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22화 (122/162)

122화

“하지만 그렇다기엔 당시에 봤던 광경이 꼭 말 그대로 원을 들어주는 느낌은 아닌 것 같고. 당시 일을 겪었던 분들의 증언을 듣고 싶어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럼 박윤진 씨가 부르지 않았겠죠. 저도 박건영 씨가 와서 조금 놀랐습니다.”

“왜요? 의외라서?”

“아뇨? 제 예상이 맞아서요.”

“…….”

“당시 부상자들의 상태를 생각하면 정신을 만질 필요가 있었을 거고, 그러기 위해선 정신계 능력자가 필요하죠. 전에 박건영 씨는 직접 높은 분들 모신다고 했었고, 그러려면 어디서든 능력을 입증할 자리가 필요했을 거잖아요? 박건영 씨 나이를 생각하면 뭐 대충 시기가 맞지 않나?”

“억측이 많네요. 제가 몹시 뛰어나서 그렇게까지 인정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면요?”

“그래서 나이가 걸리는 거예요.”

“…….”

“일단 나이 지긋한 분들 취향이 있잖아요? 정신계 계열 특유의 세상을 통달한 느낌 그런 거. 박건영 씨는 끽해야 내 또랜 것 같은데, 의상을 노티 나게 입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거면 쓸모를 입증했다고 봐야지. 그렇다고 매우 뛰어난 능력이라면 지금 전화 한 통으로 절 만나고 있으면 안 되겠죠. 저기 뭐 어디냐, 지리산이나 파란 지붕에 갔겠지.”

그게 아니면 때가 맞아야 만날 수 있다는 김옥림처럼 나타나든가. 하지만 눈앞의 박건영은 그 정도 깜냥은 되어 보이지 않았다.

‘됐다면 처음 봤을 때 암시에 성공했겠지.’

박건영은 셔츠 단추를 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맡은 사건이 그 건이 아닐 수도 있고, 그리고 제가 왜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해야 합니까?”

“그것도 전화 한 통에 나오면서 할 소리는 아니잖습니까?”

안 할 거면 나오질 않았겠지. 하윤의 말에 그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벤치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선배 전화만 아니었어도……. 박윤진 전화면 뭉갤 수 있었는데. 하, 그래서 나한테 바라는 게 그 정보를 갖고 와 달라?”

하윤은 박윤진이 어떤 말을 했는진 알 수 없었다. 다만 박건영이 자신을 돕게 설득해야 하는 건 박윤진의 일이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알아서 세팅 잘해서 보냈겠지.’

본인이 힘을 썼건 박건영이 말하는 선배에게 말을 보태 달라 말했든 간에 말이다.

“가지고 오면 좋은데, 그러다가 그쪽이 잡히면 곤란해지니까. 융통성 있게 알아서 잘?”

“무슨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진 모르겠는데 자료 반출이 진짜 쉬운 게 아니에요. 내가 옷 벗어야 할 수도 있다니까. 그러니까 대충 물어봐요. 그럼 내 기억나는 대로 말해 줄 테니까. 그리고 이건 양념 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은 깊이 파진 않았어요. 내가 맡은 게 고작해야 서너 건? 워낙 관련된 분들이 많아서 덮기 바빴거든.”

“아, 그럼 이렇게 쓸데없이 만날 필요도 없었는데.”

“됐고, 빨리 물어봐요. 점심시간에 잠시 나온 거라 시간도 없어.”

하윤은 십 년 전 사건에서 살아남은 초능력자들의 공통점이 있는지 물었다.

“공통점이라긴 뭣한데, 일단 육체 계열이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정신 계열은 뭐……. 몸은 멀쩡한데 뇌가 곤죽이 된 경우가 많더라고.”

“실제로?”

“실제도 있고, 의미상 그런 것도 있고. 곤죽 된 것처럼 백치가 된 사람들이 몇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았으니까 오히려 그 사람들이 잘된 케이슨가 싶기도 하고. 뭐 이렇다는 건 정신 침식이 있다는 소리니까. 원래 정신 계열이 이런 공격을 힘들어하잖아요? 가뜩이나 예민한 애들이니까.”

“…….”

“그중 제일 나은 건 백무경 씨겠네요. 특정 기억만 소거되었으니까. 그 부분은 아마도 방어 기제가 작용한 것 같은데. 사실 정확한 건 아녜요. 그분 정신은 진짜 우리 쪽에서 건들 수가 없었어. 오히려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안 건든 이유는 김하윤 씨도 잘 알지 않습니까?”

“내가요?”

“백무경 씨는 사건 직후 몸을 회복하자마자 조각을 찾았잖아요? 그 말인즉 당신을 찾았다는 소린데, 결국 당신은 백무경 씨 곁에 있었으니까 따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건드려서 뭐 합니까.”

“뇌가 곤죽이 되는 경우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공포.”

“…….”

“그래, 공통점이라면 그런 것도 있겠네요. 살아남은 이들 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기억이 비교적 멀쩡한 사람이 몇몇 있기는 했죠. 그들은 각기 세상이 불타는 것, 건물이 물에 잠기는 것, 혹은 땅이 가라앉는 것. 세상이 망하는 환상을 아주 다양하고 생생하게 겪었다고 했죠.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환상을 겪었습니다. 이게 뭐겠습니까?”

“개개인이 가진 공포를 자극했다?”

“예. 통상적인 공포를 불러오는 환상을 일괄적으로 부여한 게 아니었던 겁니다. 정신에 침투해서 그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걸 보여 줬다는 거겠죠. 정신계 괴수 중에선 드문 패턴은 아니죠. 범위가 굉장히 넓고 깊은 것만 빼면. 심지어 시전 시간도 짧죠. 거의 등장과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원을 이루어 주는 괴수라는 이름은 조금…….”

하윤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눈썹을 긁적였다. 박건영 또한 마주 이마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거시기하죠.”

“확실히 거시기하네요.”

“아니,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네요. 바라지 않음을 원(願)하는 거니까.”

일반적인 바람이 아니다.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는 것에 관한 바람이다. 개개인에 있어 세상 어떤 일보다 이루어져선 안 될 일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간다는 박건영을 보낸 다음 하윤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사건이 있은 후로 십 년 동안이나 알 수 없었던 일이 십 분도 안 되는 사이에 풀렸다.

‘원을 이루어 주는 괴물이 무경이의 정신에 침투했고, 무경이가 가진 공포를 자극했다. 그래서 방어 기제로 내 기억을 지웠다.’

괴물이 직접 기억을 지우진 않았을 것이다. 영향을 아예 끼치지 않았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섬세하게 움직이진 않았으리라.

‘무경이가 맞서고 있었고 내가 문을 닫고 있던 차에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순 없었을 거야. 하지만 무경이가 그놈의 일부를 자기 몸에 가두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해.’

김옥림이 석불을 자신의 몸에 모셨듯 무경 또한 원을 이루어 주는 괴물을 뒀다. 차이는 한쪽은 모시고 있고 한쪽은 고개도 못 내밀게 가둔 것이지만.

‘어쨌든 몸에 갇힌 뒤에는 시간이 있었으니 그때 작업을 한 걸까? 아니야. 그래도 시간이 안 맞아.’

당시에 무경은 김득철과도 대치하고 있었다. 이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냥 깊이 생각하지 말고 무경이가 기억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고만 생각하자. 너무 복잡해지니까.’

일단 기억을 잃은 것을 보아 무경의 두려움은 하윤 자신과 관련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무경의 공포이고, 어떻게 그것을 자극한 걸까.

하윤은 전치우가 자신을 보고 왜 깨어나게 했느냐고 소리쳤던 것을 생각했다. 그날 자신이 무경의 공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행동을 했다는 건데, 도무지 뭘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자신이 한 것이라곤 의식 없는 상태의 무경을 달래며 넋두리를 한 것밖에 없었다.

‘정신이 있어야 뭐 대화를 하거나 자극을 하지.’

그렇다면 무경이 깨어 있었나? 순간 섬뜩해졌다.

‘깨어 있었다고 해도 그때 내가 뭘 했다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날 자신의 잘못을 토로했던 게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밀려드는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하윤은 거실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TV를 틀었다. 집 안의 침묵에 짓눌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리가 맺히기 무섭게 채널을 돌리다가 문득 뉴스 채널에서 손이 멈췄다. 무경에 관한 소식이었는데, 정확하게는 수해가 있었던 지역에 왜 최선의 배치를 하지 않았느냐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아나운서 뒤의 CG 배경에 누가 봐도 무경인 듯한 실루엣이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얼굴 반 정도는 얼핏 보였다.

‘얘는 또 왜 까이고 있냐.’

무경은 정신 침식의 이유로 자진해서 격리 시설에 들어갔다. 이 시설은 폭주할 경우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지하 벙커에 있었다. 이 시설은 최대 97퍼센트까지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데다가, 아무나 입원할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올해 들어 입소 대기자들만 30퍼센트가량 증가했는데, 무경은 대기 없이 바로 입소했다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확실히 특별 취급한다고 뭐라고 할 순 있겠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백무경이 터지면 어떻게 잡으려고?’

특별 취급할 만해서 한 것 같은데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 편을 든다. 하윤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다가 인터넷을 검색했다. 특별한 검색 스킬이 없어도 백무경 이름 석 자만 쳐도 많은 글이 떴다.

하윤은 그중 ‘현재 백무경으로 개지랄난 이유.’라는 제목을 눌렀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었지만 내용은 평범했다. 가장 먼저 정부에서 무경을 길들이려고 한다는 이유가 있었는데, 무경의 의무 복무 기간이 한참 전에 지났고 현재 드러난 부동산 보유 현황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또한 그가 미혼인 것도 문제로 삼았다.

군대에 속한 초능력자 특성상 본인이 연금을 타는 경우보다 유족이 연금 탈 일이 많은데, 가족이 있는 경우 이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다만 가족이 없는 경우에는 안 그래도 짠 군인 급여에서 쓸데없이 나가는 돈이라는 인식이 컸다.

‘이 부분은 돈으로 사는 충성이 해당 안 된다는 거겠지.’

정리하자면 현재 목줄이 없는 무경을 잡아 두기 위해서 없던 문제도 만드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논란을 부추기고, 그 한가운데로 내몰고.

반대 의견에는 이미 의무 복무가 끝난 그를 사설 길드에서 영입하기 위해 논란을 부추긴다고 했다. 업계피셜 이직 기간이라는 긴가민가한 댓글도 달려 있었다.

‘그런데 무슨 개지랄이 난 건데?’

글에 붙어 있던 링크를 누르자 무경에게 삿대질하는 노인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달려들 듯이 나아가며 쌍욕을 퍼부었다. 인터넷 방송이다 보니 그 소리를 여과 없이 내보내다 못해 자막까지 달려 있었다.

[이 씨팔 놈아! 네가 죽인 거야 이 개새끼야! 개새끼 네가 처디비자느라고 내 새끼가 죽었다고! 이 쌍놈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내 세금으로 밥 처먹고 옷 해 입고 살아? 어? 네가 사람 새끼야!]

[어르신 진정하세요! 그만하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그러면 어디서 그러는데? 여긴 대한민국이고! 자유가 있고! 내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너희가 뭔데 막아? 놔! 안 놔? 놔 이 시팔 놈아!]

도리어 놓으면 안 될 것같이 말리는 사람을 잡고 있으면서 몸만 무경의 일행이 있는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반면 무경은 노인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눈짓 한 번이라도 할 법한데 정말 신경을 한 톨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는 게 맞으리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연신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영상 후반부에는 주민 인터뷰가 붙었다. 난동을 부린 노인이 해당 지역 주민도 아니며 수해 이후 지역을 방문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세상 참.’

하윤은 몇 가지 글을 더 살펴보다가 무경이 파견 간 수해 지역에 관해 의문을 제시한 글을 발견했다. 정부에서 해당 지역의 정보를 제한하고 촬영을 금지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해당 지역에 숨겨야 할 정부의 비밀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는 사건 현장이라며 화질이 개박살 난 위성 사진을 띄워 놨는데, 어째 괴수의 모습이 이상했다. 민물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초롱아귀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초롱 대신 사람의 상반신을 달고 있었다.

글에선 먹다 남은 것이라고, 혹은 이에 낀 것이라는 드립이 달렸다.

‘어째 낯이 좀 익은데.’

누구였더라.

‘선생님 손님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이주의 손님은 아니었다. 각 잡힌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백진하 쪽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은근슬쩍 무경에게 용돈을 더 줬었다. 그 돈이 하윤의 주머니로 들어오는 것을 모르고.

‘그때 무경이 돈은 다 내 거였지 뭐.’

“아, 생각났다. 필룡이 아저씨. 정필용.”

하윤은 자연스럽게 전화를 들어 박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정필용의 근무지 이력을 물었다. 박건영은 이런 거 시키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정필용의 이름을 되뇌다가 돌연 “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한국 땅 진짜 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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