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자신의 말이 뜻밖이었던 것일까. 무경은 숨을 들이켠 뒤, 잠시 침묵했다. 휴대 전화에 표시된 시간은 몇 초 남짓했으나 하윤에겐 몇십 분이라도 되는 양 길게 느껴졌다. 피곤해서 뻑뻑한 눈가를 비비며 농담이었노라고 얼버무리려 했다.
[……응.]
이번엔 하윤이 입을 다물었다. 짧은 대답 하나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도 동요하는 것은 자신도 그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눈꺼풀을 감으면 곧장 잠이 들 것 같으면서도, 씻을 때도 내내 힘들어 샤워기 밑에 주저앉아 있었기만 했으면서도.
고작 대답 하나 들었다고 몸을 일으키는 자신이 우스웠다. 막상 대답한 무경도 자신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노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윤은 소리 없이 웃으며 몸을 곧게 폈다.
“나한테 문을 열라고 해.”
[…….]
“그러면 내가 단번에 너를 찾아갈게.”
하윤은 문을 열 만한 방향을 찾아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는 찰나의 시간, 그의 의지를 따라 공간이 접혔다. 하윤의 뜻이 닿는 곳, 백무경이 있는 곳까지 범인의 눈으로는 감히 쫓을 수 없는 형태로 일그러지고 접히더니, 이내 그 중심이 꿰뚫리며 [문]이 만들어졌다.
익숙한 나무 문을 코앞에 둔 채 하윤은 무경을 불렀다. 얼굴 비비는 특유의 소리가 느껴졌다. 아마도 고민을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을 열어, 김하윤.]
문을 열어라, 김하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하윤은 곧장 문을 열었다. 꽤 먼 거리를 연결했음에도 통로는 길지 않았다. 큰 걸음으로 몇 걸음 떼자 금세 맞은편 문에 닿았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때에 하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열고 나올 문 또한 무경이 눈치챌 수 있을까. 만약 눈치챌 수 있다면…….
문틈으로 건너편을 들여다본 순간, 하윤은 자신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무경을 발견했다. 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며 하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잊고 있던 예전 일이 떠올랐다. 무경이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홀로 욕구를 풀어내던 그때.
만약 그때도 지금같이 알아차렸다면?
‘이 자식.’
하윤은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무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문을 열고 나가 그를 맞았다. 무경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하윤이 낯설었던지,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어색했던지 하윤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괜히 그의 주변을 살피다가, 자신의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대답이 없어서 끊은 줄 알았어.”
“나중에 문제가 될지 혹시 모르잖아. 그래서 두고 왔어.”
서울에 있던 사람이 몇 초 만에 지방으로 이동한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이야 자신이 일반인으로 분류되어 통화 기록이 떼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상대가 문제였다. 자신이야 일 주에서 이 주 사이에 끝날 수 있는 목숨이래도, 무경은 아니니까. 그러니 그 이후를 생각해야 했다.
혹 자신이 능력을 은닉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것이 발각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기는 한데.’
문제가 생기려면 평소 생길 리 없는 부분에서도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충분히 위험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일은 조심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치면 지금 이렇게 온 것도 말이 안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줄 알면서도 저 또한 무경이 보고 싶었다. 어리석다고 자신을 욕해도 맞는 말이라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왜 웃어?”
무경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하윤은 반사적으로 입가를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아차 싶어서 몸을 돌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숙소야?”
군용 숙소 같아 보이진 않았다. 무경의 설명으로는 관광호텔 사장이 지역 복구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공실이 된 객실을 숙소로 지원해 주었다고 했다. 일대를 정리하고 안정시키기까지 정상적으로 영업하기 어려우니 생색도 내고 홍보도 하고 무경과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아 갔다고.
“그래 봤자 객실이 많지 않아서 간부들 몇 들어갔을 뿐이지만…….”
“그중에 네가 들어가 있네.”
“휴가 중에 끌고 갔으면 비위를 맞춰 줘야겠지.”
무경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다음 아직 통화를 끊지 않은 휴대 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대화 소리가 들려도 그저 통화였다고 할 셈이리라.
“뭐 좀 마실래? 없긴 한데, 그래도. 아, 일단 앉아.”
하윤은 그가 권한 의자에 앉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무경을 보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눈꺼풀이 무거웠다. 포트에 넣은 물이 방정맞게 끓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눈꺼풀이 붙더니, 고개가 제멋대로 끄덕거렸다.
“졸리면 그냥 거기서 자지.”
“……어? 아니야. 나 안 잤어.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
서둘러 변명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눈꺼풀이 뜨이지 않았다. 자신도 당황하는 사이 무경의 손이 하윤의 머리칼을 훑었다.
“자고 있었던 거 아니었네.”
“…….”
“뭐 했어?”
가슴이 뜨끔하자 그제야 눈이 뜨였다. 하윤은 잠시 뜨인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
“내가 해야 할 거.”
“그게 뭔데.”
슬쩍 본 무경의 시선이 따가웠다. 하윤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경의 침대로 향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다음 무경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왜 뭔데. 그냥 여기서 말해.”
“아이, 이리 와 봐.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래.”
무경은 평소와 달리 하윤의 성화를 이기지 못했다. 하윤이 말하는 대로 침대에 슬쩍 걸터앉았다가, 이내 하윤과 같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짠.”
하윤은 바닷속 동굴에서의 일을 상기했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그가 바라는 대로 힘이 일어났다. 일대의 문이 하윤의 의지에 반응하듯 존재를 알렸다. 하윤은 그것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동시에 그것들에 해당하는 좌표를 떠올렸다. 또한 좌표가 붙지 못한 [문]들과 이곳을 스치는 다른 세상의 [문]의 궤도 또한 그려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신기한 것은 자신이 이것을 낯설고 신기한 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꼭 익숙했던 일을 오랜만에 하는 것처럼.
“…….”
무경은 하윤의 빛나는 양 손목을 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윤은 그제야 무경이 한쪽이 빛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게다가 무경은 인터넷을 워낙 안 하는 사람이라 자신이 뭘 흉내 낸 것인지 몰랐다.
“이게 뭐야?”
무경은 아예 하윤의 손목을 비볐다. 야광 도료로 낼 수 있는 빛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랬다. 손으로 지워지지 않자 이불자락을 쥐고서 비벼 댔다. 그러다가 하윤이 아파하자 조심스레 손목을 감싸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들썩였다.
“대체 뭐냐니까. 이게 뭔데 네가 해야 하는 일인데.”
“…….”
“왜 말이 없어!”
“화낼까 봐.”
“…….”
“화내지 마. 나 네가 화내는 거 싫어. 예전엔 내가 좋다는 것만 해 주기로 했잖아.”
아차 싶었다. 왜 예전 일을 꺼냈을까. 어차피 알아듣지도, 알아들어서도 안 되는데.
무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하윤을 나무랐다.
“화낼 일을 안 하면 되잖아. 제발 그러면 안 돼?”
무경은 조곤조곤한 무슨 일이 있든 일반인인 하윤이 나설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문]에 관한 것도 그냥 의문이나 풀고 적당히 모르는 척 거리를 두라고. 세상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같은 건 없다고도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아무것도 믿지 마. 괜히 부담만 지우려고 하는 소리니까. 그런 새끼들 말 하나 들을 필요 없어.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으니까 절대, 절대로 듣지 마. 알겠어?”
“…….”
“왜 대답을 안 해? 혹시 자?”
목소리만 바꿔 놓고 화내지 않는 척하는 게 우스웠다. 그러나 이게 또 어딘가 싶기도 했다.
하윤은 대답을 재촉하는 무경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 들었노라고, 알겠노라고 고개도 대답도 했다.
“그럼 여태까지 이것 때문에 안 자고 있었으면 내가 말했던 건 하나도 안 했겠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병원 가서 링거도 맞고, 죽도 사 먹었어.”
하윤은 링거 맞은 자국을 찾아 팔을 더듬거렸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다시 팔목을 빛나게 하자 무경이 머리가 아프다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나 하윤은 그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봤다.
“잘했지?”
“……그래.”
먹어서 다행이다. 무경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윤은 느릿하게 눈을 껌뻑이다가 무경에게 물었다.
“너는 오늘 그렇게 불려 가서 뭐 했어?”
“뭐 했긴. 그냥 괴수 잡고 주변 복구 도와주고. 그러다가 겨우 밤이나 돼서야 숙소 배정받고 들어와서 씻고. 그랬지 뭐.”
“한 거 되게 많을 텐데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짧아지네. 나도 그냥 이렇게 말할걸.”
“…….”
“괜히 곧이곧대로 말했다가 혼만 나고.”
“내가 언제 혼냈는데.”
“아까 하던데.”
무경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 모습 같다고 하면 예전 같고, 또 아니라고 하면 아니었다. 하윤은 소리 없이 웃다가 이내 얼굴을 비볐다. 잠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할 일이 남았는데.’
무경은 재차 졸리면 자라고 말했다. 자신이 나가기 전에 깨워 주겠노라고. 그러나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문득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뒤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면서도 이 모든 것을 잠시 모른 척할 수 있는 고요가 귀중하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이 시간을, 이 고요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너 이렇게 졸린 줄 알았으면 부르지 말걸.”
무경의 말에 하윤은 조용히 웃었다. 그런 사람이 새벽 네 시에 전화를 거는 게 말이나 되던가. 실눈을 뜬 채 바라보자 무경이 하윤의 눈을 가렸다. 하윤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가 스르륵 힘을 풀었다.
“그냥 무시하고 받지 말지.”
“…….”
“헛소리한다고 생각하고 그냥 흘려버리지.”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무경의 말처럼 헛소리 취급하고 흘려버릴까 하다가, 결국 또 대답하고 말았다.
“그게 안 되더라고. 궁금해서. 그렇게 나 먼저 집에 보내 놓고 뭘 했는지 궁금해서. 그 생각 하다 보니까 보고 싶어서.”
눈을 가리고 있던 무경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하윤의 입술 부근을 매만졌다. 보고 싶었노라고 말할 때는 노골적으로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윤이 입을 다문 채 바라보자 바짝 다가와 숨결같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몸이 가까워지고 이마가 맞닿았다. 하윤은 품을 파고든 무경의 어깨를 짚었다. 어두워 보이지 않으면서도 밝을 때보다 더 크게 눈을 부릅떴다.
“……걱정돼서.”
“왜?”
무경의 물음이 조금 전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목소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답을 틀어막은 입술에 하윤은 무경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하윤은 무경을 밀어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두 몸이 하나같이 엉기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둘은 본디 하나로, 서로의 조각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