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렇게 많이 빠진 건 아닌 것 같은데.’
하윤은 곧 가족들을 안 본 지 꽤 됐다는 것을 떠올렸다. 집에서 나온 뒤로 별일이 없으면 본가에 오지 않았다. 주로 가족들 생일이나 명절에만 왔는데, 공교롭게도 가족들의 생일은 주로 여름과 가을에 분포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년 추석 이후로 들리지 않았다. 새삼스레 자신이 불효자라는 것을 상기한 하윤은 콧등을 찡그리다가 손을 마저 씻었다.
‘이번 설날에도 안 왔었지.’
왜 안 왔었더라? 하윤은 기억을 되짚을 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윤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털었다.
기준이 했던 말이 고까운 것도 있었고 제사 대신 여행을 간다는데 따라가기도 뭣했었다. 대신에 용돈을 부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냥 누굴 만날 정신이 없었다. 그때의 하윤은 자신이 일생일대의 목표를 성취해 낼 줄 알았다.
‘내가 못 할 줄은 몰랐지.’
나이가 들면 혼잣말도 흥얼거리며 한다더니, 하윤은 음률을 붙여 “나도~ 못~할 줄은~ 몰~랐지.”라고 중얼거리며 욕실을 나왔다.
기준과 인사를 하고 어색하게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부친이 돌아왔을 때 이미 훌쩍 지나간 자신의 생일을 축하했다. 모친은 상을 차려 주었으니 선물은 없다고 했고, 부친은 용돈을 찔러주었으며, 여동생 지하는 케이크를 사 줬다. 남동생 기준은 오늘 하윤이 오는 줄도 몰랐다. 그러곤 생일이 이미 지났으니 선물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생일 당일 만났다고 한들 기준이 선물을 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금 괘씸하기는 했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생일을 선물 좀 못 받았다고 서운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사실 축하받기도 좀 멋쩍은 입장 아니었던가.
가족들이 쏟아 내는 이야기에 하윤은 내내 마주 웃었다. 볼일을 핑계로 화장실에 갔을 땐 자신의 표정이 어색하게 느껴져 몇 번이고 얼굴을 문질러 댔다.
다시 나와선 자신이라면 절대 틀 리 없는 채널을 가족들과 함께 시청했다.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기준이었다. 그는 모친의 타박에도 히히 웃으며 게임을 하러 방에 들어갔고, 그 뒤에는 여동생이 먼저 들어간 오빠를 핑계 삼아 또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거실 말곤 갈 곳 없는 하윤은 부모님과 함께 좀 더 TV를 시청해야 했다. 쌍둥이들이 자리를 비우자 하윤의 부모는 입을 떼기 어려워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다가 혹은 서로를 말렸다.
그러다가 홀로 지친 하윤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자 졸린 줄 알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평소보다 일찍 자리를 깔고 누운 하윤은 닫혀 있는 방의 문들을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깨어 있었지만, 밖에 나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하윤은 비로소 혼자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얼굴을 더듬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보지도 않는 채널을 튼 채 웃는 연습을 하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잠이 무척이나 달게 느껴졌다.
◇◇◇
푸른 새벽에 깼을 때, 하윤은 오랜만에 과거의 향수를 맡았다.
그러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없었을 문들이 집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지기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문은 아니었다. 자연적으로 있는 문이었는데, 예전엔 다른 건물 옆에 붙어 있던 것이 집 앞까지 밀려나 있었다.
하윤은 베란다 문을 열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집 주변의 문들 위치가 조금씩 다 바뀌어 있었다. 아예 새로 생긴 곳도 있었다. 아예 드문 경우는 아니었으나 그리 흔한 일도 아니었다.
하윤은 자신이 본래 존재하던 [문]의 위치를 밀어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일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친 것일까?
‘찝찝하긴 하지만 또 마냥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 같고.’
그간 못 보던 건물들도 주변에 많이 생겼고, 부근에 있던 산 근처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문은 아무래도 공간과 관련된 현상이다 보니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하윤은 이내 이 정도면 바뀔 만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이 주변도 안전하진 않겠는데.’
그간 사건 발생률이 낮았던 탓에 안전지대라고 여겨져 아파트가 있는 곳을 비롯해 주변 땅값이 많이 올랐다. 하윤은 안전장치를 확인하기 위해 베란다 창을 열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랜 세월 교체 없이 바깥에 방치된 탓에 녹이 꽤 슬어 있었다.
하윤은 아침 식사 준비에 열중인 모친에게 물었다.
“엄마, 여기 대피소 증설했던가? 예전에 말 나왔었잖아.”
“그거야 매년 있는 말이지.”
그 말인즉 아직도 해결이 안 됐다는 말이었다.
“왜 증설을 안 한 거예요?”
“너 오는 길에 현수막 못 봤구나. 여기 이제 재건축 들어갈 거야. 엄마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려면 안전 등급이 낮게 나와야 한다나 그렇대. 뭐 규모를 키운 댔던가, 빨리 하려고 그런다던가. 아무튼 그래서 몇 년째 하자고 하자고 소리 나와도 터줏대감들이 버텨야 한다고 기를 쓰고 반대를 해.”
“그럼 이사하면?”
“얘는. 재건축된다는데 버티고 있어야지 가긴 어딜 가.”
“전세로 주고 그 돈으로…….”
“어휴, 됐어. 이사하는 것도 힘들고 전셋돈 받아 봤자 이만큼 좋은 동네 가기도 힘들어. 기준이 아직 학교도 안 끝났고. 지하도 여기서 출퇴근하기 좋은 곳으로 갔는데 어딜 가니.”
“지하 취직했어요?”
“한 지가 언젠데. 걔가 취직도 안 됐으면 자기 돈으로 케이크 사 오려고.”
“…….”
“그런데 집은 왜?”
“아니에요. 그냥 아파트가 오래돼서 물었어요.”
“너희 아빠랑 나는 재건축되면 그걸로 한탕 당겨서 은퇴자금 삼으려고.”
모친의 깔깔 웃는 웃음에 하윤은 따라 웃었다.
“아침부터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렇게 웃어?”
“아, 여보. 우리 아파트 재건축된다는 거. 하윤이 몰랐더라고.”
“자주 와야 알지.”
“잘 주무셨어요?”
“오냐.”
웃음에 일어난 것인지 원래 일어날 시간이었던지 안방에서 나온 부친이 소파에 앉아 하윤의 인사를 받았다.
“왜, 아파트 재건축한다니까 관심이 생겨?”
“아니요. 아파트가 오래돼서 안전장치도 같이 낡아서요. 교체하든가, 이사하든가 했으면 해서 물어보다가요.”
“하기야 오래되긴 했지. 우리 이사 올 때도 하자 보수 기간이 끝났다고 죄다 우리가 알아서 하라던 아파트였으니까. 그래도 그땐 관리가 잘 되었는데. 이제는 일부러 건물을 삭히는 것 같아.”
“…….”
하윤은 자기 눈에만 보이는 문들을 응시하다가 이내 부친이 튼 TV로 시선을 돌렸다. 덩치가 있는 개그맨들이 모여서 맛집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멍하니 시청했다. 부친은 간간이 맛있어 보이지 않느냐고, 먹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하윤이 대강 맞춰 대답할 때, 모친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하윤아. 너 오늘 뭐 일정 있니? 주말엔 집에 계속 있는 거지?”
“어……. 마트를 좀 가려고요. 청소용품 좀 사게. 청소를 좀 할까 해서요. 그런데, 왜요?”
“왜요는 왜야, 인마. 자식새끼가 비쩍 곯아 있는데 맛있는 거나 좀 먹이려고 그러지.”
“에이 됐어요. 어제도 많이 먹었는데요.”
“그럼 오늘 바로 집에 돌아가려고?”
“청소하고 돌아올게요. 식사는 뭐 집에 있는 거 그냥 먹죠. 뭐.”
“얘는. 집에 있는 음식은 손이 안 가는 줄 아나. 그러면 엄마가 차려야 한다니까.”
“아!”
“아! 이러고 있다. 어쨌든 주말엔 집에 있는 거지?”
“네. 그렇게 할게요.”
“마트 갈 때 엄마가 태워 줄게. 아침 먹고 잠시 나갔다 와야 하는데 그때 같이 나가자.”
혼자 가겠다고 하려 했으나 모친의 표정에 하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 일이 있다던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니었던지 모친은 식사 후 부지런히 몸을 단장했다. 부친에게 같이 안 가냐고 묻자 그는 소파에 덜렁 누우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집에서 쉴 것이라는 뜻이었다.
부친과 아직 잠에 빠진 쌍둥이들을 뒤로한 채 집을 나왔을 때는 열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차도는 어제와 비교하면 비교적 한산했지만 타이밍이 안 맞았던지 신호에 자주 걸렸다. 모친과 일상적인 수다를 나누던 중 하윤은 또다시 현수막이 교체되는 곳을 발견했다.
‘또 점집.’
인부들이 현수막을 펼칠 때를 기다리며 눈을 떼지 못하자 모친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이상한 변명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대로 얼버무릴 생각이었으나 모친이 재차 묻는 바람에 실패했다.
“점 좀 볼까 싶어서요. 마침 현수막이 걸리길래.”
“저렇게 걸리는 건 순 엉터리야.”
모친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늘어놓았다. 진짜 제대로 된 점집은 저렇게 광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보러 갔던 사람들이 소문을 내서 광고할 필요 없이 줄을 서 있다는 것이었다.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나 하윤은 점사의 정확도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것은 이전에 봤던 현수막에서처럼 [문]의 표시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확인하기 전에 신호가 바뀌어 차가 출발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신호에서 문을 열어 현수막이 걸리던 곳을 확인했다.
‘있다.’
이번에는 좌우가 아닌 중앙 위쪽에 숨어 있었다. 이전처럼 문양에 숨은 것이 아니고 급하게 적은 듯이 프린트된 장식 문양 위쪽에 있었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에 걸린 위치가 높아 작정하고 찾아보지 않는 이상 확인하기 어려워 보였다.
‘표시는 똑같은데 광고하는 집은 다르다.’
각기 다른 점집에서 같은 표시를 적어 놓고 있었다.
‘도대체 왜?’
뭔지는 몰라도 어떤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윤은 이에 관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