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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58화 (158/162)

158화

참사가 일어난 뒤, 행안부에선 긴급히 그랜드 파라디스의 현장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극비리에 다뤄지고 있는 정보에 의해 고등급 전투계 에스퍼들이 수도권 밖으로 옮겨 간 터라 현재 남은 인원으로는 현장 대처가 어렵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은 무너지는 중이었고 안에선 괴수가 날뛰고 있었다. 생존자의 수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 무작정 인력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현재 서울에 대기하고 있는 에스퍼들로는 그랜드 파라디스 주변에 저지선을 꾸리고 소방 인력을 지원하는 게 고작이었다.

“문제는 시기입니다.”

시기가 공교로웠다. 차마 공표할 수 없는 기밀상의 문제가 먼저 터지느냐, 아니면 그 전에 그랜드 파라디스가 폭삭 무너지느냐. 그것도 아니면 전자의 문제가 후자의 문제를 수습하며 터지느냐. 어느 쪽으로든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혼란과 더 큰 피해를 초래할까 봐 아직 정보가 통제되고 있었으나, 일부 자료만으로도 실무진들은 정부에서 머지않아 에스퍼가 문제를 일으킬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에스퍼들도 각자 파벌이 달랐고 고등급 전투계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동시켰기 때문에 외부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인 일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동시킨 에스퍼 중 문제를 일으킨 경우는 없었기에, 일단은 그랜드 파라디스에 투입하여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밖에서 보기엔 대처를 안 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습한 뒤에는 생각 안 합니까? 시민들 눈에는 에스퍼들이 단체로 태업하는 줄 안다고요! 태업!”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예?”

“저 큰 빌딩이 무너지면 인근 지반은 어떻게 됩니까? 어쨌든 에스퍼라도 불러서 사태를 해결부터 하고, 에스퍼들한테 이상한 징조가 보이면 그때 격리해야죠. 지금은 다름 아닌 비상사태입니다! 별일 없을 때도 이런 식으로 일 처리하면 욕먹어요, 욕!”

지도부는 서로 고성을 지르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리하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랜드 파라디스의 붕괴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에스퍼 다섯을 선별하였는데, 무경은 그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또 반발이 일었다. 무경이 예전에 붉은긴다리불가사리 무리를 여유롭게 제어해 내며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선발에서 뺄 수 없다는 의견과 그가 십 대일 때 정신계 괴수의 힘에 휩쓸려 일대를 날려 버린 이력이 있다는 걸 지적하며 반대하는 의견이 대립했다.

백무경은 지금 상황에 가장 우려되는 인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건 정보를 알고 있는 지도부의 사정이었고 일반 국민은 알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백무경을 수도권으로 올려 대기시킨 다음, 상태를 보고 현장에 투입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비상시에는 그와 다른 에스퍼들을 잠재울 비인륜적인 장치들도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무경은 서울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오래지 않아 현장 투입이 결정되었다. 탁상공론 끝에 책임질 사람이 나온 모양이었다.

다만 그런데도 현장에 투입되기로 한 에스퍼 다섯 중 무경의 투입이 가장 늦었는데, 마지막까지 망설인 데다가 가장 많은 비인륜적인 장치들을 설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염치없다는 말로도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동의서를 작성해야 했으니까.

“최대한 오래 버텨 주십시오.”

무경의 역할은 그랜드 파라디스의 붕괴를 늦춰 소방 인력이 대비소에 탈출문을 설치하여 대피한 생존자들을 구출해 내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그 말인즉 무너지는 건물과 건물 밖으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괴수들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누가 비상시에 자신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며 사지로 기어들어 간단 말인가. 그렇다고 또 보상이 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경은 망설임 없이 모든 절차를 마쳤다.

뉴스를 본 뒤로, 현장에 김하윤이 있는 것을 안 뒤로부터 무경은 몸이 한껏 달아 있었다. 에스퍼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나 대강의 확인 절차 끝에 자신은 이런 일이 아니라면 현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무경은 서울로 들어가기 위해 제어 장치를 삽입하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동의서에 서명하고 장치를 삽입하거나 착용하는 동안에도 무경은 하윤의 기운을 좇았다. 예상대로 하윤은 그랜드 파라디스 안에 있었고, 그 안을 누비다가 마침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선객이 있었는데, 영상 정보를 통해 밝혀진 신상 명세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의 이름은 윤일호. 김희원을 구출했던 피노키오의 인간 공장의 최초 신고자였다. 분명 같은 사람일 텐데 그때와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누군가와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 말이다.

‘김득철.’

그가 김득철과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몰랐다. 다만 김득철을 마주한 듯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더 불쾌한 것은 하늘에 있었다. 김하윤과 윤일호가 대치하는 가운데 무경은 그들의 머리 위 하늘이 꺼림칙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하늘 속에 뭔가가 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김하윤을 여기 둬선 안 돼. 도망치게 해야 해.’

그의 스트레스 수치가 올라가자 착용한 기기에서 위험 알림을 보냈다. 무경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그랜드 파라디스 일대에 자신의 기운을 넓게 퍼트리는 것에 열중했다. 그러자 김하윤의 움직임이 더 정확하게 느껴졌다.

윤일호의 몸에 변형이 일어 액체 같은 상태가 되었고, 무경이 꺼림칙해하는 하늘로 쭉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파견된 에스퍼들이 하윤과 접선했다. 하윤은 간단한 브리핑과 함께 그와 전투를 이어 나갔다.

김하윤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꾸준히 단련하지도 못했으면서 육신을 어떻게든 쥐어짜기 위해 동작이 커진 탓이었다. 무경은 대기하고 있다가,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하여 기술을 사용하겠다는 에스퍼들의 무전이 들어온 뒤 힘을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김하윤이 변형된 윤일호의 몸을 조각내고, 군 소속 에스퍼가 드러난 핵에 기술을 사용했다.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일자 이미 충분히 흔들린 건물 축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물은 무경의 힘의 범위에 들어온 후였고, 무경은 이미 부서져 낙하하는 건물의 일부를 아주 느리게 땅으로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최후의 일격을 마치고 주저앉은 김하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김하윤에게는 직접적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떨어지는 옥상을 이용했다. 자신이 그 작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김하윤은 모를 것이다. 옥상을 바닥에 내리기도 전에 김하윤이 또다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경은 숨을 헉 들이켰다. 하윤을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곧장 자리를 박차고 그를 찾아 나선 것은 그런 연유였다.

‘하윤아, 하윤아, 하윤아.’

자리를 지키라는 무전이 들어왔으나 무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김하윤을 좇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시 마주했을 때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느껴졌다. 김하윤의 눈과 손목에서 나는 빛 때문이었다. 이미 본 적 있는 것들이었음에도 이상하게 가슴이 쥐어짜이는 것만 같았다.

‘일단 피하게 해야 해. 여기 오래 두면 안 돼.’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분명했다. 무경은 하윤을 데리고 달아나려 했으나 하윤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무경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가엾은 것을 가엾게 여기지 않았기에 벌을 받는다니.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데 가만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선하고 약한 것은 진작 배제되는 세상이다.

그런 권선징악이 가능했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몇이겠는가. 억울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서로 해악을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 꼴이 어떻느냐 말이다.

무경은 하윤에게 이제부터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시답잖은 일에 귀 기울이지 말고 그냥 모른 척하라고. 자신과 새벽녘에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너 하나 나서서 뭐 할 건데? 그런 건 저기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X 같은 동의서 써 가면서, 다들 그러면서 하는 거라고. 알겠어? 알겠느냐고! 왜 대답을 안 해!”

“…….”

“……나랑 약속했잖아.”

왜 약속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지킬 생각 없었던 사람처럼 아무 의미 없는 약속이었던가? 무경의 역정에도 하윤은 더는 성을 낼 힘도 없는지, 마모된 사람처럼 덤덤한 얼굴을 했다.

“무경아, 나 내려 줘. 어지러워.”

무서움이 덜컥 밀려들었다. 무경은 하윤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손을 놓으면 꿈에서 숱하게 봤던 광경처럼 김하윤이 사라질 것 같았다.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모래처럼 부서지거나.

하윤은 그가 분명 빼앗아 던졌던 총을 다시 쥐고서 그를 협박했다. 능력이 통하지 않음을 경고하자 자기 스스로를 겨눠 무경을 재차 협박했다. 그를 말리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으나, 하윤의 어깨를 뽑으려는 순간 그가 지른 비명에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하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품을 빠져나갔고,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무경은 문득 또 당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기억에는 김하윤의 머리채를 잡아끌거나 팔과 다리를 잡고 무자비하게 휘둘렀는데, 또 다른 자신의 기억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어깨를 뽑지도 못해 놓고 뽑아 버리고 만 것처럼 손이 떨렸다.

거리를 벌린 하윤은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쏟아 냈다.

우리는 이제 많이 자라 더는 열일곱이 아니며, 과거의 무서움은 자라난 우리에겐 별것 아닐 수 있다는 둥. 그러니 헤어지는 것도 다시 만나면 그만이니 별것 아니라는 둥.

그게 어떻게 별것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쯤부터 그는 하윤에게 애원만 늘어놓았다. 제발, 제발,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무엇을 할 건지는 모르겠으나 하려는 것을 멈춰 달라고.

“그래도 우리 십 년 동안 내내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지?”

하윤은 다정하고도 차가운 눈빛으로 무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무경은 하윤이 자신을 버리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경은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다가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가엾은 것을 가엾게 여기지 않아 벌을 받는다고 했으면 왜 가엾은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네가 하는 것에 따라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가엾어질지 가장 잘 알면서. 너 없으면 혼자 남겨질 내가 괜찮으냐고.

그러나 하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예전에 무경은 하윤이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자신을 버리지 못하리라 자신했다. 자신이 틀렸던가?

물음의 답을 구하기 전에 김하윤은 이번에도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무경아, 넌 운명을 믿어? 내 앞인데 그렇다고 대답해야지.”

무경은 지금 이 순간만은 운명을 믿지 않았다. 운명을 믿기에는 김하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려 하지 않은가.

“무경아, 뒤를 부탁할게.”

무경은 눈을 부릅떴다. 내내 그를 괴롭히던 불길함의 정체를 알았다. 그가 내내 불길하게 여기던 하늘이, 그곳에 자리한 [문]이 김하윤을 삼킬 것이다.

혈관 속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느낌과 함께 수십 수백개의 불길한 목소리가 자신의 불행을 속삭였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윤아, 하윤아 제발 가지마. 제발, 제발 거기 가면 안 돼! 이렇게 빌게, 제발!”

즉시 하윤을 따라가려 했으나 그 순간 김하윤의 몸이 황금을 뒤집어쓴 듯 금빛으로 물들었다. 빛나던 손목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고리가 그의 주변을 돌며 요동치기 시작했고, 이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제바아알!!”

그러고는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스퍼들을 이동시켰다.

김하윤의 힘과 무경은 힘은 서로 간섭하지 못하므로 무경은 하윤의 힘에 밀려 나동그라졌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윤의 힘, [문]이 계속해서 자신을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하윤은 결국 하늘로 올라갔다.

더없이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하윤을 삼킨 하늘은 빛으로 번쩍였다. 번개라고 하기엔 천둥소리가 뒤따르지 않았다. 무경은 그것이 몹시 불길하게 느껴졌다.

‘김하윤한테 가야 해.’

무경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밀리고 나동그라지며 골절이 발생한 탓이었다. 김하윤이 허벅지를 쏜 것도 영향이 있었다. 무경은 자신을 밀어내는 [문]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기어올라 갔다.

“돌려줘……. 제발, 제발!”

더는 부정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하윤이 백무경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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