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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19화 (119/162)

119화

핸들을 꼭 쥔 무경은 불안한 듯 시선을 가만두지 못했다. 차창 너머 까만 어둠을 바라보다가, 폐점을 준비하는 가게를 바라보다가. 그러나 그의 감각은 자기 집으로 뻗어 있었다. 무경은 소파에서 연거푸 한숨을 내쉬다가 베란다로 나오는 김하윤을 보며 숨죽였다.

혹여 나쁜 짓을 할까 봐서 신경을 잔뜩 세우고 있었는데 하윤은 그저 창밖을 설핏 보고 돌아섰다. 무경은 그 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비가 오는 줄 알았다. 창에 후두두 떨어지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숨에 섞인 울음에 무경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꼴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울음을 지워야 했다. 그러나 김하윤을 생각하는 순간에 눈이 달아올랐다. 초조한 마음에 핸들을 두들기며 다시 숨을 골랐다. 무경은 다소 익숙한 행위에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윤이에게 화가 났을 땐 그는 언제나 하□이 없는 곳에서 화를 삭였다. 혹시라도 자신의 분풀이에 하윤이 다치지 않길 바라서였다. 또한 그 애의 화는 대부분 자신의 태도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대부분 백무경의 잘못으로 발로했고 무경은 반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애를 옭아맸고 다른 사람과 엮이는 게 싫었다. 언제든, 몇 번이고 다시 할 잘못을 굳이 반성할 필요가 있는가? 그냥 그 애가 화를 풀기를 기다리고, 또 자신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감내할 수밖에.

이제 와서 생각하면 싹수부터 노랬던 것 같다. 그랬으니 모친 서이주도 그에게 암시를 걸었을 것이다. 그래, 그럴 만도 했다.

무경이 떠올린 [기억] 속 백무경은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늘 그 애가, 김□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두려웠다. 혹여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거나 좋아하게 될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이 좋아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고 싶었다.

친구로 있자는 소릴 하거나 제게 질투를 하더라도 다 괜찮았다. 자신의 곁을 떠나가지만 않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이 알아서 하윤에게 접근하는 것들을 다 떼 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자신이 김하□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었으면 했다.

어렸을 적 김□윤을 업었을 때 땅에 다리가 끌리지 않도록 키가 크길 바랐던 것처럼. 힘이 세어지길 바랐던 것처럼. 겉모양이 멀끔하길 바란 것처럼.

지금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김하윤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끼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을 버리지 못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슬픔에 부서져도 좋고 진창에 굴러도 좋았다. 불쌍해 보이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무경은 축축이 젖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파트를 노려보았다.

◇◇◇

무경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 앞에 섰을 땐 울음의 흔적은 눈에만 남았다. 현관엔 김하윤이 막 나서려는 듯 우산을 챙기고 있었다. 무경이 벌컥 문을 열자 김하윤이 어쩡쩡한 자세로 그를 응시했다.

무경은 가장 먼저 김하윤의 얼굴을 훑었다. 멀끔한 얼굴에 괜히 눈가가 화끈거렸다. 다만 뭐라 말하지 못하는 것은 우는 모습을 보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경아.”

무경은 하윤의 부름을 신호 삼아 그의 신발을 현관에서 가장 외딴곳으로 밀어냈다. 단번에 신발을 신지 못하게 한 그는 하윤의 등을 밀었다.

“……비 안 맞았어?”

“늦었어. 자고 가.”

하윤을 그대로 거실까지 몰고 간 무경은 염동력으로 전등불을 끄는 동시에 하윤을 소파에 눕혔다.

“무경아?”

무경은 소파 밑에 드러누운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김하윤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던 것일까. 소파 밖으로 드리우고 있던 손을 움찔거리던 하윤은 이내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자.”

“집에 가서 잘게.”

“여기서 자. 시간도 많이 늦었잖아. 어떻게 가려고 그래.”

“나 이제 갈 수 있어.”

하윤은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 뒤에도 한동안 망설이더니 기어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

“능력이 돌아왔거든.”

무경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음에도 김하윤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새롭게 들렸다. 정말로 지금에서야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놀라네. 혹시 알고 있었어?”

“……그래.”

“언제쯤 알았어?”

“좀 됐어.”

무경의 대답에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경은 곧장 하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집에 가지 마. 이제 여기에 방도 있잖아.”

“…….”

“친구라며. 그럼 내 말 좀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달라지기로 했는데 이제까지랑 똑같으면 어떻게 해.”

무경은 자신을 나무라는 하윤의 눈을 감겼다. 혹여 자신을 차갑게 바라볼까 봐 두려웠다. 아니, 차라리 차갑게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무경은 하윤이 자신을 남들 보듯 바라보는 게 두려웠다. 말처럼 모든 걸 정리해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을까 봐.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잡고 있던 하윤의 손을 자기 이마에 올렸다. 웃기지도 않은 변명이었으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능력을 많이 사용해 집에 오는 길 내내 두통을 앓았고, 지금은 심하게 울고 난 뒤라 머리가 아팠다.

약한 척, 아픈 척 몸을 웅크리자 하윤도 손을 떼진 않았다. 다만 자신이 놓으면 손을 뺄 것 같았다. 무경은 하윤이 손을 빼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눈을 감았다.

“……돌아온 거 어지간하면 입 밖에 내지 마. 시기가 안 좋아. 들켜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

“또 누가 알아?”

“몰라. 따로 말한 적은 없어서. 너처럼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박건영은?”

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무경은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하윤을 소파에 눕혔다.

“왜 말 안 했어?”

“박건영한테?”

“그래.”

김하윤은 왜 자꾸 박건영의 이름이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난 박건영이 싫어.”

“왜?”

“재수 없어서.”

박건영이 싫은 이유는 꼽아 본 적 없었지만, 굳이 꼽자면 쥐뿔도 모르는 새끼가 뭐든 다 아는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때문이었다. 사실 [기억]에 따르면 그는 원래 김하윤 앞에 멀끔하게 차려입고 얼쩡거리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남녀노소 가린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하지만 박건영은 최근에 김하윤에게 뭐라고 한 게 컸다. 주제넘게 처지를 알라고 충고한 것도 보통의 삶을 약속한 것도 싫었다. 분명 비슷한 말을 자신이 이미 김하윤에게 주절거렸음에도.

“좀 그렇긴 해.”

하윤은 무경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숨소리같이 웃었다.

“왜 웃어?”

“……어.”

웃음을 들킨 하윤은 놀란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즉시 굳어지는 표정을 보자 가슴이 철렁였다. 동시에 몇 년 전에 TV를 보다가 무심결에 웃음을 터트린 김하윤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의 기억이므로 아주 선명했다.

‘씨발, 세상에.’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던 걸음도, 쿠션을 집어 들던 것도, 집어 든 쿠션으로 김하윤의 얼굴을 덮은 채 소파에 처박듯이 누르고 또 눌렀던 것도.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틀어쥔 것만 같았다. 무경은 숨을 멈춘 채 입술을 달싹였다. 온 내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으나 태연함을 가장했다.

“……박건영 이야길 하다가 웃으니까 묻는 거야.”

하윤은 무경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는 아예 소파 등받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냥 박건영이 웃겨서.”

“……?”

“진짜 재수 없이 말하는데, 곱씹어 보면 맞는 말이거든. 근데 또 너무 맞아서 재수 없어. 그리고…….”

“…….”

“그리고 그냥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할 줄 몰라서 그랬나 봐.”

이런 이야기는 또 뭐고 그걸 또 자신이랑 못 할 이유는 뭔가. 무경은 내장이 쥐어짜이는 고통 속에서도 가시를 세웠다. 그러나 따져 묻지 못한 것은 아직도 김하윤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경이 침묵하자 하윤은 머뭇거리다가 본래 그가 물었던 질문에 대답했다.

“그리고 왜 박건영한테 말 안 했냐면 걔는 알 필요 없거든.”

“……나는 알 필요가 있고?”

“이제는. 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사실 숨길 수 있으면 끝까지 숨기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돌아가겠다 싶어서.”

“왜?”

하윤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몸을 조금 뒤척이다가 무경의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바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보면 뭔가를 말했는데 미처 들리지 않았다.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 보려는 것도 실패했다. 하윤은 이를 방지하듯 손으로 자기 입술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 바로 옆에서 말하듯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경아, 만약에 말이야. 아주 만약에 십 년 전 그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래?”

“…….”

하윤의 질문에 무경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날의 일을 다시 겪는 건 꿈으로 몇 번이나 꾼 적 있으나, 현재 시점에서 다시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따로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난다면 무경이 선택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일단 대답해 봐.”

“도망가야지.”

“……뭐?”

“도망가야지. 멀리, 그놈의 손이 안 닿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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