지. 개새끼라고 욕할 것도 아니야. 내가 개새끼지. 개새끼 지능이니까 너 같은 밑바닥 새끼 믿고 여기까지 온 거지.”
“개새끼인 거 알면 알아서 아가리 조절해.”
낮게 말하는 목소리가 그르렁댔다. 지훈이 입을 닫았다. 허공에 떴다가 아래로 내려가는 승혁의 손이 공허해 보였다.
“그래. 내가······ 내가 다 했다고 치자. 그렇게 쳐보자. 네가 원하는 대로.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
그게?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고? 차라리 내가 죽였다고,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말하는 게 이보다 더 비참하진 않을 거다. 고작 그런 걸로 이 난리를 피우냐는 말이 지훈을 더 절망감에 빠지게 했다.
“사람이 죽었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침을 삼키고 말을 멈춰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 점점 물기가 차오르는 것까지.
“너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씨발놈아······”
“어차피 죽을 놈이었어.”
“어차피 죽을 놈이면, 너도 언젠가는 뒤질 놈인데 죽여도 괜찮겠네? 어?”
“······”
“작년에 복직했을 때 기억나지.”
갑자기 과거를 회상하는 게 뜬금없었다. 박승혁이 눈썹을 얕게 으쓱였다.
“작년에 복직했을 때, 좆 빠지게 힘들어서 대기발령 상태까지 갔는데 왜 아무것도 안 했어. 너라면 할 수 있었잖아. 왜 아무것도 안 했는데.”
“······”
“다 네가 만든 일이니까 나설 리가 없지. 나를 그렇게 만들려고 했는데 뭐하러. 오히려 좋아했겠지. 아무 데도 기댈 곳 없게 만들어서 네 옆에 붙어있게 하려고.”
“하.”
왜 뜬금없이 그때를 말하나 했다. 박승혁이 헛웃음을 쳤다.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냐?”
“······”
“그리고 뭐, 내가 나서? 언제는 나한테 돈도 안 받겠다면서? 돈만 안 받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줘야 하나? 꼭 없는 새끼들이 자존심 세우려고 안 받겠다고 지랄······ 내 영업소에서 받을 거 다 받아 처먹은 주제에 깨끗한 척하기는.”
지훈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주먹 쥔 손마디가 노래졌다.
“받아 처먹어도 누구처럼 약 처먹여서 떡 치진 않아.”
“그 약 처먹이고 한 놈이랑 연애 놀음하는 건 뭔데. 멘탈이 센 거냐? 아니면 금방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한 거야?”
“······”
“멍청한 건 맞지. 그러니까 뒤통수친 새끼 못 잊어서 이 지랄을 하는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박승혁이 고개를 젖혔다. 엉뚱한 곳을 보며 입안을 굴리다 중얼거렸다.
“지겹다······ 가좆같은 놈들 떨어뜨려 놨더니 그 별것도 아닌 새끼 신경 쓴다고 씨발······”
“그래서 죽였냐? 내가 잠깐 만났다고······ 그렇다고 죽일 건 없었잖아. 네 심기 안 건드리려고 네가 원하는 대로 했어. 복직했을 때 말도 안 섞고, 인사이동 한 이후로 한 번도 먼저 연락하거나 만난 적 없어.”
“정말 내 심기 안 건드리려고 한 거냐? 네가 원해서 그런 거 아니고?”
고개를 바로 하고 쳐다보는 눈이 차가웠다.
“난 그렇게 하라고 한마디도 안 했어. 네가 행동해놓고 내 탓 하지 마. 너도 잘해줬더니 내 뒤통수친 새끼, 지가 뭐라고 눈치 보고 빌빌대는 게 같잖았잖아. 가증스러워서 그랬던 거잖아. 그리고 뭐? 내가 원하는 대로? 나 참, 시발. 어이가 없어서·····”
뒷덜미를 긁는 내내 어이없어 터진 웃음이 이어졌다. 속이 꿰뚫리는 것처럼 쓰렸다.
“난 분명히 얘기했어. 그 새끼는 내 소관 벗어난 지 오래라고. 애먼 사람 의심하지 말라고. 무슨 사달······”
“그래. 무슨 사달이 나면 백가연이 한 짓일 거라고 했었지.”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존재 때문에 잠깐 머뭇대는 사이, 지훈이 뒷말을 이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싫은 이름이지만, 이렇게 지훈의 입에 올려지는 건 더 싫다. 정말 오랜만에 연인에게 듣는 이름이 당사자를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이를 악문 턱에 근육이 불거졌다. 그것도 모르고 지훈은 계속 이어 말했다.
“그럼 왜 내가 여기 갇힌 건데. 왜 김명준 시켜서 나를 여기에 처넣고, 이지균은 나한테 전화해서 왜 좆같은 소리 늘어놓는 거고, 준영이는 왜 죽은 건데.”
이지균? 박승혁의 한쪽 볼이 잠시 구겨졌다 펴졌다. 피로가 누적된 몸에 니코틴과 양주를 다량으로 부어 온전치 않은 머리가 쉬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보다 다른 게 더 거슬렸다.
‘이젠 막내라고도 안 하네. 씹새끼.’
누가 더 상처 주는 말을 하는지 겨뤄보는 것처럼 오가는 날 선 대화는 작은 것도 신경이 거슬리게 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것도 거슬렸다. 막내라고 지칭하지도 않고, 그만 친근하게 성을 떼고 언급한 것조차 질투심이 일었다. 자잘한 것까지 거슬리는 자신이 치가 떨리도록 짜증 났다.
박승혁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핸드폰을 힐긋거렸다. 얼마 전부터 신경 쓰였던 것. 지훈은 그때도 준영과 연락했던 걸까. 아니면 이지균? 그렇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뭐가 당당해서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니 마니 지껄이는 걸까.
그래도 너라서, 너기 때문에 별실에 감금시키라는 지시에 ‘핸드폰도 압수할까요’라는 명준의 물음에도 고민 끝에 됐다고 했는데.
최대한 트러블 없이, 몸도 마음도 상하는 일은 없도록 모시라고 지시했다. 내가 그런 마음이었다는 걸 너는 알기나 할까.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 놈. 자기가 처한 상황이 제일 처연하다고 생각하는 놈.
괜히 생각해서 그 딱따구리 같은 새끼 뒤진 소식이나 듣게 하고. 내가 이런 실수하는 놈도 아닌데. 왜 내가 너 때문에.
“누가 알려줬어.”
“왜. 또 죽여버리게?”
“······”
“긴말 안 해. 지금 당장 현장에 가봐야 해. 비켜.”
“현장? 네가 뭔데. 너 이제 형사 아니야. 착각하지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티······ 알려준 사람한테도 얘기해놨어. 지금 바로 간다고. 가서 나도 현장 봐야 납득할 수 있을 거 같아. 지금은 아니라도 얘기해놨으니 들어갈 수 있어.”
“뭘 봐. 봐도 뭐가 나올 거 같아? 헛수고하지 마.”
“왜 그렇게 확신하는데. 봐도 뭐가 안 나올 거라고.”
“······”
“알고 있는 거잖아. 준영이가 자살한 거. 그거까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하필 똑똑하기까지 해서 왜 이 지랄일까. 아니면 평정심을 잃어 필요 이상으로 말하는 내 탓일까. 아무튼 저 나불대는 입이 평소엔 좋았어도 지금은 닥치게 하고 싶다. 박승혁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스쳤다. 지훈이 더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러면서 뭐? 애먼 사람 의심하지 마? 내 소관이 아니야? 뚫린 입이라고 어딜 그렇게 뻔뻔하게 지껄여. 씨발 새끼······”
다시금 말끝이 떨렸다. 감정이 올라온 얼굴이 흐트러져 보였다. 분노에 찬 눈에 독기가 서리며 눈가가 붉어졌다.
“널 믿은 내가 병신 새끼지. 내가, 내가 너를 왜 믿어서······ 뭐가 좋아서 네가 주는 거 의심하지도 않고 다 받았을까. 나 때문에 주변 사람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틀어잡는 손짓에 지훈의 몸이 휘청였다. 이젠 향수처럼 풍겨오던 담배 냄새와 양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몸이 위압적이었다. 노려보는 날 것의 얼굴에 움찔하는 자신이 처량했다.
나름 경찰대를 졸업하고 임용된 강력팀 형사였는데, 지금의 자신은 형사도, 뭣도 아니었다. 의심 없이 조폭한테 마음 주고 배신당해놓고, 고작 이런 거에 겁을 느끼는 초라한 사내에 불과했다. 그게 상처받지 않으려고 굳힌 마음을 허물었다.
“너는 애초부터 나 믿은 적 없잖아. 믿은 적도 없으면서 믿었다고 포장하지 마.
안 믿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어도 알아서 그 새끼 밀어낸 거 아니야? 교통과에서도 똑같이 행동하고. 그거 다 나보고 보란 듯이 한 거 아니냐고. 알아서 몸 사릴 테니까 타깃으로 삼지 말라고. 그게 나를 못 믿는 게 아니라면 뭔데. 뭐, 마음의 상처라도 받아서 낯 가리는 거냐? 중학생 애새끼도 아니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벌려진 입술이 다물렸다. 꼭 다문 아랫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눈이 눈가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 눈물이 차오른 눈이 독기를 품고 쏘아봤다.
스탠드만 켜놓은 별실이 어두워서인지, 코앞에서 내려다봐서인지, 물기 서린 눈이 자신을 올려다 쏘아봐서인지, 분명 저보다 어린 건 맞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더 앳되어 보였다.
사춘기가 늦게 온 청년. 그가 처음에 지훈을 보고 느꼈던 인상이었다. 가족과 연을 끊고 고생한 이후론 늦게 온 사춘기에 방황하고 갈피를 못 잡는 듯한 묘한 느낌이 되었다. 그 묘한 느낌에 성욕이 들었다. 지훈에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자신이었다. 그의 온몸이 저에겐 성감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신이 온전치 않고 코앞의 연인이 짜증 나고 숨 막히는 이 상황에서도 그가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식식대면서 분노하는 와중에 자신이 한 말에 상처받아 보이는 처연한 눈빛에 중심부가 저렸다. 입술을 씹어 가라앉혔다.
지훈을 보면 늘 모순적인 감정이 일었다. 좋으면서 싫은 감정. 짜증 나고 화가 나는데, 당장 입에 재갈을 물리고 결박한 다음 던져두고 나가버리고 싶은데, 부풀도록 씹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을 감기고 키스하며 애무하고 싶었다.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혀 반항하는 걸 누르고 몸을 취하고 싶다.
지훈이 아파하지 않게 부드럽게 하고 싶으면서 강제로 누르고 함부로 대하고 싶다. 그걸 생각하면 일하는 와중에도 아래가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안 된다. 더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하고서 몰아치는 후회를 겪어봤기 때문에. 그때의 후폭풍은 그를 동굴로 들어가게 할 정도로 거셌다. 그 순간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일평생 자신이 내린 결정에 그 정도로 후회해본 적도 없는데. 섹스는 육욕 배설이 목적이라 그보다 더 거칠게 한 적도 있건만. 이지훈이 뭐라고.
저릿한 감각을 누르며 분노와 처연함이 뒤섞인 얼굴에 대고 말했다.
“내가 안 했다고 해도 안 믿을 거잖아.”
“······준영이는 자살한 게 아니야. 자살 당한 거지. 정말 자살했으면 애초에 네가 이렇게 말하지도 않아. 뭘 하기도 전에 혼자 자살해버렸다고 하지. 누가 자살하라고 협박했거나, 죽여놓고 자살로 꾸민 거야. 경찰이 봐도 모를 정도로.”
지훈이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올라왔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네 부하라면 모를까.”
눈에 눈물 달고 망울진 목소리로 잘도 말하는군. 짜증 나게. 박승혁이 입술을 실룩였다.
“네가 안 했으면, 누가 했는데. 누가 그 정도로 할 수 있는데. 친필로 유서까지 쓰게 하면서.”
“······”
“백가연?”
또 듣기 싫은 년 입에 올리기는.
“그년이 했다면? 믿을 거냐? 믿으려는 노력은 할 거야?”
“나한테 책임 전가하지 마. 네가 한 행동을 생각해. 믿는 게 병신이지. 이 개새끼야. 개좆같은 씨발 새끼.”
“말조심해.”
“말조심? 무슨 말조심을 해야 하는데. 너는 하고 싶은 대로 아가리 놀려도 나는 하지 말라? 무슨 좆같은 법이야.”
“명심해. 내가 지금 너 봐주고 있어도······”
“풉.”
지훈이 고개를 숙이곤 낮게 키득거렸다. 조소 가득한 웃음이다. 질끈 감은 눈 사이로 아슬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방울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당연히 박승혁은 눈치채지 못했다.
“봐줘서 사람 속여서 여기 처넣고 감금시켰냐?”
“······”
“내가 줄을 잘못 탔어. 잘 보고 탔어야 했는데. ······백가연한테 붙었어야 했는데.”
푹 숙였던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굳은 얼굴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럼 가족이랑 연 끊을 필요도 없었고,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 건데. 남자보다 여자 끼고 사는 게 백 배는 나았을 건데. 조폭 같은 밑바닥 새끼한테 박히면서 사는 것보다 그게 더 나았-”
퍽. 얼굴이 잡힌 채로 순식간에 뒤로 끌려가 벽에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로 벽에 부딪힌 뒤통수가 얼얼해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말조심하라고 했지.”
“······”
“그래서, 후회해봤자 어쩔 건데. 넌 지금 감금당한 상태고, 불러도 달려올 사람 없어.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내 지시 없이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내가 풀어줄 때까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봐봐, 지금 내 손 하나 못 풀잖아. 그런 주제에 입만 살아서, 씨발······”
머리가 어지러웠다. 뒤통수가 너무 아파서인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인지, 코앞의 남자가 턱이 아프도록 양 볼을 틀어잡아서인지, 말로 속을 쑤셔대서인지 모르겠다. 겨우 한 번 털어냈던 게 무색하게 눈 부근이 뜨거워졌다.
“너 아무것도 못 해. 사망 현장에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못 보고, 못 할 거야. 그놈 조문조차도.”
찡그렸던 눈이 점차 커졌다.
“발인까지 끝난 다음에 내보낼 거야. 네가 그 새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다 지나간 뒤에 납골당에나 가서 얼굴 한 번 비추는 게 고작이야. 아, 뼛가루도 놔둘 건지는 고민해 봐야지. 너 하는 거 봐서.”
“······”
“왜, 화나? 아무것도 못 하게 하니까?”
손톱이 살을 뚫을 것처럼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참을 틈도 없이 뜨거운 눈에 눈물이 고이고, 눈물이 눈물을 밀어내 아래로 흘렀다.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는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볼을 타고, 턱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보는데 심장이 저리고 아팠다. 그래도 티 내지 않았다. 이젠 그 감각에도 내성이 생겨버렸다. 내성이 생길 정도로, 이미 그를 보며 수백 번이고 느꼈던 감각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네가 지금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무슨 짓거리를 해도 안 풀어줄 거야.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할······”
박승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더니, 갑자기 지훈의 양 볼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지훈이 고통에 입을 벌리자 다른 손이 입안으로 침범해 혀를 붙잡았다. 찰나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허억······”
심장 소리가 쿵쾅거리며 목울대를 넘어 관자놀이까지 울렸다. 박승혁이 입을 벌려 숨을 몰아쉬었다. 급작스레 숨이 막힌 듯한 느낌이었다.
“컥.”
커헉, 컥. 박승혁에 의해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담은 채로 웃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울던 눈이 일그러져 있었다.
“벼힌 해히(병신 새끼)······”
박승혁의 머리에 두 글자가 떠올랐다. 약점. 분명 모든 상황이 지훈보다 우위인데, 방금 보인 행동 하나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그에게 약점을 보여버렸다.
이지훈이 혀를 깨물려고 한 그 행동 하나로.
혀를 깨무는 것만으로는 자살할 수 없다. 그게 미디어가 물들인 잘못된 상식이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다. 다만 조금 전 상황에선 순간 그것까지 떠올리기엔 무리였다. 이지훈이 혀를 깨물려고 했다, 가 아니라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이성을 잡는 건 불가능했다.
두 손을 떨고 있는 건 양 볼이 잡히고 입 안에 손가락을 담은 상태인 지훈에게도 느껴졌다. 박승혁의 당황한 표정까지, 한순간에 서로의 위치가 바뀐 상황에 지훈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컥컥거리며 웃었다. 기괴한 웃음소리와 얼굴이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당장이라도 이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불과 몇 개월 전에 전희 없이 성기를 꽂아 넣고 목을 졸랐었는데. 심지어는 칼로 배를 쑤셨었는데 왜.
이지훈이 자살하려고 했다.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숨쉬기가 힘들었다. 숨이 막힐 것처럼 심장이 쿵쾅대고 튀어 오르는 것 같아서 입을 벌려 몰아쉬었다.
설사 정말 혀를 깨물었다고 해도, 죽는 건 아니다. 그래도 박승혁은 정말 그가 자살한 것 같은 착각이 들았다. 주마등처럼 지훈의 혀가 잘리고, 눈앞에서 멎지 않는 피를 흘리며 숨이 멎은 모습까지 그려졌다.
병실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열흘 간 누워 있었을 때 느꼈던 지독한 감정.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 그때보다 더 끔찍한 감정이 전율처럼 온몸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저린 정도가 아니라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감각이었다.
멱살을 틀어쥐고 그대로 침대 위로 내팽개쳤다. 엎드린 몸 위에 올라타 눌렀다. 그래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두려움은 없었다.
두려움을 느낄 리가 없지. 내가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두려움은커녕, 킥킥대는 소리만이 들렸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입안에 욱여넣어도, 욱여넣고 뒷덜미를 잡아 눌러도 웃음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기시감이 드는 상황. 그때와 비슷하지만, 결코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 내가 너를 더 좋아해서 생겨버린 상황. 턱이 불거지도록 이를 악물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이미 흐트러져있던 넥타이가 한 번에 쉽게 풀렸다.
넥타이로 손목을 감아 묶는 동안 지훈은 계속해서 웃었다. 정신 나간 웃음소리엔 두려움이 없었다. 잃을 것 없는 자가 내는 소리였다. 힘 조절을 못 한 손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손목을 감아 묶고 나서야 웃음소리가 멎었다.
손목을 묶은 박승혁이 지훈의 사타구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훈은 다리에 손이 닿는 감촉을 느끼고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다. 그때처럼.’
아무리 나를 어쩌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 외엔 얼마든지 ‘무슨 짓’을 할 수 있다. 곧 일어날 일에 두 눈을 감았다.
넓은 손이 다리를 잡고 폈다. 지훈은 그가 하는 대로 따랐다. 반항해봤자 소용없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자극하느니, 차라리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승혁은 다리를 잡고 펴주었고, 엎드려 있던 지훈을 옆으로 눕히더니 침대에서 내려갔다.
등 뒤를 볼 수 없는 지훈은 이불에 옆얼굴을 닿은 채로 헐떡거렸다. 눈동자를 굴려 최대한 옆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 초간 이어진 침묵 끝에 발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지친 듯, 지익 하고 끌리는 발소리가 불규칙했다. 힘없이 내딛는 소리에 지훈은 자신이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분명 서로 물어뜯었는데, 소리만 들으면 자기만 상처 준 것 같아 억울하면서도 찝찝했다.
곧이어 덜컥,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뒤에 문이 열리고, 닫혔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까지 이어지는 사이에 잠깐 발걸음을 멈춘 것은 바닥에 던진 핸드폰을 줍는 소리였을 거다.
결국엔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 외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아하면서도 내심 안심이 되어 긴장이 풀렸다. 연달아 들은 소식에 날카롭게 이어진 대화, 내내 긴장해 있던 몸이 풀어지며 빠르게 졸음이 쏟아졌다. 마치 지금까지 겨우 버티고 있었던 것처럼.
손목에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에도 지훈은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내내 긴장이 흐르던 별실이 그제야 차분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