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24화 (124/162)

124화

실마리가 너무나 반가웠던 나머지 하윤은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찾으려 했다. 해변 사진이 있던 것을 짐작하여 타임캡슐이 묻혀 있기도 했던 서해를 떠올렸다. 머릿속 천체같이 드리워진 좌표 중 서해에 관련된 것들이 하윤의 의지를 따라 나왔다.

그러나 서해 곳곳에 자리한 문들을 살피던 것도 잠시, 정신보다 육신이 먼저 무너졌다.

다시금 바닥에 드러누워서는 바닥을 닦은 셔츠로 코를 막았다. 슬쩍 떼서 보자 다시 피가 보였다. 하윤은 어지럼증이 잦아들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잠들지 않으려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정리는 하고 자야 해.’

혹시나 무경이 올지 몰랐다. 아직 연락은 없었으나 오늘내일 중으로 올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재차 휴대전화를 확인했으나 연락은 없었다. 하윤은 오늘 오는지 물어보려다가 멈췄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답장을 위해 애쓸 필요가 있나 싶었다.

‘내일 오면 좋겠는데.’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얄궂어서 꼭 이럴 때 오기 마련이었다. 하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과 바닥을 닦은 셔츠와 티슈를 [문] 틈새에 던져 놓고 욕실로 향했다. 찬물을 틀어 얼굴을 씻다가,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가만히 있는데도 몸이 앞뒤로 흔들거렸다.

‘아직 할 게 많은데.’

해야 할 게 아직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하윤은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열었으나 잠을 쫓진 못했다.

차라리 잠깐 잘까 싶었으나 경험상 이럴 때 눈을 감으면 평소와 같이 짧게 자지 못했다. 다만 불면인의 잠이란 한고비만 넘으면 버틸 수 있다. 하윤은 찬물 줄기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꼴에 물을 아낀답시고 욕조 배수구를 막자 물이 금세 차올랐다.

그동안 하윤은 자신이 해야 할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직접 서해에 가 봐야겠다. 진작에 떠올렸으면 좋았을 텐데. 무경이 오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역시 한국대에 갈 머리는 아니었나 보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는 건지. 따로 연락한 것도 아닌데.’

조각이라서 아는 걸까?

‘현재는 조각으로 인식하는 것도 아닌데.’

어떨 때 보면 무경은 자신에게 위치 추적기를 심어 놓은 것 같았다. 물론 얼마 전에 자신의 휴대전화에 설치하겠다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설치해 봤자 잠시 놔두고 가도 되고.’

오히려 지금처럼 감에 의존하지 않고 기기를 사용하면 위치를 속이기 수월해진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무경도 안심하고 자신도 움직이기 좋고.

‘그래 그렇게.’

하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편하게 자세를 고치고 눈을 감았다.

‘서둘러야 해. 이대로 무경이를 내버려 두면 결국 괴수에게 잠식당하고 말 거야.’

늘 그렇듯 마음이 바빴다. 정확하게 언제 잠식당할는지 속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물이 언 호수에 선 것 같았다. 보기에는 단단해서 그 속이 가늠되지도 않으니, 안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경의 공포가 이루어지는 것도 신경 쓰였다. 정필용처럼 그가 괴물이 될까 봐.

‘원을,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는 것을, 두려움을 실체화시킨 건 잠식 전일까 잠식 후일까? 왜 그런 과정이 필요한 거지? 정신계 능력자들이 친한 척하거나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것처럼 정신에 더욱 잘 파고들기 위해서일까?’

대체 뭘까. 하윤은 고민을 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잠들지 않고 잘 버텼다.

‘만약에 괴물이 두려움을 실체화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경의 공포는 세상이 부서지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오직 하윤 자신과 관련이 있었다. 대체 자신은 무엇을 했길래 무경의 공포를 건드렸고 그의 안에 있는 괴수를 일깨웠는가. 그것을 알아낸다면, 그래서 자신이 대신 그 두려움을 이루어 버린다면 괴수는 무경을 삼키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차라리 내 몸속으로 가둬 버리는 건.’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기절하듯 잠들었기 때문에, 아니 정말로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질긴 명줄에 이끌려와 눈을 떴을 땐 성난 무경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손에 건져져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하윤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무엇이 무경을 두렵게 하는지 시험해 보자고.

◇◇◇

무경이 무엇을 싫어했던가. 자신이라면 덮어놓고 싫어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조금 달랐다. 어느 부분은 묘하게 무르고 또 다른 부분은 이전보다 날카롭게 굴었다.

‘아니, 지금 무경이 기준으로 물으면 안 돼.’

괴물을 가뒀던 열일곱의 무경을 기준으로 한 질문이어야 했다. 당시 무경은 김하윤이라면 일단 덮어놓고 좋아했다. 싫어하는 것도 어지간하면 티 내지 않았다. 싫은 말 하기 이전에 알아서 뒷수작을 부리거나, 몇 번 참아 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 것을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싫어했는데.’

그때의 무경은 질투가 많았다. 하윤의 주변을 경계하고 그에게 쏠리는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주목받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하윤에게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때 왜 그랬냐면…….’

하윤은 무경이 부담스러웠다. 어차피 평생을 갈 인연이라면 한 십 년 정도는 다른 사람과 만나 봐도 되지 않을까? 너무 일찍이 운명을 만난 탓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 보고 운명을 확신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들 이미 운명을 만났으니 다른 사람은 만날 필요도 없다고 하니까 괜히 심술도 났다.

자연히 하윤의 심술은 무경을 향했다. 사랑을 말하려는 그의 입을 막고 아직은 친구로 있고 싶다고 했다.

‘그럼 뭘 떠봐야 할까. 괴물을 깨웠다고 했던 날 했던 이야기 중에 싫어할 만한 걸 고르면 다른 사람 이야기한 거랑 신체 접촉 밀어냈던 거. 그리고…….’

도망치려고 했었다는 말.

개인적으로는 몹시 찔렸지만 어쨌건 미수로 그치지 않았던가. 설령 무경이 그때 사실은 깨어 있어서 들었다고 한들 별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

그러나 어째 미수로 그쳐서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윤은 망설이다가 무경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안부를 물었다가 면박만 당했다. 욕조에 잠들어 있던 것을 다른 의미로 오해한 것 같았다. 뭘 오해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화가 나 있었다.

하윤은 그가 앉은 소파 끝에 앉았다가, 눈치가 보여 소파의 옆에 앉았다. 무경이 곧장 뭐 하느냐고 쏘아붙였고, 말을 잇다가 자연스레 그가 싫어하던 것들을 집어넣었다.

미리 생각했던 것뿐만 아니라 요즘 싫어하는 것도 뒤섞었다. 어떻게 말하나 싶던 것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무경이 볼 땐 욱해서 쏘아붙이는 걸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집에 가는 것, 다른 사람을 거론하는 것, 무경을 밀어내는 것.

다만 전부 말하기도 전에 무경이 집을 뛰쳐나갔다. 홀로 남겨진 하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속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속이 따끔거렸다.

자꾸만 집을 나서기 전 잠시 봤던 무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인데, 평소라면 보자마자 덜컥 속이 내려앉아 겁먹었을 얼굴이었는데.

‘하필 사진을 봐선.’

조각난 사진엔 무경의 모습이 없었음에도 하윤은 당시의 무경을 떠올렸다. 아마도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을 모습을.

“…….”

밖으로 뛰쳐나간 게 자신과 동갑인 성인 남자가 아니라 어린애가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를 모진 말로 상처 입힌 것만 같았다. 밀려드는 죄책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 코가 석 자라고,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같잖은 짓 그만하고 정신을 차리라며 자신을 다그쳤다.

‘지금 생각할 건 그런 게 아니야. 무경이가 대체 뭘 무서워하는지 그걸 알아야 하는데!’

섣부르게 굴다가 일을 그르친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때 뭔가가 툭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들린 곳을 살피자 복도에 백화점 쇼핑백과 거기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이는 과일이 보였다. 제철 과일이라기엔 때가 조금 일렀다. 맛이 제대로 돌긴 돌았는지도 모르고 크기도 작았다.

하윤은 몸을 숙여 과일을 집으려다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굴러간 과일을 모아 쇼핑백에 넣었다.

주방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마른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며 거친 숨만 씩씩 내쉬었다. 조금 있다가 말할걸. 암만 급하더라도 내일쯤 이야기할걸.

“씨발, 돌대가리.”

그러나 그 와중에도 뭘 가장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는 게 짜증이 났다.

무경은 자신이 집에 있길 바랐다. 굳이 자기가 집을 나가 버린 게 그랬다. 이전 같았으면 진작 하윤부터 끌어냈을 것이다. 하윤이 고백했다가 내쫓겼을 때가 그랬고 그 외에 다른 일에서도 그랬다. 복도에 있어서일까. 복도에서 무경의 손에 의해 끌려 나가던 느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디서 부딪히고 어디서 버텼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현관으로 떨쳐지고 문밖으로 밀려났는지.

“…….”

하윤은 힘없이 고개를 떨궈 무경이 사 온 과일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하윤은 과일을 피해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어 소파 머리를 잡은 채로 가만히 서서 무경을 찾았다.

주차장, 차를 빼 오면 거쳐 가야 하는 길목, 도로, 암묵적으로 갓길 주차를 허용하는 길 등. 무경은 멀리 가지 않았고 하윤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무경을 찾았다. 고정된 위치에서 문을 여는 것은 이제 하윤에게는 숨 쉬기보다 쉬웠다.

무경이 있는 차 안으로 [문]을 만들고 아주 살짝 열었다. 들려오는 울음에 하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온 내장이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결국 견디다 못해 문을 닫고서 애먼 거실만 서성였다.

그 와중에 비는 또 왜 오는지.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결국 마음이 허물어졌다. 저걸 듣느니 차라리 몇 대 맞는 게 낫다 싶었다. 이제 능력도 돌아왔겠다 집 밖으로 나가라고 쫓아내도 괜찮았다. 걔가 우는 것보다.

그게 나았다.

하윤은 겉옷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구겨 신으며 우산을 챙겼다.

‘제정신이 아닌데.’

속 갑갑한 미친 소리라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마음을 정리했다고 해 놓고선, 이제는 줄 것도 없고 있다고 한들 주지도 않겠다고 했으면서, 한번 버린 거 한 번 더 못 버리겠냐고 했으면서.

벌컥 열린 현관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무경을 보는 순간, 아직도 젖은 눈을 보는 순간에 생각하고 만 것이다.

“…….”

그래도 사랑을 하는구나.

내가 너를 아직도.

사랑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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