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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20화 (120/162)

120화

“도망가야지. 멀리, 그놈의 손이 안 닿는 곳으로.”

하윤은 의외의 답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

“너 군인이잖아. 그럼 맞서야지.”

“당시 사건을 두고 많은 의견이 분분했지만, 유일하게 입을 모은 게 당시 상비 능력자들이 무턱대고 대응한 게 피해를 키웠다는 점이야.”

당시 사건이 있었던 범위 내의 대응에 나섰던 상비군들 대부분이 사망하고 일부 살아남은 상비군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물론 그때야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장비를 갖추고 조심스레 접근했었어야 한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내가 정신이 침식되어 헛짓해서 아군에게 피해를 주는 것보다 도망쳐 주는 게 낫지 않겠어?”

자신은 김하윤을 데리고 멀리멀리 도망칠 것이다. 아니, 김하윤은 이제 알아서 도망칠 수 있으니 그를 안전한 곳에 보내고 자신도 뒤따라갈 것이다.

무경은 하윤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문득 무엇이든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디딜 곳 없이 추락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탓이리라.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에도 김하윤이 자신의 조각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것처럼,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또다시 그런 날이 닥친다면 무경은 하윤을 데리고 도망갈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현장에서 가장 위험한 게 나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 우리는 한정된 자원이야. 그런 생각으로 달려갈 게 아니라, 냉정하게 생각해서 효율적으로 배분해야지. 그리고 그런 일이란 대체로 없어. 다급한 마음에 시야가 좁아졌을 뿐이야.”

“정말 그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면?”

“…….”

무경은 하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양친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모친인 서이주가 맡아 키웠다면 김하윤에게 분명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모친의 안목을 믿은 것이다. 다만 지금은 하윤의 힘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를 모를 뿐.

“그 한 사람이 나서지 않아서 나라가 망하는 수준이면?”

“그 정도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게 맞겠지. 그 한 사람만 바라볼 정도면 정부나 군부가 제 기능 못 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더욱이 그 정도 전력이 사라지면 이후엔 어쩌려고?”

“…….”

“나만 할 수 있다, 나여야만 한다. 이런 생각은 멍청한 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어. 희귀한 능력자는 있겠지만, 현대 과학기술은 어느 정도 그 사람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데.”

“……학교에서 배웠던 거랑 좀 다른데.”

김하윤의 말에 무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주입해 놔야 현장 이탈을 방지하지 않겠는가. 당장 달아날 힘이 있는데 괴수 앞에 서는 것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초능력자들이 위수 지역이 아닌 일반 거주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특별하다 생각하지 말라고 교육하는 것은 현장에 익숙해지기 전에 사망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장에 신병들이 투입될 때마다 상관들이 언질을 주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특별하지 않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너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경험이 쌓이기 전까진 적당히 비겁해져라. 모두를 구할 수 없다.

무경은 소파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비볐다.

“능력 좀 돌아왔다고 나설 생각하지 마. 괜히 그러다가 일을 망칠 수 있으니까.”

하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무경은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정의감에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신병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아무래도 일어날 일 같아서.”

“일어날 것 같다고?”

묘한 대답이었다. 대부분 이런 대답은 뚜렷한 물증 없이 감에 의존했을 때 나왔다. 다만 그 말을 한 사람이 김하윤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어쩌면 단둘만 남았을지 모를 문지기의 감.

‘능력이 돌아온 김하윤의 감을 무시할 수 있나?’

무경은 하윤의 표정을 살폈다. 하윤은 소파 등받이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어째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다 할 증거는 없어. 왜냐하면 이제 그놈들같이 열쇠를 만들어서 문을 열려면 재료가 없거든.”

“재료?”

“김득철이 만든 팔찌가 있었어. 선생님은 그걸 열쇠라고 했었는데, 완벽하지 않았어. 그래서 그놈들은 그걸 보완하기 위해 선생님에게 문을 열게 시키려던 거였고.”

“…….”

“열쇠를 만드는 데는 문지기들이 필요해. 하지만 지금은 문지기들의 씨가 말랐지. 희원이가 갇혀 있던 곳 자체가 그 증거가 될 거야.”

“그럼 지금은 그 열쇠를 만들 재료가 없다는 말인가?”

“맞아. 그게 이상한 거야. 분명 문을 열 수 없는데 문이 열릴 것 같거든.”

“왜?”

무경은 미간을 문질렀다. 김하윤은 [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분명 자신이 닫은 문인데, 최근에 열린 문에서 그때 그 괴수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둥, 자꾸만 밀어내고 또 밀어내도 문밖에 서 있다는 둥.

문지기라는 초능력자가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간 정신이 나가 헛소리나 지껄이는 줄 알았을 것이다.

“어떤 경로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어. 다만 예전 그대로의 방법은 쓰기 어렵다는 정도만 확실하겠지.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문을 열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해. 그러기 위해선 우리 집에서 움직이는 게 좀 더 편한 방법이겠다 싶고.”

집을 나가겠다는 말 때문인지 김하윤의 말이 거슬렸다.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도, 문을 닫는 데 필요한 열쇠라는 것도 그랬다.

‘분명 예전엔 어머니를 도와서 문을 닫았다고 했었는데.’

김하윤의 거짓말이 보였다. 무경은 모친의 마지막 흔적을 떠올렸다. 부상의 정도를 생각하면 김하윤이 주도하고 모친이 힘을 쥐어짜내 도왔어야 이야기가 맞았다. 왜 이제껏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주변 사람들은 모친 서이주에게 집중했지, 힘을 잃은 어린 김하윤에겐 관심이 없었다. 저 또한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도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문지기들을 어떻게 하면 그 열쇠의 재료가 돼?”

무경의 질문에 하윤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윤은 손이 저린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그것으로도 안 되겠던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무경과 조금 떨어졌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스스로 그렇게 실토하기도 했고.

“문지기들의 몸엔 곡옥 같은 게 있어.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숨이 끊길 무렵에 보이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흩어져 버려. 대신 꺼낸 직후 특수하게 처리하면 일부를 남길 수 있는데, 그때는 이런 처리 없이 그냥 썼지.”

김하윤이 능력을 잃은 것은 사건 당시 과도하게 많은 능력을 사용해서라고 알려져 있었다. 겁에 질려 사건 현장에서 달아나기 위해 능력을 과다 사용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김하윤은 달아난 게 아니었다.

문득 모친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울먹이던 어린 김하윤이 떠올랐다. 모친의 사망을 확인받기 위해 찾아갔던 곳의 모습도.

피노키오들이 문지기들을 죽여 만들었다던 미완성의 팔찌. 그리고 그것을 완성한 김하윤. 완성하기 위한 재료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서이주는 김하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어머니의 곡옥으로 열쇠를 완성한 거구나.”

“……맞아. 그때 문을 닫을 수 있는 게 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내게 완성하라고 하셨어.”

김하윤의 말했던 거짓과 진실이 가려졌다. 오랫동안 맞춰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조각들이 이어졌다. 김하윤이 어떻게 모친의 최후를 지켰는가, 왜 시체를 [문]에 숨겨야만 했는지, 김하윤이 왜 그렇게 자신의 냉대에도 버텼는지. 그리고 왜 이것을 숨길 수 있을 만큼 숨기고자 했는지.

‘죄책감.’

머릿속에 벼락같이 떠오른 단어에 무경은 몸을 일으키며 하윤의 멱살을 잡았다. 김하윤은 처분을 기다리듯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어떻게……!”

부모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흘렀고 죽음의 경위를 이해했다. 모친과 김하윤은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김하윤의 배짱으로는 멀쩡한 서이주를 공격해 그녀를 열쇠의 재물로 쓸 수 없다.

곡옥이라는 것의 특징을 생각하자면 아마도 목숨이 경각에 달한 모친이 김하윤을 회유했을 것이다. 반대로 모친이 김하윤을 제물로 삼아 열쇠라는 것을 완성하려 했어도 부상 때문에 어려웠을 테니까. 물론 모친의 부상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에 따라 말은 달라지겠지만…….

그것이 어찌 됐든 간에 김하윤은 모친의 마지막을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사랑이라는 단어 달랑 하나 가지고는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을 혼자 남게 했다는 죄책감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되지.

“미안해, 미안해 무경아. 미안해. 미안……, 미안해.”

김하윤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멀끔했던 얼굴은 삽시간에 젖었고 몸을 발발 떨었다. 무경은 대체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슬프고 괴로운 듯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졌으나, 머릿속은 짙은 환희로 가득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누르며 무경은 하윤을 흔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기쁜 일이.

김하윤은 어지간해서는 자신을 버리지 못하리라.

아! 어머니. 아! 어머니. 당신의 자식이 이렇게 글러 먹었습니다.

이미 아셨겠지만요. 그렇죠?

◇◇◇

김하윤은 죄책감에 짓눌려 얼굴을 파랗게 물들인 채로 말을 이었다. 평소와 달리 많은 것을 토해 냈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를 더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저 몰래 뭔가를 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그래, 아직은.’

“조사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박건영이랑 말 많이 섞지 마. 속 시커먼 새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도 믿지 마. 많이 이야기해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차라리 내가 도와줄게.”

“……네가?”

“뭘 조사해야 할지 알 것 같으니까.”

문지기 식으로 괴수가 다시금 [문]을 열고 나온다면 조사해야 할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하나는 김하윤이고 다른 하나는 김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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