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내 말 잘 들어 무경아. 지금부터 아무 생각하지 마. 궁금해하지도 말고. 그냥, 그냥 멈춰. 그리고 전화 받아.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김하윤과 간월암에서 나오던 길에 지원 요청을 받았을 때, 김하윤은 전화를 받지 않으려던 그의 눈을 가린 채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지 말라고 해서 어떻게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조차 생각인 것을.
오히려 잊고 있던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이전에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호해서 자신의 ‘기억’인지 ‘망상’인지 구분 짓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자연스럽게 알았다. 그래, 마치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에 따라 온갖 감정이 넘실거렸다. 시냇물처럼 발목에서 찰랑일 때는 남의 일 떠올리듯이 되다가, 그것이 차츰 종아리와 허벅지에 다다르자 아차 싶었다. 그때쯤에는 내내 자신이 지금껏 이해하지 못하던 일이 생기게 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하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라던 김하윤의 말이 왜 나왔는지 또한 알았다.
너무나 많은 감정이 솟구쳐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그만’해야 했다. 이대로 내내 잠겨 있다간 질식할 것 같았으니까.
지원 요청에 따라 현장에 배치된 이후 무경은 내내 하윤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아, 의문을 품지 말라는 것이었군.’
이미 많은 것을 떠올렸으나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더러 있었다. 때를 만났다는 것처럼 각종 의문이 몰아치듯 밀려왔다.
무경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김하윤이 생각났다. 그에 대한 의문을 떠올린 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그가 보고 싶어지는 이유가 되는가?
미처 답을 내리지 못하고 보고 싶은 마음도 접지 못한 채로 내내 자리를 뒤척였다. 그러다가 아주 잠시 눈을 붙였을 때, 무경은 옛날 꿈을 꿨다.
김하윤과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옛날 집이 나오는 꿈이었다.
계절도 이때쯤이라 새벽녘이 파르스름했고, 자신은 악몽을 꾸다 깨 버린 김하윤을 업은 채 마당을 서성였다. 하윤의 꺼림칙한 기분을 털어 버릴 겸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 사심이 뭔지는 몰라도 김하윤을 받친 손을 이따금 까딱거렸다.
김하윤이 미쳤느냐며 몸을 들썩이면 자신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꼬리를 가만두지 못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훈련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자라고 속살거렸다. 김하윤은 분해하다가 자신의 손해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따라 팔랑거리는 속눈썹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무경은 계속해서 마당을 서성였다.
[…….]
분명 마당을 서성이는데, 자꾸만 파도 소리가 들렸다. 도심에서 들릴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뭍에 다다라 부서지고 깨어지는 물살에서 들리는 특유의 소리가.
무경은 하윤을 업은 손에 힘을 주었다. 뭔가가 심상치 않았다. 하늘은 아직 새벽이 가시지 않았다는 양 푸르스름했다. 물속에 잠긴 것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무경은 정말 물속에 잠긴 듯이 몸이 둔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경은 숨을 참으며 등 뒤의 하윤을 짚었다.
혹 그사이에 잠들었나 싶어 가슴이 철렁였다. 얼른 하윤만이라도 수면으로 보내고자 손을 푸는 순간, 하윤이 없었다.
온데간데없었다.
무경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덜 자란 어린애처럼 끓어오른 감정을 삭일 수가 없었다. 좀처럼 그쳐지지 않아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휴대 전화를 간절히 움켜쥐었다. 혹여 온 연락이 없을까 들여다보다가, 예전 메시지를 찾아보다가.
그러다가 한참 망설인 끝에 직접 전화도 걸어보고 메시지도 보냈으나, 늘 그렇듯 김하윤은 연락을 잘 받지 않았다.
‘늘 나만 갑갑하지.’
문득 자신이 기억하는 ‘늘’이 언제였는지 헷갈렸다. 그리고 그때쯤에 김하윤의 답신이 왔고, 다시 전화를 걸자 그제야 김하윤이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기다린 전화였는데 막상 김하윤의 목소리를 듣자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그쳤다 싶은 울음이 다시 끓어올랐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저 꿈을 잠깐 꿨을 뿐인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김하윤이 했던 말을 잘 지킨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김하윤이 나무라는 게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이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일은 김하윤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익숙했다는 것이었다.
무경은 자신이 구분 지어 놓은 다른 ‘백무경’과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하윤에게 서운함을 토로한 뒤였다.
김하윤이 직접 와 준다고 했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사실은 실제로도 조금 뛰었다. 평생 비밀로 간직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마주한 김하윤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이전의 기억에도 이후의 기억에도 이렇게 다정했던 적이 없었다. 그가 주는 다정함이 너무도 달콤해 그대로 취해 있고 싶었으나 또 마냥 그럴 수가 없었다. 김하윤이 이상했다. 뭔가를 숨기는 게 분명했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하는 말에 모두 그러겠다고 할 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듣는 척하면서 안 들으려는 속셈이겠지.’
김하윤은 고집이 센 편이었고 무경은 그의 고집을 꺾은 적이 얼마 없었다. 자기 말을 받아치든 받아치지 않든 간에 하윤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예 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나중을 기약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다시 보자. 그때엔 그가 자신을 속였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윤을 집으로 보내고 난 뒤에 무경은 문득 하윤이 마치 자신이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굴었음을 깨달았다. 먼 곳으로 떠나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오후께가 되었을 때, 무경은 자신이 예지 능력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주변 상황 돌아가는 꼴이 심상찮았다. 지역에서는 급한 불을 끄고 나자 이제 더는 비위를 맞춰 줄 일이 없다는 양 구는 것이 꼭 골칫덩이를 맡기라도 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경의 능력 특성상 사고가 나든 나지 않든 환영받았기 때문에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더 오래 잡아 두고, 사고 현장을 제어해 주길 바랐는데, 지금은 서울로 돌려보내고 싶어 했다. 당장 복귀하라는 명령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등급의 전투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이 수도에서 지방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이 주여의 출장이 갑작스레 결정된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레 결정되면 애 키우는 집에선 대처를 어떻게 하느냐는 등의 불만이 올라왔으나, 상부에선 그 흔한 면담조차 잡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도 아는 게 없어 답답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아무런 정보 없이 어떻게 이런 처리가 가능하단 말인가. 혹 불온 세력이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노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순 없을 텐데.
온갖 의혹들이 튀어나와 소문을 무성하게 만들었고, 그날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무경은 복귀 명령을 받지 못했다.
‘김하윤은 이걸 미리 알고 있었군.’
김하윤은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GTS에 고문으로 얼굴을 비쳤으나 김하윤은 엄연한 일반인이었다. 일반인이 아는 것을 무경이 모를 일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일반인인지 군인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김하윤만이 아는 정보라는 뜻이었다.
김하윤만이 아는 정보.
‘[문]에 관한 것. 그렇다면 게이트, 미궁에 관련된 것이겠군.’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상했다. 게이트와 미궁에 관한 일이라면 고등급 전투계 에스퍼들을 수도에서 물릴 일이 있나? 지방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도 이상했다.
‘이렇게 흩어 버린다고?’
지방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설령 그렇다 한들 에스퍼들에게 기본적인 설명은 해 줘야 했다. 그래야 대응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대응이 필요 없는 일인가?’
게이트나 미궁에 관한 일인데 고등급 에스퍼들의 대응이 필요 없는 일.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일. 그게 뭘까.
‘누군가 국가 전복이라도 꿈꾸는 것인지?’
그렇다고 군에서 들리는 소리도 없었다. 모두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일의 배후에 파란 지붕과 GTS이 있다는 소리가 나왔다. 파란 지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GTS에서 무슨 힘이 있기에 정보를 통제하고 군을 움직인단 말인가? 이를 가만두고 볼 수 없던 일들이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하나둘 지식을 맞댔다.
게이트와 미궁에 관련된 일이며, 초능력자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신계 괴수와 관련 있을 것이고 괴수를 특정할 수 있는 만큼 단발성 게이트는 아니다. 이미 해당 게이트의 정보가 있다는 소리였고, 그 말인즉 이 세상에 이미 한 번 나타난 적이 있는 미궁이라는 소리였다.
전투 계열 에스퍼들이 장기 출장을 주로 갔던 점을 들어 최근에 있었던 변이 사건을 떠올리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다만 이는 기밀이었으므로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다들 알음알음 생각만 하며 이따금 같은 초성을 올리며 서로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국내외 에스퍼 손실이 컸던 사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십 년 전 서울에서 있었던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이 나왔다. 국내에 있었던 에스퍼 손실이 최대치를 찍었던 때가 그때였으니 당연했다.
‘분명 당연한 일인데.’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글을 보는 순간에 김하윤이 숨긴 것이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신저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당장 김하윤을 말려야 해.’
무경은 이제 그날 미궁을 닫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김하윤.’
김하윤은 모친의 유언에 따라 그날 문을 닫았고 너무나 많은 능력을 사용해 능력을 잃고 말았다. 최근에서야 힘을 되찾기는 했으나 힘을 잃기 전만 못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그때와 같은 일을 하려면 단순히 능력을 잃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김하윤을 말려야 해.’
탈영이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김하윤을 말려서 그를 안전한 곳에 둘 수만 있다면 뭐가 됐든 좋았다. 그러나 밖을 나가려던 차에 건물 복도에서 들려온 사건 사고 뉴스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둘러 방에 돌아가 뉴스를 틀자 그랜드 파라디스라는 빌딩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었고, 무경은 뉴스 화면 속에서 제공된 CCTV 화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김기준.’
김하윤의 쌍둥이 동생 중 하나.
참사가 일어난 그랜드 파라디스에서 탈출한 시민들이라는 자막이 붙어 있었는데, 이들이 일반 대피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무경은 그것이 누구의 힘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모르면 이상한 일이었다.
다름 아닌 김하윤의 능력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