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재앙. 하윤은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조금 전에 제쳐 두었던 고서 해석본을 집어 들었다.
‘탐욕, 탐욕.’
직접적으로 탐욕이라고 적힌 부분은 없었으나 비슷한 말을 찾았다.
[원을 들어주는 괴물에 관한 전설]
책 사진 자체가 군데군데 찢어져 안 보이는 부분이 있는 데다가 전문가가 한 해석이 아닌지 글이 다소 딱딱하고 또 약간 이상했다. 서두는 이와 같았다.
괴물이 묻고 인간이 답한다. 입으로 발하지 않음에도 심중 깊이 있던 원이 튀어나와 환상을 이루고, 절명하지 않고 버티면 실제로 결실을 맺힌다. 적은 연기에도 심신이 미약한 자들은 상을 보기 전에 절명하고 오직 심신이 강한 자들만이 환상과 실제를 겪는다.
원이 이루어진 뒤에는 괴물에게 잡아먹힌다.
“잡아먹힌다…….”
하윤은 김옥림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무속신앙을 믿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삿된 것이 자기 머리를 찾으러 오고 있고, 그 머리는 이 땅에 남겨져 있다. 그리고 그 머리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다.”
정황상 이 땅에 남겨진 것은 [그날] 나타난 괴수가 분명했다. 하윤이 문을 여닫으면서 괴수의 몸이 잘렸었다. 다만 연기 같은 몸이라 머리를 잘랐는지 어딜 잘랐는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김옥림이 머리라고 했기에 머리라고 치기로 했다.
‘그래, 그 정도 원한이면 삼키려고 하는 게 맞겠지.’
온전치 않은 몸으로 세상에 떨어졌으니 회복할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고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말은 이제 곧 준비를 마친다는 뜻이다.
‘몸통에 머리가 붙으면 만족할 때까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말은 그럼……. 머리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몸통을 부르는 준비가 아니었을까? 그래야 삼킬 수 있을 테니까.’
하윤은 다시 해석지를 응시했다.
‘만약 그놈이 해석지에서 말하는 원을 들어주는 괴물이라면.’
하윤은 가정을 해 보기로 했다. 그놈이 원을 들어주는 괴물이라면 원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 놈이리라. 연기 같은 육신을 보면 정신체인 듯싶고, 정신체의 특성 자체가 생물의 정신 에너지를 주식으로 한다.
그렇다면 놈이 가장 먹음직스러워 하고 탐낼 만한 생물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단 과일을 선호하듯이 강한 정신에너지를 가진 생물을 탐낼 것이다.
이 땅에 가장 강한 정신 에너지를 가진 자는 누구인가. 진짜라고 불리는 신자, 무속인, 그리고 정신 에너지로 초능력을 사용하는 초능력자 등일 것이다.
머릿속이 간질거렸다. 하윤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그날을 떠올리려 애썼다. 자신이 문을 닫기 전 일대의 초능력자들이 어떻게 되었던가.
‘솔직히 말해서 그날엔 문이랑 무경이한테 정신이 팔려서 다른 건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박건영의 말이 다를 게 없었다. 하윤은 쯧쯧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이 겪은 [그날]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살아남은 초능력자, 혹은 무속인이나 신자들이 원을 들어주는 괴물의 물음을 들었다면. 그렇다면 괴물은 그들의 원을 들어주려 할 것이다.
‘그게 뭐든 썩 좋진 않을 것 같은데…….’
하윤은 문 등록명부가 들어 있는 파일첩 더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전에 놈의 몸통이 오려면 [문]이 열려야 한다. 미궁일 수도 있고 그냥 [문]일 수도 있다. 어떤 곳으로 올지 혹은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으니 늦기 전에 이 땅의 [문]에 관한 것들을 알아 둬야 해.’
이번엔 서이주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머리가 좋든 나쁘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문]에 관한 연구를, 서이주와 정기오 그리고 문태강이 함께한 연구를 이어 가게 되리라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 씨발……. 노트북부터 사야 하는구나.”
◇◇◇
삶을 정리하려 자신의 모든 소지품을 처리했기 때문에 뭐만 하려 하면 돈이 나갔다.
‘버는 건 힘든데 쓰는 건 왜 이렇게 재밌고 쉽냐.’
재밌는데 쉽기까지 하니 정말 큰일이었다. 하윤은 노트북을 구입하면서 받은 사은품인 외장하드에 서이주 컴퓨터의 자료를 복사했다. 일부는 또다시 노트북에 저장하고, 자료를 전부 빼낸 컴퓨터는 공간 안에 넣어 두었다.
컴퓨터를 사고 자료를 옮기고, 또 서이주의 서재에서 아예 책장을 빼내 공간 안에 대강 쌓아 두었던 책과 파일첩을 옮겼다. 진작 책장째로 옮겼으면 되지 않았나 싶었으나 머리가 나빠 몸이 고생한 경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뜨거운 콧김만 씩씩 뿜어냈다.
얼추 정리를 마쳤을 땐 집에서 나왔을 때와 비슷한 시간이었다. 이를 인지한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잠시 숨 돌리려고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손끝 하나 까딱일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인간으로서 생리현상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기듯이 공간을 나와 자취방 화장실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있을 때, 때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 보자 이미 부재중 통화가 꽤 쌓여 있었다. 가족들이 각자 한두 통씩 걸었고 무경이 혼자 열 통을 넘겼다.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으나 걱정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숨 한번 픽 내쉬고 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짐을 옮기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답장을 복사해서 돌렸다. 이제 되겠지 싶었으나, 또다시 무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무경아.”
[아직 집에 없던데. 너 언제 올 거야?]
“나? 어……. 음. 나 시간이 애매해서 하루 더 자고 갈 것 같은데.”
[그냥 나와. 나 퇴근하던 길이니까 태우고 가면 되겠네.]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내가 자고 아침에 알아서 갈게.”
무경은 고집을 부렸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데려가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하윤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선 온몸의 숨을 다 뱉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좁은 샤워 공간에서 몸을 씻었다. 비누 한 장 남겨 놓고 간 것이 어찌나 도움이 됐는지.
비협조적인 몸뚱어리를 씻기고 다시 옷을 입혀서 부모님 댁이 있는 아파트로 이동했다. 혹시 가족이랑 마주칠까 봐 다른 층 계단에 서 있다가, 무경의 연락이 올 때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애매한 사흘 만에 만나는 무경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종종 보이는 태도가 그랬다.
하윤은 무경을 힐끔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가도 이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괜히 말했다가 심기를 거스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이전에는 알면서도 하지 않았지만.
‘나도 참 부지런히 긁고 다녔군.’
하윤은 아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퇴근 시간임을 감안하더라도 유독 차가 막혔다. 거의 멈춰 서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윤은 저 멀리서 때때에 맞춰 부지런히 색을 바꾸어 가는 신호등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도착할 때까지 눈만 감고 있어야지 했으나 그게 언제든 잘 되는 일이던가. 정말 기절하듯이 잠들어서 무경이 도착했다고 흔들 때야 눈을 떴다. 그때도 눈만 잠시 떴지, 몸은 깨지 못했다. 오죽하면 차에서 자겠다고 말했을까. 그러나 무경은 용납하지 않았다.
차 키를 주는 것 대신 예전처럼 하윤을 안아 들었다.
정말 예전처럼, 이제는 흐려진 기억 속 그때처럼 따듯하고 다정해서 꿈이구나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깊이 잠들었다.
◇◇◇
얼마나 잤을까. 품을 파고드는 묵직한 무게에 숨이 눌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떠는 사이 누군가 자신에게 입을 맞췄다. 암만 눈꺼풀이 무겁더라도 깰 수밖에 없었다. 눈꺼풀을 뜨고 상대를 확인한 뒤 하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벌써?’
폭주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떨어져 있던 사흘 남짓 아닌가. 암만 무경의 폭주 주기가 짧아지는 중이라도 이상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폭주의 징후가 없는 것도 그랬다. 물론 그것이야 자신이 막 잠에서 깼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상했다.
“너, 씨. 아. 잠깐만. 너, 너……. 혹시.”
하윤은 무경의 눈을 확인했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고, 눈을 뜨지 못한 중에 무엇을 보는 것처럼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맹목적으로 자신을 확인하려 했다.
하윤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는 무경의 손을 붙잡았다. 물론 그런다고 소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
하윤은 재차 확인하듯 무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이 또한 지금으로선 별 소용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짧은 한숨과 함께 내내 찡그리고 있던 미간을 문질렀다. 그 뒤로 무경이 무엇을 하든 제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또 이러다가 끝날 것이니까.
무경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기대하며 마음 졸이기엔 이제 마음의 여력이 없었다. 하윤은 휴대전화를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평균적으로 멈추는 시간을 생각하며 문자를 확인했다. 가족들이 보낸 답장도 있었고 스팸 문자도 있었다.
화면을 슥슥 내리며 확인한 다음 화면을 껐다. 하윤은 부지런히 몸이 흔들리는 중에도 내일 연락해야 할 사람들을 떠올렸다. 김옥림을 한 번 더 만나야겠다. 김옥림을 만나기 위해서는 전치우와 김옥림의 애동제자의 가게 쪽으로 연락하면 될 것이다.
‘그쪽은 검색하면 나올 것 같고. 박건영한테도 연락해야 하는데.’
[그날] 초능력자들에게 있었던 일을 물을 만한 적당한 인사가 박건영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자신이 꽤 중요한 위치의 사람이라고도 했고 그의 능력의 특성을 생각할 때도 적당했다. 물론 몸을 겹치고 있는 무경도 모를 것 같지는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무경은 하윤의 물음에 제대로 답해 준 적이 없었다.
‘괜한 짓 하지 말라고 타박만 받으면 다행이지.’
요새 묘하게 유해지기는 했으나 숱하게 겪어 온 바로는 이럴 때가 가장 무서웠다. 언제 또 얼굴을 뒤바꿀지 몰랐으니까.
‘자고 싶은데.’
하지만 이대로 잠들었다간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하윤은 좀 더 버티기로 했다. 비록 지겹고 무의미한 시간 같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