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대체 뭘 했길래 깨어나게 했습니까! 더 버틸 수 있었는데, 하루라도 더 늦출 수 있었는데!”
대체 왜 금기를 어겼는지 묻는 전치우의 물음에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은 이야기였다. 자신이 대체 뭘 어겼는가. 아니면 자신이 아닌 같은 사주의 다른 사람을 짚는 것인가. 다만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이 상황이 망했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윤은 벽을 짚고 선 김옥림을 응시했다. 눈을 감싼 붕대가 벌겋게 젖다 못해 볼 아래로 핏물을 떨구고 있었다.
하윤은 재앙이 닥칠 때마다 피눈물을 흘린다는 석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김옥림이 석불을 자신의 몸에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동화에 나오는 피눈물을 흘리는 석불을 본 노인처럼 세상이 무너진다고 난리를 피울 순 없었다. 이대로 정말 재앙이 일어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나는 그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김옥림의 애동제자와 전치우가 기함하며 말렸으나 김옥림도 하윤도 물러서지 않았다.
“보통은 점 보고 나쁜 일이 있으면 액땜해서 운명을 피하던데 그런 건 안 됩니까?”
저야 죽을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지만, 저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무경이 마음에 걸렸다.
“운명이 괜히 운명이 아닌데, 수많은 삶을 짊어진 운명이 쉬이 바뀌겠습니까?”
“그래도 바뀔 수 있다는 거죠?”
김옥림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하윤이 재차 채근하듯 묻자 옆에 있던 김옥림의 애동제자 박윤진이 대뜸 대답했다.
“바꿀 수는 없어요. 조금 트는 게 고작이지. 운명은 어떻게 해서든 닥치고야 마니까.”
하윤은 대답한 박윤진을 돌아보았다. 유독 까만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덤프트럭에 정면으로 치이는 것보다 일 톤 트럭에 치이는 것이 살 확률은 높지 않겠습니까.”
“…….”
“나는 그거면 돼요. 그럴 수 있다는 거죠?”
박윤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세 명을 응시했다. 하나는 웃고 있고 하나는 파랗게 질려 있고, 다른 하나는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어찌 피하려고?”
예전에 김옥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싹 마른 지푸라기처럼 활활 타오를 운명. 많은 사람을 구하다가 죽을 팔자라면 이미 많은 사람을 구한 것도 일종의 액땜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무경은 살 수 있을 것이다.
본디 무속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의지키 위해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윤은 자신이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었다.
“어떻게든 해야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그런데 혹시…….”
하윤은 아직도 파랗게 질려 있는 박윤진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
“높은 분이랑 잘 아시는 분 없습니까? 그러니까 자료를 좀 모아야겠습니다. 원을 이루어 주는 괴물에 관한 정보가 필요해요. 정확히는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 아니. 초능력자들에 관한 정보요.”
이런 일을 자신 혼자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윤은 눈앞에 있는 세 명과 눈을 마주했다. 물론 하나는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그러다 문득 스승 서이주의 예언이 떠올랐다.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제자를 들여서 짬을 때려라.
물론 고인의 유지를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으나,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윤은 자신이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짐을 나눴듯 눈앞의 세 명도 정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짐을 나누면 된다.
◇◇◇
하윤이 그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은 것은 그날 괴물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현장에 있었음에도 하윤은 괴물의 공격에 침식당하지 않았다.
‘능력의 특성상 정신 침식이 잘 안 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렸을 적 암시를 걸 때도 잘 걸리지 않아 서이주가 아주 애를 먹었다. 신뢰 관계와 암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녀를 도와 암시를 걸어 주었던 능력자도 힘들었으리라.
‘차라리 나도 공격에 당했다면.’
그랬다면 지금같이 갑갑하진 않았을 것이다. 서울이 없어지고 자신도 목숨이 붙어 있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지, 어쩌면 나는 살았을지도?’
하윤은 자신의 생각에 코웃음 쳤다. 하지만 은근히 일리가 있었다. 괴물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지 않았을까 싶었으니까.
“……도망이라.”
하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강가의 경치가 아주 멋있어졌다. 수면에 햇살이 부서져 빛이 흐르는 것 같았다. 눈이 부셔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을 때쯤 익숙한 투덜거림이 점차 가까워졌다.
“아니, 김하윤 씨 대체 뭡니까?”
“아, 연락한 게 대체 언젠데 이제 오세요? 시간은 금인데.”
하윤은 시계를 차지도 않은 손목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박건영을 나무랐다. 박건영은 특유의 뺀질거리는 얼굴로 하윤을 바라보았으나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자세를 고치더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오늘은 렌즈를 안 끼고 오셨네요?”
“미세먼지 때문에 눈이 뻑뻑해서요.”
“다른 용건은 아니고요?”
휘적휘적 걸어온 박건영은 근처 벤치에 앉았다.
“대체 누나랑은 어떻게 연락한 겁니까?”
“인연이 닿았나 보죠.”
“아, 잠깐. 발음 조심해 주세요.”
“…….”
“그리고 시선 처리 조심해 주시고요.”
하윤은 삐딱하게 서서 박건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뺀질거리는 얼굴이었으나 묘하게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무경이 예민하게 군다는 이유를 댔지만, 도무지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궁색한 변명이었다. 하윤은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지난번 만남에서 집요하리만치 눈을 맞추던 박건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 첫 만남에서 하윤의 감각을 차단하기 위해 능력을 쓰려고 했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반동이 세게 왔었나 보네요?”
“네?”
“그래서 고생 좀 했나 본데.”
“하!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윤은 박건영에게로 다가가 몸을 숙여 앉아 있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동공을 응시하는 순간 하윤은 그의 눈 속에도 문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일반적인 [문]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문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열어 보고 싶었다. 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박건영이 숨을 헉 들이켜더니 그의 눈이 순식간에 검은 유리알같이 반질반질해졌다.
“어쩐지 그날 부리나케 사라지더라니.”
“나는 진짜 무슨 말을 하는지…….”
박건영은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으나 하윤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박건영의 얼굴이 점차 하얘지고 이마와 인중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씨발, 그만두라고!”
박건영은 바락 소리를 외치는 것과 동시에 하윤은 그의 눈동자 속 문을 열기를 멈췄다.
“우읍!”
박건영은 입을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잡을까 싶어 겁내는 것처럼 몸을 비틀며 하윤을 지나치더니 여름을 맞아 불쑥 키가 자란 풀숲으로 뛰어갔다.
“우웩!”
잔잔히 물결 지는 강가에 오리가 꽥꽥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슬슬 모기가 모습을 드러내는 즘이라 풀숲에 가기 싫었던 하윤은 멀찍이서 괜찮으냐 물었다. 안타깝게도 박건영 대신 오리 울음이 계속 들렸다.
“…….”
근처에서 운동을 즐기던 인근 주민들이 한 번씩 쳐다보는 게 왜 그렇게 민망하던지.
하윤은 일행이 아닌 척 멀찍이 떨어졌다.
‘지금도 박건영이 능력을 쓴 건가?’
박건영이 겪는 증상은 흔히 정신계 능력자들이 반동을 심하게 겪을 때 오는 것과 비슷했다.
하윤에게 파고들지 못한 박건영의 힘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갔을 것인데, 이로 인해 점차 부하가 걸렸고 어느 순간 역치에 다다랐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몸이 반응한 것이고.
힘이 반동되어 돌아오는 속도는 사람마다, 힘의 종류, 파장의 형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비단 이번 건에 국한시킬 수도 없었다. 과학적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힘이라 얼굴을 보는 순간 반동이 나타날 수도 있고.
‘사실 나는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걸 더 못하지.’
자세한 것은 하윤도 정신계 능력자가 아니라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과 무경에게 암시를 걸기 위한 서이주의 노력 중에는 암시를 걸다 실패해 앓아누운 능력자의 치료비와 위로금도 포함되었다는 것만 알았으니까.
어쨌든 반동으로 인한 충격이 정신에 자극을 주었으므로 박건영은 한동안 하윤의 존재는 꼴도 보기 싫을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하윤의 존재 자체가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다만 스스로 한 짓이 있으니 이를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일 줄은 박건영 본인도 몰랐을지도 모르고.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선.’
박건영은 인도로 걸어오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흙과 풀로 옷이 엉망이 되자 욕설을 중얼거렸다.
“도와줄까요?”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뭐, 그렇다면야.”
아오, 씨팔. 개같네. 박건영은 홀로 씩씩거리며 중얼거리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하윤과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벤치 끝에 앉았다. 하윤이 차라리 자리를 비켜 주겠다고 일어나려 하자 필사적으로 말렸다.
결국 사이좋게 벤치의 끝과 끝에 앉아서 강가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엉덩이만 걸쳤지만.’
“이제 좀 괜찮습니까?”
“예에. 이제 조오옿습니다.”
“……?”
좋다는 말이 왜 이렇게 생식기를 상스럽게 일컫는 말같이 들리는지 몰랐다.
“대체 남의 머리는 왜 휘저으려고 하십니까?”
박건영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지금 겪는 증상만 아니었어도 멱살을 잡았을 투였다. 그러나 하윤은 그의 머리를 휘저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영문을 모르겠다고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저었다.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난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냥 박건영 씨가 지레 찔려서 하는 말 아닙니까?”
박건영은 화가 났는지 발발 떠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방금 자신의 눈을 통해 정신 침입을 하려고 한 게 아니냐는 말을 덧붙였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문득 박건영의 눈 속에 있던 문이 생각났다. 만약 그 문을 여는 것이 정신을 침투하는 것이라면 문지기인 서이주가 암시를 걸 수 있었던 게 이해가 갔다. 그녀가 뛰어난 문지기라서 해낼 수 있었던 일이라면 하윤 또한 할 수 있다.
‘그럼 혹시 박건영이 능력을 쓰다가 반동 온 게 아니고 내가 정신을 건드려서 속이 뒤집힌 건가?’
긴가민가했으나 하윤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히휴, 휴휴우우우.”
박건영은 더 말하기 싫었는지 이마를 짚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금방이라도 앓아누울 것처럼 골골 앓는 소리를 내다가 자신을 부른 용건을 물었다.
“왜 무슨 일로, 굳이 누나를 통해서 연락한 겁니까?”
“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박윤진 씨를 통해 박건영 씨를 부른 게 아닙니다. 그냥 그분께 제가 알고 싶은 걸 잘 아는 분의 소개를 부탁한 거죠. 그게 그쪽이었던 거고.”
“웃기지 마세요. 다 알고 한 거 아닙니까?”
“세상 참 좁아요? 특히 초능력자들은 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라니까.”
전치우를 운운했던 전적도 그렇고, 성씨도 같고 얼굴도 제법 비슷했다. 가장 닮은 것은 유독 까만 눈이었다. 사람을 꿰뚫어 보려는 그 눈. 하지만 앞서 말했듯 친족인 박윤진을 이용해 박건영을 어찌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박윤진이 생각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이 박건영이었던 거지.
“……피로 이어지는 능력이 많아서겠죠.”
“하도 모아 두니까 그 안에서 눈 맞아서 그런 건 아니고요?”
“부정하진 못하겠네요. 얼굴을 계속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뭐가 궁금합니까.”
“숨넘어가겠네. 숨 좀 돌리고 이야기합시다. 다리도 그만 떠시고요.”
“…….”
박건영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으나 시선을 내리자마자 사정없이 떠는 다리가 보였다. 좀 더 시간을 끌어 골려 줄 생각이었는데 측은지심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원(願)을 들어주는 괴물이라고 알아요?”
“원을 들어주는 괴물요?”
“십 년 전에 무경이랑 얽혔던 괴물이 원을 들어주는 괴물이라고 하더라고요.”
“…….”
“하지만 그렇다기엔 당시에 봤던 광경이 꼭 말 그대로 원을 들어주는 느낌은 아닌 것 같고. 당시 일을 겪었던 분들의 증언을 듣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