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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29화 (129/162)

129화

하윤이 경악한 표정을 짓자 최현진은 낄낄 웃었다. 그러다가 자신만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싶었던지 하윤의 일을 물었다.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텔레포터들은 관측 포인트가 어떻게 보이는 건가요?”

“……?”

“우리가 보는 데이터랑은 아주 다르잖아요. 우리가 억지로 신비를 푼 것이라면 그쪽은 신비의 원형을 봤다는 거니까.”

“신비의 원형이라……. 뭐 그렇게까지 신비롭지는 않았는데. 그냥 제 경우를 말할게요. 선생님도 비슷하다고 하셨으니까.”

“예, 예.”

“이건 뭐 모르셔도 되는데, 텔레포터랑 점퍼랑은 능력의 계열이 좀 달라요. 점퍼는 전송 대상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유체로 이동한 다음, 도착지에서 재구성해요. 그만큼 전송 대상의 손실 위험이 크죠. 반면 우리는 문과 문을, 공간과 공간을 일정한 통로를 이용해 오가거든요. 이렇게 보면 마냥 점퍼가 손해인 것 같지만, 그 대신 점퍼는 전송을 하는 데 제약이 없어요. 반면 텔레포터는 통로를 이용하다 보니 이동하는 공간의 제약을 받는 편이죠.”

“제약이요?”

“특히 기존에 만들어진 공간을 이동할 때는 자격이 필요해요. 이렇다 저렇다 딱 수치상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요. 생각해 본 적도 없긴 한데, 다른 텔레포터들은 그냥 보면 안대요. 딱 보면 저긴 내가 온 힘을 쥐어짜면 갈 수 있겠구나. 여긴 감히 가지 못하겠구나. 아예 못 가는 곳은 보이지도 않는다고도 하고.”

“감히 못 가는 곳이랑 아예 못 가는 곳의 차이는 뭐죠?”

“그러게요. 선생님께 듣기로는 감히 가지 못하는 곳은 함부로 들어갔다간 사지가 온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라 괜히 호기심 가질까 봐 깊이 이야긴 안 해 주셨고요.”

“몸이 성하지 못한다는 부분만 빼면 비행기 탑승하는 것 같네요. 여기는 비즈니스석 저기는 퍼스트, 또 다른 곳은 이코노미석같이 좌석이 분류된.”

“맞아요. 그런 느낌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일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그 공간의 출입문을 [문]이라고 불렀어요. 정말 우리 눈에는 문으로 보였거든요.”

“문이요? 저런 출입문?”

최현진은 사무실의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런 문으로 보였어요. 게임이나 영화에서 보면 포털이라고 해서, 신기한 빛이 나는 곳으로 나오지만, 텔레포터들이 만든 문은 자기가 머릿속에 넣고 있는 가장 익숙한 문의 형태로 남는다고 해요. 저는 선생님과 함께 살았기에 선생님과 제 문의 모양은 똑같았죠. 그냥 사각 네모난 방문, 동그란 나무 손잡이.”

“그 공간이라는 건 뭔가요?”

최현진의 물음에 하윤은 종이를 접었다. 접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을 문으로 설명한 뒤, 펜으로 종이를 뚫었다.

“앞뒷면이 각기 공간의 시작이자 끝인 [문]이고, 뚫린 두께가 길이며, 이 전체를 우리가 말하는 공간이라고 보면 돼요. 길의 길이는 문과 문의 거리가 멀수록 길어지지만, 일정 비율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그걸 ‘길을 잘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고, 이 길을 잘 내려면 타고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뭘 타고나면 길을 잘 내는 건지 몰라서 여쭌 적이 있는데 하다 보면 알 거라고 하셨었죠.”

“그건 말이 좀 이상한데요? 타고나는 거라고 하셨는데, 뒷말은 노력하면 된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때 제게 부족한 건 경험밖에 없었기 때문이겠죠. 자질은 워낙 타고났기에.”

“에이!”

하윤은 사실을 말했지만, 최현진은 농담으로 알아듣고 손에 쥐고 있던 풀을 흔들며 야유했다. 하윤은 따라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최현진을 마주하고 있었으나 신경은 사무실 입구 파티션을 짚은 채 자신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는 다른 직원에게 쏠려 있었다.

“어쨌든 타고나지 않으면 길을 내는 게 조잡해진대요. 자기가 길을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돌아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이 길과 길 사이를 터서 거리를 좁힌 걸 말 그대로 ‘샛길’이라고 불렀어요. 아예 쌩으로 공간을 내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아요. 계속 오가면 또 다르지만. 아마 여기 있는 좌표들은 일반 [문]보다 샛길이 많을 거예요. 공간과 공간을 잇는 것이기 때문에 점점 개미굴 같아지니까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명부를 쓰신다고 하셨죠.”

“그럼 텔레포터들이 낸 문과 미궁은 뭐가 다릅니까? 듣기로는 둘 다 문으로 보인다고 들었는데.”

입구 파티션에 기대고 있던 다른 직원, 이상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 미궁을 직접 본 적은 한 번밖에 없고, 정기적으로 짧게 열렸다가 사라지는 문들은 자주 봤는데…….”

“…….”

“그런 것들은 아주 오래된 문이었어요. 절에서나 볼 법한 쇠 장식이 들어간 나무 문이나 철문이었죠.”

이상일은 미간을 긁적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흐…….”

“……?”

“그 있잖습니까. 대체로 통일되었다는 부분이 신경이 쓰이는데. 문은 만든 사람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가장 익숙한 형태라고 했잖습니까?”

“예, 그랬죠.”

“그럼 그런 문들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문이라는 겁니까?”

“글쎄요. 음, 질문이 조금 이중적으로 들리는데. 그래도 대답하자면 인위적으로 만든 문이냐는 질문에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

“다만 ‘막아야 하니까’ 만들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정기적으로 괴수 넘어온 건 [문]을 통해 세계가 겹쳐졌을 때, 그 틈새로 괴수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건 문이 아예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낡았을 뿐인 거죠.”

이상일은 뭔가를 생각하듯 파티션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하윤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최현진이 대신 설명했다. 이상일은 머리가 정말 좋은 사람으로,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서 한 번 본 것도 곧잘 떠올린다고 했다.

다만 떠올리는 과정에서 입으로도 좀 중얼거려야 했는데, 조금 무서워도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시계는 다섯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때마침 서 주사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굳은 표정이 역력했고 이 새끼와 저 새끼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이상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휴, 저긴 또 시동 걸렸네.”

“아, 오셨어요.”

“아휴, 아휴우.”

서 주사는 하윤의 인사를 반갑게 받으려다 말고 추임새만 반복했다. 아무래도 이름을 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하윤은 임시 출입증을 그가 보기 편하게 돌렸다. 곁눈질로 이름을 확인한 서 주사는 다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오늘 좀 어땠어요? 정신없었지? 신경을 많이 못 써 줘서 미안해요.”

“아휴, 아닙니다. 괜찮았습니다.”

서주사는 대강 사과하다가, 내일은 최현진을 붙여 주겠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설명해 주고, 프로그램에 있는 내용 중에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하라는 식이었다. 뭐라도 기록이 있어야 하는 데다, 거추장스러운 신입을 짬 때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윤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저도 좀 궁금하던 차였다. 왜냐하면 스승 서이주가 남긴 컴퓨터에 비슷한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응?”

“무슨 생각하는 중이길래 몇 번을 불러도 못 들어?”

“아, 별거 아니야.”

“그래서 그게 뭔데.”

“그냥……. 그냥 생각하는 대로 될까 싶어서. 그게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러면 또 그게 잘 될까 싶은 거. 설명하려니까 잘 안 된다.”

하윤은 서이주의 컴퓨터에 남아 있던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일단 되는대로 백업해서 갖고 있긴 한데 그게 제대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선생님 컴퓨터로 돌려 봐야겠지. 내 컴퓨터로 했다가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하윤은 그 프로그램이 서이주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한 연구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윤은 이미 서이주의 유산을 다 훑어보았고, 더러는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으며, 또 더러는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그녀가 말했던 연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보이는 자료가 없었다.

고문서나 어딘지 다른 전래동화 같은 건 그냥 자료 수집이지 연구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서이주는 서이주라는 이름값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와 함께 연구했던 자들도 그냥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릴 땐 용돈 주는 사람들일 뿐이었지만.’

이주미의 모니터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 선생님이 말한 연구의 결과는 저런 형태이겠구나.

물론 본인이 세상에 없으므로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일단 집에 돌아가면 바로 확인해 봐야겠어.’

만약에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그것이 정말 서이주가 말했던 친구들과의 연구 결과라면 하윤이 찾는 팔찌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을 것이다. 아니,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만 있으면 된다.

하윤은 이주미가 자료를 입력하던 화면과 최현진의 설명을 떠올렸다. 그런 다음 백진하가 찍었는지, 서이주가 찍었는지 모를 바다 사진을 생각했다. 자신의 짐작대로라면 팔찌는 사진 속 망망대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손에 넣는다면 장소를 특정해 내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문의 궤도를 구현해 낼 수 있으리라. 물론 시간적 여유가 없어 굵직한 것들만 겨우 만들겠지만.

다만 이런 생각을 무경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직 닥치란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미 들은 것처럼 입술이 붙었다. 하윤은 숨죽여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차창 밖을 응시했다.

“……오늘 어땠어?”

“응?”

“오늘 어땠냐고.”

“……그냥 그랬어.”

“뭐가?”

계속 이어지는 대화가 불편했다. 하윤은 무경을 흘깃 바라보다가 자기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내내 깨물고 있었던 탓에 입술 껍질이 일어났다.

“아주 바쁘더라. 네가 말했던 것처럼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같았어. 썩 달가워하지는 않던데, 어떻게 밀어 넣은 거야? 나중에 혹시 문제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무슨 문제?”

“부정 취업 청탁 같은 거.”

“정식 취업도 아닌데 뭐 어때. 어차피 그쪽은 뭐라도 애쓴 흔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너도 가서 열심히 할 생각하지 마. 그쪽도 바빠서 별로 원하지 않을걸.”

“그래, 그런 것 같더라.”

“괜히 잘해서 발목 붙들리지 말고.”

“……?”

무경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하윤은 무경을 힐끔 바라보다가 다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럼 좋지. 공무원 되는 건데. 꼭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나랏일이라 월급 안 밀리고 잘 나올 거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대충 알고 싶은 것만 알아내면 손 떼. 그리고 이제 다 왔어, 내려.”

“……여기서 내리라고?”

“밥 먹어야지. 저기 정식 괜찮아. 가서 먹고 와.”

“됐어.”

“됐기는. 가서 먹고 와. 너 나랑 있으면 못 먹잖아.”

“그래서 못 먹겠다는 거야. 밥 먹고 나면 같이 있어야 하잖아.”

무경은 대답 없이 핸들만 노려보다가, 이내 차를 돌렸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도착한 뒤까지 둘 다 입을 떼지 않았다. 몸을 짓누르는 듯한 침묵이 무거우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이것이 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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