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네 개의 현판 중, 마지막으로 읽은 현판의 글씨는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세세히 따져 보면 같은 사람이 쓴 것 같은데 그것만 유독 흔들리거나 제멋대로 획을 뻗쳐 놓았다.
‘파 놓은 것도 좀 그렇군.’
세 개는 전문가가 새겨 넣은 듯 고르고 깨끗한데 마지막 하나만 팬 자국이 고르지 않았다. 굵게 판 것도 있고 얇다 못해 글자 자체가 팬 곳도 있었다. 도대체 왜 현판 하나만 저 꼴일까. 직접 파기라도 한 것일까.
정확한 상황을 알 순 없지만 어쨌든 마지막 것만 앞선 세 개와 다른 것은 분명했다. 앞선 세 개가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면 마지막은 방문자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힘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이미 이곳에 들어올 정도면 네가 가진 힘은 충분하지 않으냐고. 복수의 끝은 이렇듯 허망하다고.
“가여운 것을 가엾이 여기라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겨질 사람을 위해서.
하윤은 미간을 문지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내가 왔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은 복수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구하기는 할 것인데,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도망치지 못해서.”
그러고는 김옥림이 말한 자신의 운명을 곱씹었다. 초개같이 타오를 운명. 이 과정에서야 진정 자신을 태워 없앨 수 있을 것 같아서.
불순한 이유라면 불순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누가 자신을 혼낼 것이며, 그런다고 자신이 순수해지겠는가. 그러나 다시 곱씹자, 선배 문지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다.
“참 나.”
맞는 말이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하윤은 고개를 획 돌려 다시금 사당 한가운데 있는 달항아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성찰보다 이곳을 만든 사람이 둘로 나누었다는 그 힘이 중요했다. 하나는 세상에 흘려보냈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 있다.
‘문지기의 힘은 곡옥이고, 물은 곡옥의 힘을 누른다.’
그렇다면 이곳에 그런 귀물이 있을 만한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물이 그득 든 달항아리 아니겠는가. 하윤은 달빛이 비치지도 않는데 노랗고 둥근 달 같은 빛이 어리는 항아리 속 물을 보며 손을 뻗었다. 달을 잡아 보고자 하였으나 당연하게도 잡히지 않았다. 하윤이 손을 뻗자 그 달이 물속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수면에 비친 것이 아니라 항아리 안에서 빛나던 것을 자신이 착각한 것처럼.
하윤은 자신이 전래동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탐욕에 눈이 멀어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뒤따르다가 화를 당하는. 그사이 또다시 항아리의 물이 반절로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달은 더 깊숙이 있는 것처럼 멀게 보였다.
이걸 안 좇을 수도 없고.
‘아예 안으로 들어가야겠는데.’
오늘따라 물에 자주 빠졌다. 이것이 몸에 곡옥을 지닌 문지기의 숙명일까. 하윤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달항아리 손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풍덩!
자신의 키만 한 높이였기에 금세 바닥에 닿으리라 여겼으나, 하윤은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처음 이곳을 찾으려 스스로를 공양하듯 몸을 바다에 던졌을 때와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은 그때는 머금고 들어왔던 숨이 동나기 전에 문들이 하윤을 삼켜 물에서 건져 냈다면, 지금은 계속해서 가라앉기만 했다.
숨을 더 오래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참 얄궂게도 더는 참기 어려웠다. 하윤은 물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버둥거리다가, 도리어 물을 들이켜고 말았다.
“……!”
당황하여 벌어진 입으로도 분명 물이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윤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물에서 눈을 뜰 때 특유의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몇 번 깜빡이자 시야가 잡혔다.
하윤이 달이라고 칭했던 노란 구체는 물속이 아니라 수면에 어리고 있었다. 하윤은 자신이 좇던 것이 손에 쥘 수 있는 노란 구체였는지, 노란 구체처럼 보이는 달빛인지 헷갈렸다. 헷갈릴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멍해졌다.
아늑했다.
숨을 쉴 수 있는 물은 그를 짓누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따스하게 품고만 있었다. 아무 걱정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리하여 불안하지도 않았다. 눈이 조금 뻑뻑하긴 했으나 고통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졸음이 밀려오는 뻐근함이었을 뿐.
내내 구르고 찧었던 몸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고요했다.
그가 잠시 허우적거릴 때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윤은 시험하듯 흐- 하고 신음했으나, 이 또한 없는 소리라는 양 들리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가만있고 싶었다. 이곳에 있다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찾지 못할 테니까.
“…….”
하윤은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다시금 떴다. 고요한 중에 얇은 나무패 부딪치는 소리가 이 깊은 물을 뚫고 들리기 시작했다. 하찮고 거슬리는 것이 마치 사당 안의 지방틀 문이 파닥거리는 소리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하윤은 계속 가라앉았다.
마침내 나무패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아주 멀게 들릴 때, 휴대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정말 뜬금없었다. 들려오는 소리 중에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하윤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순간, 하윤의 뜻대로 공간이 접히며 꿰뚫리더니, 그 자리에 팔뚝만 한 지방틀이 생겨났다.
지방틀은 문을 펄럭거리더니 드문드문 익숙한 목소리를 뱉었다.
[김하윤은 또 …… 안 …… 어딜 ………….]
“……?”
[전화를…… 제…… …… 없어.]
숨을 쉴 수 있긴 하지만 물속에 있기 때문일까. 지방틀 문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무경의 목소리가 어쩐지 축축하게 들렸다. 겁에 질려 달달 떠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괜히 센 척을 하려 툭툭 뱉는 것이다.
‘아, 백무경.’
자신으로 하여금 이 고생을 하게 만든 사람.
이 모든 것을 마땅히 감내하게 한 사람.
나의 조각.
그래, 나의 조각. 하윤은 조각이라는 말을 곱씹다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 그렇구나.’
무경이 자신의 조각이기에 자신은 그를 통해서야만 겨우 성찰을 했다. 물론 아주 조금의 성찰과 그 수십 배는 될 법한 고집과 이기를 부렸지만.
하윤은 지방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문을 만든 뒤로도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지방틀이 아주 작은 점으로 보였다. 그가 좇던 달 또한 고고히 수면에 어리어 있던지 그저 별처럼 반짝였다.
하윤은 웃음과 짜증을 함께 뱉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아예 이 물의 바닥에 닿아야 원하던 것을 찾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으나, 아래에 닿으면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사람이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그리고 누우면 자고 싶고 자면 일어나기 싫고.’
하윤은 [문]을 만들었다.
문지기인 그가 겨우 독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될 수 없으니까. 그러다가 자신이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무릇 문지기라면 두 다리가, 두 팔이 고생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비록 이상한 항아리 속이라 지상처럼 섬세하게 길을 조율할 수는 없었지만, 문득 이건 자신의 고생이 아니라는 이기가 떠올랐다.
하윤은 아득히 먼 하늘에 있는 것처럼 빛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저 달을 내게 가져와. 내 손이 달에 닿을 수 있도록.’
그를 집어삼켜 이곳으로 데려왔던 문들이 다시금 하윤을 뱉어 내며 멀어졌다.
[문]을 보는 눈을 가진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고 느낀다면 아주 큰 꽃송이가 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럴 만한 사람이 그 속에 있었다는 것이겠지만.
하윤은 자신을 삼켰던 [문]이 자신을 뱉고 멀어져 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달을 좇았다. 달은 하윤이 어디에 있든 내내 그의 머리 한가운데 있었다.
이제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하윤은 [문]을 재촉하길 멈추지 않았다.
하윤은 지척에 보이는 달을 향해 손을 뻗었고, 움켜쥐었다. 그는 이제 수면에 있었고 세찬 바람과 바닷소리가 그에게 쏟아졌다.
하윤은 달을 움켜쥔 손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하늘에 있던 달이 보였다.
‘아, 실패한 건가?’
분명 뭔가를 손에 쥐었는데 지금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하윤은 하늘을 향해 뻗었던 손을 내렸다.
그 순간,
파도 소리와 함께 나무패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틱, 팅, 틱딕, 틱!
오래 잠겨 있던 조그만 문을 연 듯이 탁한 소리였다. 하윤은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주변의 문을 살폈다.
‘아, 여기는.’
자신이 몸을 던졌던 곳이었다. 만들다 만 샛길의 흔적이 엉겨 있는 곳.
‘이건 뭐 부표도 아니고.’
헛웃음을 터트린 하윤은 자신의 ‘공간’을 열기 시작했다. 시험해 볼 것이 있었다. 꿈속의 자신이 그 공간 속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가면 뭔가 티가 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공간’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티가 났다. 문을 여는 속도가 빨라졌다. 예전엔 하나가 삼키면 또 하나가 삼키는 식의 간격이 짧게나마 존재했다면, 지금은 문들이 지나치게 빠르게 자신을 삼켰다.
‘공간’에 들어오자 공간을 이루고 있던 문들이 일제히 펄럭였다. 금빛으로 물든 문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금빛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하윤은 은은히 빛나는 자신의 양 손목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뭔가 얼떨떨했다. 얼굴을 쓸어내리던 하윤은 이내 물속에서 무경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또한 옛이야기 속 나무꾼이 신선들이 사는 세계에서 바둑 구경을 하다가 도낏자루가 썩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줄 몰랐던 것도.
‘돌아가야 해.’
하윤은 한걸음에 무경의 집으로 돌아간 다음, 거실 탁자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환청은 아니었던지 부재중 전화가 여럿 들어와 있었다. 어디냐는 메시지도 쌓여 있었고. 다행히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새벽 세 시.’
곧장 답장하려던 하윤은 시간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저었다. 일단 몸부터 씻기로 했다. 하윤은 젖은 옷을 벗었다. 그때 흘린 코피만큼은 환상이 아니었던지 옷이 더러웠다. 물에 흠뻑 젖는 동안에도 지워지지 않고 번지기만 했다.
피가 번진 옷을 손으로 대강 빨고, 몸도 씻었더니 어느새 시간은 새벽 네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윤은 지친 몸을 소파에 눕혔다. 눈을 감으면 이대로 기절한 듯이 잠들 것 같았다. 그때 문자 메시지 알람이 떴다.
확인하자 무경이 보낸 것이었다. 어디냐고, 대체 왜 연락을 받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윤이 자고 있었다고 답장하자, 곧장 전화가 걸려 왔다.
막상 전화를 걸어 놓고 무경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씩씩거리는 숨을 내쉬다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울음을 참는 듯한. 이상한 소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오늘 내내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잘하고 있었는데 그냥 궁금해져서.]
“뭐가 궁금했는데?”
[그냥 네가 뭐 하고 있는지. 그래서…….]
“……?”
[보고 싶었어.]
정말 이상한 소리였다. 무경이 이런 소리를 할 리가 없는데.
무경은 뒷말은 잇지 않았으나 마치 하윤을 보지 못해서 서운했다는 뉘앙스로 읽혔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존재가 무경에게 빙의라도 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윤은 멍하니 거실 한구석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할 리 없는 말을 뱉었다.
“그럼, 지금 내가 너 보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