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콜록.”
지훈이 작게 기침했다. 꽃샘추위가 도래한 밤공기는 한 번의 기침도 희미한 입김으로 만들었다. 차가운 공기를 더 오래, 깊이 들이마셨던 지훈은 박승혁의 끝맺지 못한 우려대로 감기에 걸렸다. 다행히 목이 칼칼하고 기침 정도만 나는 가벼운 목감기였다. 직장 동료들도 꽃샘추위라 일교차가 커서 그렇다고 말하며 넘겼다.
목은 금방 나았으나 기침은 쉬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삼 일째 기침이었다.
지훈은 하품하며 외투 옷깃을 세웠다. 경찰 동계 점퍼였다. 어두운 회색 점퍼 밑엔 하얀색 교통과 정복이 넥타이까지 꼭 매어진 모습으로 입혀져 있었다.
아무리 일교차가 커서 감기 걸리기 딱 좋은 계절이라 해도, 며칠째 감기 달고 살면 직장에서 눈에 뜨인다. 괜히 팀에 부담을 주거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정복이라도 잘 갖춰 입어야 ‘팀에 잘 섞이려는’ 노력을 한다고 보이고, 팀장이 이젠 정복 좀 입고 다니라고 말한 것도 있어 어제부터 갖춰 입고 있었다.
이틀 전엔 박승혁의 오피스텔에서 출근해서 정복을 챙겨 입고 나올 수 없었다. 실망 어린 표정의 팀장을 위해서라도 이젠 매일 입기로 했다. 오늘처럼 외근 나오는 날까지 말이다. 팀장은 외근 나가는 날엔 괜찮다고 했어도 나름 흐뭇한 얼굴이었다.
여느 때처럼 외근 나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던 지훈은 기침을 한 번 더 했다. 작은 입김이 금방 나타났다 사라졌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말도 없이 오피스텔로 갔지.’
누가 보면 거기서 사는 줄 알겠다. 내 집은 엄연히 따로 있는데. 능구렁이처럼 당연한 태도에 자연스럽게 넘어갔었다. 자다 깨서 보니 사방은 조용하고, 혼자 청승맞게 머리를 감싸고 앉아있으니 여기가 내 집인지, 오피스텔인지 확인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외관을 보고 ‘혼자 청승맞게’가 ‘혼자 영화 찍고 앉아있는’으로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차에서 진하게 정사를 치르고 오피스텔에선 미리 준비된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얌전히 씻고 잤다. 차 안에서 잠시 감돌았던 어색한 기류는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순간 사라졌다. 예상보다 늦게 들어가 음식이 식었다는 것만 아쉬웠다. 그래서 딱히 그 순간이 맴돌아 신경 쓰이진 않았다. 적어도 지훈 자신은 그랬다.
‘박승혁은 지금까지 신경 쓰고 있나?’
삼 일째 연락 한번 없는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보기보다 속 좁은 놈, 싶으면서도 별거 아닌데 예민하게 반응한 제 탓도 있어 내심 미안했다.
어머니한테서 온 저주가 담긴 메시지. 그 별것도 아닌 거 때문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게 우스웠다.
박승혁에게 거기까지 알리지 않은 건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애도 아니고, 그것까지 일일이 말하는 게 스스로 못나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다.
그리고 박승혁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자신은 가족으로서 같이 살던 세월이라도 있지, 그런 정조차 없는 그에겐 지훈의 가족이 얼마나 저열한 기생충처럼 보일지 알만하다.
박승혁 성격에 지금까지도 그런 메시지를 보낸다는 걸 알면 어머니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거나 죽으니만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지훈은 저를 건드리지 않는 것만을 원하지, 그런 꼴까지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차에서의 정사가 끝난 직후 왔던 연락은 일 관련 메시지였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나왔어도, 몰래 보려던 손을 쳐버린 걸 후회하진 않았다. 남의 핸드폰 몰래 보는 걸 놔두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김준영 형사가 보낸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전에 근무하던 강력팀 막내 형사로, 지훈이 친동생처럼 아꼈던 김 형사. 물론 사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강력팀에서 근무하던 때 맡았던 사건으로, 불구속으로 입건해 조사하던 중 용의자가 내연녀와 도주해버려 수사가 중단됐던 적이 있었다. 원래 수사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고, 수사에도 협조적이었는데 내연녀가 도피하도록 바람을 넣은 게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도피한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이 내연녀 집 앞이었고, 내연녀도 홀연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용의자가 사라져버려 수사는 끝맺지 못한 채로 허공에 떠버렸고, 수배 조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용의자를 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지훈이 현재 근무하고 있는 구역에서.
이젠 지명수배범이 된 용의자 사진을 보내어 ‘선배님이 현재 근무하고 계신 구역에서 목격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업무에 참고하시고 조심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현재 지훈이 속한 서의 강력팀에도 연락이 갔을 것이지만 해당 사건을 같이 담당했던 강력팀‘이었던’ 만큼, 연락해준 것이리라.
혹여나 보게 된다면 바로 해당 서 강력팀에 알려주면 된다는 말까지, 지극히 일 적인 연락인데 맨 끝에 ‘요즘 몸은 좀 어떠신가요? 건강 챙기시고, 더는 아프지 마십시오.’라고 끝맺어 미련 남은 전 여친처럼 보낸 게 요지였다. 사실 마지막 말 보내고 싶어서 연락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가 보면 찐하게 사귀다 헤어진 줄 알겠다.
답은 평범하게 ‘알겠다. 보게 된다면 연락할게’라고만 보냈다. 아무리 일적인 연락이었다 해도, 마지막 문장도 그렇고 막내 형사가 보냈다는 걸 알았다면 박승혁은 그냥 넘기지 않았을 거다. 역시 그렇게 행동한 게 후회되진 않았다.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지훈이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늘 외근은 간단한 조사 차 나온 거라 막내와 둘이서만 나왔다. 예정보다 조사가 일찍 끝나 서로 복귀하기 전 간단한 휴식을 가진 참이었다.
따뜻한 캔 커피를 사 오겠다며 심부름을 자처한 막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안 오고 있었다. 담배도 사 올까요, 라는 질문에 됐다는 말까지 했는데. 시간이 길어지니 담배가 고파 주머니 속 담뱃갑을 쥐었다 놓았다.
사고 현장을 앞에 두고 인도에서 발을 까딱거리며 편의점 방향을 몇 번이나 쳐다봤을까, 드디어 멀리서 막내가 보였다. 헉헉거리며 뛰어오는 모습이었다.
저도 늦은 걸 아는지 지훈과 눈을 마주치자 더 속도를 냈다. 두 팔을 휘저으며 어설프게 뛰어오는 모습은 갖춰 입은 정복과 어울리지 않았다. 금방까지 막내 형사를 떠올렸던 지훈은 누구랑 비슷한 느낌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준영은 사복 경찰이기라도 했지, 정복을 저렇게 갖춰 입고 어설프게 뛰어오니 더 보기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허둥지둥 뛰어오다 결국 마주 가던 행인과 부딪힐 뻔했다. 직전에 몸을 돌린 막내가 행인의 뒤통수에 대고 연거푸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보다 못한 지훈이 소리쳤다.
“됐으니까 천천히 와!”
“아, 네. 허억.”
숨을 고른 막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좀 기다린 뒤에 본 비닐봉지 안에는 캔 커피 말고도 따뜻한 꿀물 음료수와 빵이 들어있었다.
캔 커피만 사자니, 지훈이 기침하던 게 떠올라 고민하며 골랐는데 자기 바로 앞 손님과 아르바이트생 간에 다툼이 일어 중재하느라 더 늦었다는 거였다. 다행히 경찰이 말리니 쉽게 사그라들었다는 내용까지 들은 지훈이 말했다.
“그래도 운 좋네. 경찰이 말린다고 제 발 저려서 뛰쳐나가지 않아서.”
내심 선배 몸 생각해서 꿀물까지 사 온 게 기특해서 풀어진 얼굴이었다.
“하하, 작년에 여기 강력팀에서 있었던 일 말씀이시죠? 손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과범이라 제 발 저려서 도망쳤던 사건. 그때 서가 좀 시끄러웠답니다.”
“김 순경이 오기 전이지?”
“네. 저 임용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근데 자세히 알고 있네.”
“선배님들이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지훈은 꿀물 음료수를 집으려다 출출한 배를 느끼곤 빵을 꺼냈다. 서는 달라도 같은 강력팀끼리는 소식도 빨리 퍼졌다.
“그때 제 발 저려서 뛰쳐나간 사람 추적하다가, 사고 냈던 사람이 내 동기야. 대학 때부터 유명했어.”
“아- 그분도 경찰대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동갑이셨구나······ 저 오기 전까지는 서에서 그, 좀 튄다고 들었는데, 요새는 조용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뭐,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이도 경력도 직급도 어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막내가 멋쩍게 뒷머리를 훑었다. 지훈도 남 얘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별다른 대꾸 없이 빵 봉지를 뜯었다.
가벼운 농담조로 꺼낸 말이었는데 서에서 꽤 시끄러웠던 일인지, 막내가 임용 전에 있었던 일을 꽤 알고 있는 게 의외였다.
애초에 자신도 그 동기였다면 그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경찰대 시절에도 그 동기가 싫었다기보다는 상황 안 보고 지나치게 할 말 다 하는 성격을 신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사람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운이 나빠 결과가 그렇게 됐던 거다, 생각하며 매끈한 외관의 빵을 쳐다봤다.
운이 나빠서······
일반 손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과범이었다.
제 발 저려서 도망간 놈.
막 뜯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으려던 지훈이 멈칫했다. 막내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빵 봉지를 뜯더니 안 먹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게 이상했다.
“빵에 뭐 묻었습니까? 그럼 새 걸로······”
“아니, 아니.”
지훈은 뜯은 빵 봉지를 여미고 막내의 비닐봉지 안에 도로 넣었다. 막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화장실이 급해서. 먼저 먹고 서로 돌아가. 화장실 들렀다 바로 갈게.”
“어, 그럼 차는······”
“아. 차는-”
“그냥 차에서 간식 먹으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쇼.”
“그래, 그래.”
지훈이 막내의 팔을 몇 번 치고 뒤를 돌았다. 발걸음을 떼려다 다시 뒤를 돌아 비닐봉지 안에서 꿀물 음료수를 꺼냈다.
“갔다 오는 동안 식겠다. 가는 길에 먹을게. 고맙다.”
“아, 네네. 편히 다녀오십쇼.”
뒤를 돌면서 뛰어가는 뒤통수에 대고 막내가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폈을 땐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 * *
박승혁이 명준을 흘겨봤다.
“정말?”
“네.”
긍정적인 보고인데 무표정하게 사무실 책상만 두드리는 손짓에 의아했던 명준이 이어 말했다. 계약 운운하던 관계는 끝났어도 미행은 계속하고 있고, 지훈도 알고 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점심때 철성이한테 물어봤는데, 어제보다 몸이 훨씬 좋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기침도 적게 하셨다고 하고요. 오늘 출근하면서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하나 사서 들어가셨다고 하던데요.”
“······아침부터 빈속에 커피 마셔도 되나?”
명준이 학을 뗐다.
“참, 형님도. 술도 아닌데요. 경위님이 줄이려면 술보다 담배죠. 그리고 재활치료 끝난 지가 언젠데 걱정도 너무······”
웃으며 나불대는 그를 박승혁이 흘겨봤다.
명준이 입을 다물었다. 뭐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대체 어떤 내용의 보고를 바란 걸까. 이게 형님이 가장 바라시던 보고가 아니었나? 며칠째 골골대는 애인의 몸 상태가 괜찮아진 것 같다는 내용보다 더 이상적인 보고가 어딨겠는가.
아 설마······ 명준이 슬쩍 웃곤 말했다.
“아니면 만들어볼까요?”
“뭘.”
“이 경위님 조금만 더 아프게, 악!”
두꺼운 도자기 재떨이가 명준의 배를 맞고 떨어졌다. 둔탁하게 바닥에서 데구루루 구르는 재떨이를 명준이 얼른 집어 들어 박승혁 앞에 내려놓았다. 깐족대긴 했다. 지훈을 만나기 전까진 늘 완벽하다고 여겨졌던 형님의 빈틈을 알게 되어 은근히 재밌는데, 이것도 적당히 해야 했다. 아예 안 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새끼가, 쯧.”
명준은 일부러 우는 소리를 내며 배를 문질렀다. 재떨이는 하루에 두 번 청소한다. 박승혁이 퇴근한 후 한 번, 그리고 점심시간 중에 한 번. 지금은 점심시간에서 제법 지난 시각이다. 즉 좀 전에 깨끗이 씻겨진 상태였고, 박승혁도 그걸 알고 던졌다.
아직 점심 먹고 한 대도 안 폈다. 그 말은 점심 식사 이후 담배도 안 피우고 지훈에 관한 얘기로 근무 시간을 보내고 있단 뜻이다.
이틀 전, 같은 침대에서 일어날 때부터 지훈은 잔기침을 계속했다.
“오늘 퇴근하고 병원 가보지?”
“이런 거로 가면 쪽팔려.”
신경 쓰여 건넨 말을 툭 받아치며 타이레놀만 먹고 출근했었다. 저가 보기에도 심한 건 아니고, 지훈이 이 정도로 출근하지 않을 리가 없는 건 알지만, 애인이 아프다는데 신경 안 쓰일 사람이 어딨겠는가.
문제는 자신이다. 지훈의 몸 상태에 대해서만 신경 쓰여야 정상인데, 자꾸만 그 핸드폰이 눈에 밟혔다. 누가 어떤 연락을 보냈길래 그렇게 단말마의 한숨을 내쉬는지.
아니, 그 반응이 밟히는 것보다는 자신이 궁금해하는 걸 알면서도 왜 말해주지 않느냐는 거다. 당당하면 아무렇지 않게 이러저러한 내용이라 놀랐다, 혹은 당황했다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고작 이런 거로 며칠 동안 신경 쓰고 그런 사람도 아닌데. 단지 상대가 이지훈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러고 있다니.
그거 하나면 모를까, 정사가 막 끝난 뒤에 연달아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슬쩍 훔쳐보려다 매몰차게 손만 맞았다. 못된 짓 하다 걸려 혼난 개도 아니고.
그 순간엔 어색했어도 오피스텔에 들어가서는 평소처럼 대화하고, 미리 준비된 저녁을 먹고, 씻고 같은 침대에서 잤다. 뒤에서 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대어도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별일 아니라 여기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훈이 출근하고 나서 혼자가 되니 자꾸만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거다. 지훈의 몸 상태도 상태고.
도자기 재떨이를 괜히 소매로 닦고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저의 큰형님이자 상사의 얼굴을 살핀 명준이 ‘또 왜’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표정은 그때와 비슷하다. 올 초에 인사 이동한 곳에서 지훈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하라 해서 철성에게 보고받은 대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알아본 대로 -그 서에도 박승혁에게 대접받는 치들이 있다- ‘잘 적응하며 지내고 계십니다’라고 말했을 때의 표정. 좋긴 좋은데 어딘가 서운하고 아쉬운 표정.
처음엔 빈틈없고 부족함 하나 없던 큰형님의 색다른 면모를 봐서 좋았는데, 이젠 점점 지겹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좀 많이 들고 있었다.
‘내가 연애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젊을 적 여자들과 연애깨나 해 봤던 명준은 스스로 돌아보았다. 그런 그도 최근 몇 년 사이엔 참한 여자 한 명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름 깨끗하게 살고 있었다.
‘맞다. 형님께 참한 여자 소개해 달라고 말······’
“핸드폰.”
잡생각에 빠져들던 명준이 아닌 척 눈을 크게 떴다.
“네?”
“······아니다.”
“핸드폰이요? 새로 바꾸시려고요?”
“아니야.”
“이 경위님 핸드폰 바꿔드리려고요? 바꿔주신 지 얼마 안 됐······”
“됐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박승혁이 턱을 괴던 손을 떼어 휘저었다. 지훈 모르게 핸드폰을 한번 가져와 보라 하고 싶었다. 머릿속에만 돌던 생각이 저도 모르게 한 단어로 툭 나와버렸다.
지훈의 핸드폰을 뒤진 적은 지금까지 딱 한 번이었다. 지훈이 자신의 산하 클럽에 몰래 숨어들어와 스스로 자처해서 찔렸을 때였다. 당시 지훈을 수술실에 들여보낸 다음 명준에게 시켜 삭제한 문자나 카톡 내역을 전부 복구시키도록 해 내막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 상황이다. 그때는 백가연과 얽혀있던 데다 지훈도 의식불명이었던 특수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지훈에게 핸드폰을 새로 사준 이후로는 몰래 엿볼 이유도, 마음도 애초에 들지 않았다. 핸드폰을 일일이 엿보고 확인할 정도로 자신이 한가한 직업도 아니고, 지훈 자체도 똑 부러진 성격이거니와 그가 허튼 마음을 먹는다면 바로 보고할 수족이 몇이나 있다.
딱히 명령까지 따로 내릴 정도로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지금을 제외하곤.
사실 ‘핸드폰을 몰래 가져와라.’라는 명은 박승혁의 직업과 평소 행실을 기준으론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명준을 비롯해 부하들에게 숱하게 위법적인 지시를 내렸었고, 저도 그런 행위를 하며 밑바닥에서 구르며 자랐다.
하지만 지훈 한정으로는 그런 걸 지시한다는 것 자체가 쪽팔린 짓을 하는 것 같았다. 형님이자 대부업체 이사로서, 합법 대부업체의 가면을 쓴 조폭 조직의 수장으로서 엄청나게 속 좁고 없어 보이는 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명준에게 애인 핸드폰 몰래 훔쳐보는 찌질한 남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소리다.
결국 이런 마음도 마음이고, 지훈에게 아무런 서운함도 없는 건 아니라 지금까지 연락 한번 안 했다. 그냥 몸 상태에 대해서만 이렇게 따로 보고받고 있었다.
명준이 물었다.
“오늘은 경위님 뵈러 몇 시쯤 나가십니까?”
“오늘 영업소 점검하는 날이다.”
박승혁이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명준은 바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 앞에 댔다. 담뱃불을 붙인 그가 첫 연기를 내뿜으며 질책 조로 말했다.
“기억 안 하지.”
“아······ 원래는 점검하러 나가시는 날인데, 오늘은 같이 식사하신다고 식당 예약하라고 하셔서······”
아. 담배 든 손이 허공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언제 예약하라고 했지?”
“사흘 전입니다.”
그 일 있기 전이다. 기억조차 못 했다. 생각보다 그 일이 머리를 꽤 어지럽게 했던 모양이다.
내일 중요한 거래처와 잡힌 저녁 식사를 영업소 중 한 곳에서 하기로 약속했다. 대접하러 가는 김에 영업소 점검도 같이하려고 해 오늘 있을 점검을 내일로 미뤘다. 어차피 내일은 지훈을 만나지 못하니까.
박승혁이 노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했다. 이 정도로 정신 놓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예약 취소할까요?”
“아니, 놔둬. 몇 시로 예약했지?”
“오후 여덟 시입니다.”
입술을 훑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일모레가 지훈의 비번 날이라 아쉬움에 식당을 예약하라고 한 것까지, 기억난다. 식당 전체를 예약하기 때문에 예약 시간은 보통 저녁 시간보다 뒤에 잡는다.
오늘 안 가면 내일은 못 본다. 내일은 분명 식사가 늦게, 아주 늦게 끝날 거다. 내일모레도 지훈은 쉬어도 자신은 출근한다.
하루 정도 자리를 비울 수는 있지만 중요한 거래처를 대접하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으면 영 체면이 서지 않는다. 겉은 식사라도 속은 값비싼 술이 오가는 비즈니스 자리라는 걸 모르는 부하가 없는데, 저들이 모시는 형님이 약하다는 이미지만 심어줄 수 있었다.
내일 못 보는데 그렇다고 내일모레 온종일 같이 붙어있을 수도 없다. 갑자기 아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명준이 눈치를 봤다.
“오늘 일찍 정리하시죠.”
“됐다. 일찍 가면 그 성격에 또 지랄하지.”
“그래도 몸도 많이 좋아지셨는데, 데리러 가시죠. 며칠째 계속 대중교통으로 출근 중이시던데.”
“······”
한 모금 깊게 빨아 길어진 회색 재를 재떨이에 대고 털었다. 불규칙하게 자주 가서 근무지 근처를 맴돌았더니 자차 놔두고 퇴근하면 튄다며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 지는 좀 되었다. 투덜대면서도 오지 말라는 말 대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 방식을 바꾼 게 귀여워 웃었었다. 알면서 모른 척 말했다.
“차 놔두고 뭐해.”
“형님 차가 있잖습니까. 그렇게 자주 가셔놓고서는······”
그만 입 놀려야 하나. 박승혁이 째려보지도 않았건만, 명준은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박승혁이 이놈은 잘 말하다가 왜 입을 닫아, 하는 얼굴로 흘깃거렸다.
몇 모금을 더 빨아들인 담배가 곧 짜리몽땅으로 되어 재떨이에 버려졌다.
“바쁜데 너무 오래 떠들었네. 일 시작하자.”
“네. 커피 내오라 할까요.”
말없이 끄덕이는 고개에 명준이 사무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속으로 오늘 일찍 정리하려고 속도를 내시려는구나, 생각했다.
* * *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며 지훈은 꿀물 음료수를 주머니에 넣었다. 저 생각해줘서 사 온 거를 안 먹기엔 뭐해서 들고 온 건데, 유리병이라 주머니가 묵직했다. 역시 괜히 들고 왔다. 아닌 척 정 많은 성격 탓이다.
‘이쪽으로 가던 거 같던데.’
횡단보도를 건너고 인도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지훈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막내가 비닐봉지를 들고 저에게 뛰어올 때 부딪힐 뻔했던 행인.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막내는 죄송하다며 연거푸 고개를 숙였고, 행인은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이 서둘러 사라졌었다.
그때는 그냥 무신경하게 넘겼는데, 다시 생각하며 복기해보니 마음에 걸렸다. 작년 사건을 장난삼아 말하다 보니 이상하게 여겨진 거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경찰과 부딪히면 한 번 더 쳐다보며 훑어보기 마련이다. ‘이 사람 정복 입고 있네, 경찰인가?’ 같은 궁금증 올라온 얼굴로 내가 본 게 맞는지 확인차 훑어보는데, 그 행인은 막내가 부딪히기 직전에 몸을 돌려 피하자 움찔거리며 슥 쳐다보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경찰인 걸 확인하고 걸음을 빨리한 것이다. 단지 사람이 부딪힐 뻔해 놀라 움찔거리고 슥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무엇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행인, 즉 남자의 얼굴이다.
지훈은 핸드폰으로 강력팀 시절 막내였던 준영이 보내준 사진을 띄웠다. 화면 가득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는 여름이라 남자가 반 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지금은 계절도 다르고, 머리 스타일도 도주 중인 지금은 당연히 바꿨을 것이다.
막내를 슥 쳐다보고 바로 고개를 돌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옷과 머리를 빼고 생각해본다면 낯익게 느껴졌다. 확실한 것도 아니고 교통과에서 할 일은 아니라 서에 복귀하기 전 혼자 확인만 해보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남자를 못 찾을 확률도 있었다. 못 찾으면 그냥 차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훈은 횡단보도를 등지고 양옆을 쳐다봤다. 한쪽은 아파트단지로 이어지는 길, 한쪽은 상가와 주택가가 밀집한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확인만 하자. 확인만.’
혼자 정복 입고 서 있으면 눈에 띈다. 깊게 고민하지 않고 상가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주 중인 수배범이라면 아파트단지보다 주택가에서 은신하는 걸 선호할 것이고, 상가와 주택가 쪽이 골목길도 더 많을 거다.
큰길을 따라 걸으며 골목길로 이어지는 길목을 살폈다.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길목이 나타날 때마다 주시하기를 세 번 하고 네 번째였다. 길목 중간에 사람 한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짙은 외투에 짙은 바지를 입고 몸은 약간 움츠리고 있었다.
가로등과 큰길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지훈이 길목으로 들어가 천천히 걸어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살 내디디면서.
몇 걸음을 더 갔을까, 인기척에 핸드폰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몇 미터를 놔두고 두 사람이 서로 마주쳤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남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던 덕분에, 지훈의 정복 차림을 보고 움찔거리는 반응 대신 낭패라는 표정을 지은 덕분에, 지훈은 확신이 들었다. 도주 중인 남자가 맞다. 그리고 남자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
머릿속에 확신이 든 순간, 남자가 등을 돌려 도망쳤다. 살금살금 걸어가던 지훈도 튀어 오르듯이 뛰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에 두 개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울려댔다. 서로 왜 뛰냐, 왜 잡으러 오냐, 라고 묻거나 통성명 하나 없이 냅다 뛰기 시작해 이름 없는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했다.
큰길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지훈은 속으로 음료수를 역시 괜히 챙겨왔다는 생각과 막내도 그냥 같이 데려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두 개 다 뒤늦은 후회다.
달음박질하며 주머니 안에서 음료수가 어지럽게 맴돌았다. 주머니에서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듯 말 듯 한 음료수가 거치적거렸다.
지훈은 뛰면서 음료수를 꺼내 바닥에 던지려고 점퍼를 만지작거렸으나 최고속도를 유지하면서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음료수를 잡고, 바닥에 최대한 덜 시끄럽게 던지는 게 힘들었다. 주머니만 이따금 만지작거리면서 뛰어갔다.
계속 만지작거리던 중 음료수 주둥이가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무거운 유리 음료수병이 낙하하며 반동으로 박살 나면서 골목길을 시끄럽게 메웠다. 박살 나며 사방으로 나온 내용물이 지훈의 바짓단에 튀었다. 둔탁한 가운데 깨진 게 분명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골목길에 울려 퍼지며 지훈을 움찔거리게 했다.
잠깐 뒤를 살피려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한 사이에, 남자가 방향을 꺾어 건물로 들어갔다. 뒤돌아보느라 어지러워진 시야로 잡아낸 지훈이 몇 미터를 더 가 저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폐건물이었다. 남자는 이곳 지리에 능숙하다. 지훈은 남자를 조사하며 그가 어렸을 적 이 동네에서 자랐다는 걸 기억해냈다. 이 폐건물은 아마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을 거고, 그걸 알려주듯 벽 군데군데 금이 가고 발바닥엔 크고 작은 돌들이 밟혔다.
전력으로 뛰어 돌멩이나 쓰레기가 발에 차여 벽에 부딪혔다 떨어졌다. 고르지 못한 바닥과 발에 차이는 이물질들이 지훈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
“얘기 좀, 허억, 헉.”
소용없어도 한번 말해봤는데, 미친 듯이 계단만 오르던 남자가 갑자기 멈추었다. 지훈이 이를 악물고 속도를 붙였다.
그걸 놀리기라도 하듯, 남자는 계단 옆으로 몸을 틀고 복도 너머로 달려갔다.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차라리 흥분해서 위로 가는 게 나았다. 옥상까지 올라가면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짓다 만 건물은 아니었다. 깨졌으나마 달린 유리창도 있고, 이젠 쓸모없는 임대 글자가 적힌 낡고 빛바랜 플래카드도 걸려 있었다.
다 지어놓고 세도 놓았으나 세입자가 자주 바뀌거나 관리를 소홀하게 하여 인기는 점점 하락했다. 건물주는 돈을 들여 새로 리모델링 하는 대신 무기한 임대 플래카드를 걸기로 하고, 그게 지금까지 왔을 게 뻔하다. 즉 낡아빠져도 세세한 부분까지 이미 완공된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면 숨을 곳이 많았다.
욕 나오는 상황이다.
설상가상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건물이었다. 남자가 들어간 복도 입구에 잠시 서서 숨을 골랐다. 안은 빛 한점 들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목덜미에 맺힌 땀이 내려가 옷깃 안으로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숨이 턱까지 차 헉헉거리면서 지퍼를 내려 동계 점퍼를 벗었다. 모자도 벗으려다 놔뒀다. 하얀색 교통과 정복이 드러나자, 이걸 입고 있는 자신이 너무 어색하게 여겨졌다.
차가운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더니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뜨거운 입 안에 있던 공기가 나오며 입김을 만들고 사라졌다. 맞다, 나 아직 감기 기운 있는 사람이지. 이 날씨에 땀 흘리고 외투 벗으면 더 심해질 건데. 그래도 너무 더워 다시 입기는 싫었다. 추격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점퍼를 계속 입고 있으면 몸이 무거울 것 같다.
점퍼에서 수갑과 삼단봉을 챙겼다. 수갑은 허리춤에 달고 삼단봉은 손에 쥔 채 점퍼를 계단 난간에 걸었다. 복도로 발을 디뎠다.
어두워도 어둠에 익숙해지니 편했다.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과 달빛이 건물 안을 꽤 비추어줘 세세한 부분도 식별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이곳저곳을 훑으며 걸었다.
다행히 가정집이나 사무실이 아니라 손님을 맞이하는 식당이었던 덕분에, 내부는 작은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넓은 공간이 큼직하게 두어 개 정도로만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도 커다란 테이블이나 테이블 여러 개를 구분한 가림막도 그대로라 숨을 곳을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테이블이나 가림막을 지나칠 땐 신경을 곤두세워 지나갔다.
넓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 손전등을 켰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하고 돌자, 구석에 문이 보였다. 손전등으로 비추어봤다.
‘Toilet’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문 옆엔 길쭉한 전신거울이 있었다. 여느 식당이 다 그렇듯,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옷매무새를 전체적으로 점검하라는 의도리라.
얼룩지고 모서리가 깨져 거울에 비추어진, 어둠 속에 서 있는 자신이 음산해 보였다. 더 쳐다보면 안 될 것 같아 시선을 돌렸다.
문으로 다가갔다. 소리 없이 숨을 고르고, 삼단봉을 고쳐 쥐었다.
‘끼익-’
밀린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끝까지 밀어 벽에 닿도록 열었다. 귓가에만 들어오는 희미한 소리에 더 이곳에 숨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화장실 내부는 가로등 불빛도 들어오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웠다. 어둠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눈에도 내부가 보이지 않아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추며 들어갔다.
“박치송 씨, 그만 나오세요.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일부러 소리를 내 말했다. 위협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게 나았다. 몇 발자국 더 내디뎌 화장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도주 중인 거 압니다. 그때 저한테 조사받았었죠? 여기서 더 가면 불리······”
몇 걸음 더 들어갔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바람 소리가 저에게 달려드는 느낌에 뒤를 돌며 핸드폰 손전등을 비췄다. 문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문과 지훈의 틈 사이를 뚫고 문가로 달려갔다.
분명 문을 벽에 닿도록 끝까지 밀어 열었었는데. 지훈이 당혹감에 재빨리 문 뒤를 확인했다. 문 옆에 사람 한 명 딱 들어갈 만한 여유 공간이 있었다.
‘씨발.’
디자인을 왜 이따위로 했어. 이따위로 해서 망한 거 아니야? 지훈이 혀를 차며 문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문 뒤에 잔뜩 몸을 움츠리고 짧지 않은 시간을 숨어 있었고, 화장실 바닥 타일이 미끄러운 덕분에 입구 앞에서 잠시 헛발질했다.
그 틈에 지훈이 삼단봉을 휘둘렀다. 삼단봉이 아슬하게 남자의 어깨를 스쳤다. 삼단봉 끝에 걸려 맞아 손에 느낌이 전해졌다.
남자가 신음을 내면서도 화장실을 벗어났다. 지훈도 뒤따라 뛰어나갔다. 거리가 닿을 듯해 삼단봉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이번엔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시원하게 들렸다. 완전히 헛손질한 거다. 아 씨발. 이번에 맞았으면 검거할 수 있었는데. 지훈이 속으로 다시 욕설을 뱉었다.
이젠 폐허가 되어버린 상가 중앙을 가로지르던 남자가 갑자기 테이블 위 냅킨홀더를 집어 던졌다. 당연히 남자가 이대로 건물을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던 지훈은 깜짝 놀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냅킨홀더가 팔을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뒤를 돌아 마주친 남자의 얼굴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아마 삼단봉 끝에 걸려 애매하게 맞은 게 제대로 맞은 것보다 성질을 돋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씨발,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군······’
“얘기하자고 했잖아!”
남자가 고성을 지르며 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재빨리 피하고 남자의 뒤에서 한쪽 팔로 목을 휘감고, 다른 팔로 목을 휘감은 손목을 당겨 목을 졸랐다. 남자가 켁켁거리며 발버둥 쳤다.
“먼저, 얘기하자고 해놓, 곤, 켁.”
“누가 먼저 도망쳤는데. 어?”
목을 더 강하게 조였다. 남자가 지훈의 팔을 잡고 버둥거리다 아무런 소용이 없자 팔을 놓고 뒤를 공격했다. 딱딱한 팔꿈치가 그대로 오른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허억-”
순간 숨이 안 쉬어졌다. 힘껏 조이던 팔의 힘이 저절로 풀렸다. 옆구리를 움켜잡고 허리를 둥글게 말아 꺽꺽거렸다. 목이 졸리고 있어 제대로 힘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세게 때린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풀려난 남자가 오히려 당황해서 쭈뼛거렸다.
“아 씨, 뭐, 뭐야. 왜 이래, 씹.”
“콜록, 콜록, 콜록!”
마구 내뱉는 기침 사이로 나온 침을 신경 쓸 생각도 못 하고 맞은 곳을 움켜잡았다. 주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착각이 일었다.
하필 깊게 다쳤었던 부위를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당시 병원에서도 ‘내장이 많이 손상될 정도로 칼날이 깊게 찔렸고, 완치된 이후에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을 것이나,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고민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었다.
아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직업에 따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재활치료 기간에 갑자기 수술 부위가 당기고, 딱딱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건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고, 재활치료 중이었다. 으레 나아가는 과정 중 일부라 여기고 넘겼었다.
치료가 끝나고 강력팀에 복직한 뒤론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가 대기발령 상태로 돌려졌을 때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자 다시 통증을 느꼈다. 그래서 심리적인 것으로 치부했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 후유증 따위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의사가 당부했던 말 중 마지막 문장을 믿지 않았다.
직업이니만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구라치네. 나는 이렇게 쌩쌩한데. 다 심리적인 것뿐인데. 환상통 그런 건 내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우습게 여겼다. 그랬는데.
“으, 윽······”
수술 부위를 정확히 강타한 것도 있거니와, 예상치 못하게 맞아 충격이 더했다. 아무리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어도 성인 남자가 순간적인 힘을 실어 때렸다. 정통으로 강한 충격을 받은 부위가 일전에 칼날이 내장까지 들어갔을 때의 고통을 다시 상기시켰다. 소리도 못 내고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강한 고통이었다.
칼날이 살을 파고들 때의 고통이 재생되자 지훈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순수한 고통으로 맺힌 눈물이 속눈썹에 매달렸다. 간신히 버티던 두 다리가 꺾여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더러운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부들거리는 모습에 남자가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제자리에서 쭈뼛거렸다.
“아 씨, 씨발, 어떡하지, 씨, 씹.”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보다 경찰을 제대로 폭행해버렸다는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더 크게 메웠다. 화가 나서 달려들었다가 이성이 돌아오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애초에 도주도 내연녀가 시켜서 홧김에 한 거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괘, 괜찮, 아 씨발, 몰라!”
떨리는 두 손을 주먹 쥔 남자가 냅다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때린 건 이미 때려버린 거라 어쩔 수 없고, 이렇게 된 거 도망이나 확실히 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훈은 옆구리를 움켜쥐면서도 남자가 달려가는 걸 고개도 못 들고 내버려 뒀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뒷덜미를 낚아채 검거하고 싶은데, 머리는 그러고 싶은데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짜증 났다. 욕도 못 뱉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계단, 계단.”
남자가 중얼거리며 짧은 복도를 달려갔다. 복도 끝은 금방이었다. 여기서 코너만 틀면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됐······”
코너를 트는 순간, 남자의 눈앞에 완전한 어둠이 펼쳐졌다.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던 건물 내부에 비해 계단은 너무 캄캄해서 그런가, 그래서 눈앞에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가?
찰나 동안 생각한 사이, 귀가 찢어질 정도로 굉음이 들렸다. 굉음이 들렸다고 느낌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머리를 흔들었다. 남자의 두 눈이 바로 감기며 몸이 종잇장처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내팽개쳐지듯 쓰러진 남자 앞엔 박승혁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