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거대한 감정의 파동이 거대한 해일같이 밀려와 그를 무참히도 침몰시켰다. 어찌나 억세고 강하며 날카로운 파도이던지 그 자신은 곤죽이 되어 신체의 어떤 것 하나 남기지 못한 신세가 된 것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무력함에 공포가 밀려왔다. 자신이 이렇게 나약한 적 있었던가. 자신이 이렇게 두려움에 떨던 적이 있던가. 무경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경아, 왜 이렇게 떨어.”
하윤의 물음에 무경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것이라 대답할 수 없었고 또 대답할 수 있는 상황도 정신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을 덮친 감정의 파도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해 하윤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이 끔찍하게도 두려운 순간에 문득 김하윤이 스러지던 꿈이 떠올랐다.
옷자락과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이 허겁지겁 하윤을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하윤의 손을 들어 자신을 마주 안게 했다. 하지만 끌어안은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김하윤의 마음이 문제였던지 하윤은 무경이 바라는 만큼 안아 주지 않았다.
이렇게 대충 안고 있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는 해소되지 않을 불안인데.
그러나 김하윤은 그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더 세게 끌어안으라고 다그쳤을 것이다. 무경은 초조한 마음에 입술만 잘근거리다가 거친 숨을 뱉었다. 하윤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혹시 울어?”
“…….”
하윤의 손이 무경의 뺨과 눈가를 매만졌다. 다정함을 가정한 무정한 손길에 정말로 목이 떨렸다. 이를 알아차린 것일까. 하윤은 짧은 한숨과 함께 무경을 고쳐 안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경이 바라는 대로 끌어안지는 않았다. 언제든 놓을 수 있도록 헐겁게 안고서 무경의 등을 도닥였다.
“우는 게 아니면 나쁜 꿈을 꿨어? 괜찮아, 그거 다 꿈이야. 네가 뭘 떠올렸든 그냥. 그냥, 다 꿈이야.”
하윤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경 자신이 아닌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졸린 듯 눈을 끔뻑였다. 무경은 손끝만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도닥임에 입술을 짓씹었다.
“지난 일에 연연해 봤자 뭘 어쩌겠어. 안 그래?”
“…….”
“이렇게 생각하면 어지간한 것도 다 넘길 수 있다더라. 엄마가 그랬는데, 겪으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했던 일들은 막상 닥치니까 또 어떻게든 해결될 방법이 있더래. 꼭 내가 해야 되는 일이 아닌 것도 있었고, 남이 도와줄 때도 있었고. 그러니까 대체로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더라는 거야.”
“…….”
“걱정은 계속 보고 있으면 자기 친구인 다른 걱정들을 몰고 온대. 내가 자꾸 보고 있으니까 위기감을 느낀다나 뭐라나. 아무튼 계속하면 할수록 본래보다 덩치가 커지지 절대 줄진 않는대. 그러다 보니 상대해야 하는 쪽수 많아져서 원래는 조금만 싸우면 될 걸 넝마가 될 때까지 싸우게 되는 거지. 그럼 싸우는 사람은 어쩌겠어. 진짜 많이 힘들어서 나자빠지거나 본래 적수인 걱정을 마주하지도 않고 도망친다는 거야.”
“…….”
“그런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대비해야 하는데. 안 그래? 그런데 있잖아, 무경아.”
하윤은 무경을 부른 다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경이 무겁다고 타박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몸을 옆으로 튼 다음 팔을 베게 해 주고는 퍽 다정하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나 금세 잠들 것처럼 눈을 감은 채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걱정을 너무 많이, 너무 오래 했는데 이거 어떻게 하냐?”
“…….”
“지금 걱정이 친구 하나 더 왔는데, 이젠 도망도 못 치는데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는데 이거 대체 어떻게 하냐.”
“…….”
“그냥 뒀으면 괜찮았을 건데, 박건영 말처럼 내가 너무 유난을 떨었어.”
내가 너무 많이 망쳐 버렸어. 하윤은 비밀을 말하듯 속삭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은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끝이 조금 떨렸다. 그 뒤로 하윤은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무경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고 눈썹과 미간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그러다가 입 맞출 듯이 가까이 다가와서는, 정작 입술 대신 이마와 이마를 맞댔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어.”
“…….”
“몰랐지? 그래도 약속은 지켰다. 그러니까 나중에, 진짜 나중에 생각나더라도 봐줘야 해.”
하윤은 작게 키득거리다가 내내 머리칼을 만져 주던 손을 멈췄다.
“알겠지?”
“…….”
하윤은 답이 돌아오길 바라는 것처럼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무경을 응시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홀로 피식 웃더니 다시 무경을 다독였다. 아니, 재운다는 말이 더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 괜찮을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그래야지.”
무경은 하윤의 손이 느릿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쯤부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늘어트렸다.
폭주가 끝난 것처럼 가장을 마치자 수 분 후, 김하윤이 눈을 떴다. 그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는 무경의 품을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휴대전화 불빛으로 방을 살폈다. 숨을 헉 들이마시던 하윤은 이내 무경을 힐긋거리다가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하윤이 거실로 향했을 때, 무경의 숨이 조금 떨렸다. 그러나 그는 곧장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경은 김하윤이 소파에 드러누워 완전히 잠이 들고 커튼 사이로 아침볕이 비치기 시작할 때야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무경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에 핏발 선 느낌을 보면 잠들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도깨비에 홀린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무경은 어젯밤의 기억을 조각조각 맞추다가 김하윤이 말했던 걱정에 관해 생각했다.
김하윤은 걱정이 늘었다고 했지만, 무경은 기억에 대한 감정이 그랬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도 없으면서 그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만이 그득했다. 죄책감과 희열, 그리움과 미움, 그리고 사랑스러움. 그 외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감정. 그것들이 한데 모여서 혼란을 만들었다.
혼란은 쌓이고 쌓여 바다를 만들었고 자신은 유일하게 확실한 확신을 조각배 삼아 올라타 있었다.
어디서 파생됐는지 모를 감정들이 요동칠 때마다 자신이 올라탄 확신이 뒤집힐까 늘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확신조차 온전한 모양인지 불확실했다. 그런데도 놓지 못하는 것은 이 끝없이 깊어져 가는 감정의 바다가, 그 아래 있을 기억들이 무엇을 누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경은 자신이 가진 확신이 어떤 꼴이 됐든 간에 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유일하게 쥐고 있는 것이라 놓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마는.
‘그걸 언제부터 생각했더라.’
최근은 아니었다. 꽤 오래전부터 했던 것 같은데 머리가 고장 난 것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무경은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주먹으로 이마를 툭툭 두드리다가 염동력으로 커튼을 걷었다.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에 방 안이 밝아졌다. 무경은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뭔가가 기억날 듯,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자신의 목소린 듯 목소리 아닌 것이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아, 그것이 뭐였더라.’
도통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기억을 잃었으니까. 무경은 자신이 이 질문의 답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누군가 잡고 돌린 것처럼 무경의 고개가 돌아갔다. 무경은 핏발 선 눈으로 자연스레 문을 바라보았다.
‘하윤이 나를 떠나는 것.’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무경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상하고도 낯선 말이었다. 자신이 김하윤을 하윤이라 부른 것도 그랬고 또…….
‘김하윤이 떠나 봤자 그게 뭐.’
그게 뭐 두려운 일이라고.
‘어차피 실패했는데.’
무경은 억지로 하윤을 비웃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를 비웃듯 잘린 사진이 가득하던 앨범이 생각났다. 텅 비어 있던 김하윤의 자취방도, 그리고 더는 끼지 않는 반지도. 병실에서 절망에 차 쏟아 낸 한숨과 저를 밀어내며 소리치던 차가운 눈빛도. 그리고 조금 전에 했던 도망치려 했다던 고백이 쏟아지듯 떠올랐다.
그러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쐐기를 박듯 선명해졌다.
김하윤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자신을 버리고 더는 손 닿지 않을 곳으로 가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리하여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던가. 김하윤은 실패했다. 그러니 떠나지 않을 것이다. 김하윤은 실패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다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있으니까.’
김하윤은 자신을 좋아한다. 그러니 떠나지 못할 것이다.
‘다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왜 불안이 그치지 않는 것일까. 무경은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의심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이제 김하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김하윤이 또다시 도망친다면 그때는?’
실패할 수 있을까?
무경이 아는 김하윤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부정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눈뜬 채로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뭐 이딴 말이 생각나선.’
자신은 김하윤이 떠나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다. 김하윤은 자신의 조각도 뭣도 아니니까. 차라리. 그래, 차라리 어디론가 가 버렸으면 했다. 아니, 차라리 신경 쓸 필요 없이 죽어 버렸으면. 무경은 서둘러 미움을 돋워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러나 이미 금기를 범한 것처럼 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
한기로 몸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 식은땀이 맺혔다. 무경은 눈물같이 떨어지는 땀방울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다리를 안간힘을 다해 내리눌렀다. 하윤을 위해 준비한 방 안에서 그는 손끝이 아침 햇살같이 하얘지도록 손에서 힘을 풀지 못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기에.
◇◇◇
오래간만에 본가에 연락했을 때 하윤은 당연하게도 나무람을 들었다. 주말에 집에 오기로 해 놓고선 연락이 왜 없었느냐부터 해서 하윤의 변명이 거짓말이냐 아니냐까지. 하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잔소리가 그리 깊어지진 않았는데, 부모님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될 수 있으면 일찍 오라고 했지만, 일찍 갔다가 일찍부터 혼이 날 것 같아 일정이 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혹여 연락이 없던 동안 회사에 전화라도 했을까 봐 회사 핑계를 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본가에 가던 날은 뒤늦은 양심의 가책으로 온종일 하윤의 마음이 무거웠다. 본가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는 무경이 딱히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벌을 받으러 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벌이 무서웠으면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하윤 나름의 변명은 있었다. 자신은 벌을 받을 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다.
생일 축하 전화를 받던 날엔 자신이 전부 끝을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도 하윤은 한동안 망설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지레 놀라지 않았으면 아마 누가 나올 때까지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가자 집에 먼저 와 있던 여동생 지하가 현관으로 다가왔다.
“누구세요? 세상에, 오빠?”
“어어, 오랜만.”
“와, 오빠 살을 왜 이렇게 많이 뺐어. 뺄 게 어딨었다고. 상처는 또 뭐야. 다쳤어?”
“어어 등산하다가 미끄러져서.”
“일단 안으로 들어와. 엄마, 큰오빠 왔어!”
지하는 부엌을 향해 냅다 소리 지르자 음식 준비를 하고 있던 모친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들, 왔어?”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던 모친은 하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쳤다는 것을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아휴, 미끄러졌다더니 좀 세게 미끄러졌네. 상처가 왜 이렇게 많아. 살은 또 왜 이렇게 빠졌고. 너 혹시 아파?”
“아니에요. 그냥 식욕이 좀 없어서. 잘 안 먹다 보니까.”
“다이어트도 재능이다.”
“넌 무슨 소리야. 네 오빠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아니, 나는…….”
“됐어. 음식 조금만 하면 다 되니까 지하 넌 수저 좀 놓고, 하윤인 손 씻고 와. 아휴.”
“네에.”
모친의 말에 대답한 지하는 손을 씻으러 가려던 하윤을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근데 진짜 병 숨기고 그런 거 아니지?”
“아니야, 인마.”
“걱정돼서 그러지. 다이어트 드립은 분위기 너무 심각해질까 봐 그랬던 거고. 진짜 살이 너무 많이 빠졌잖아. 일부러 뺀 거 아니면 문제 있는 거야, 그거.”
“진짜 식욕 없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검사는 병원 있을 때도 했어. 아무 문제 없데. 그냥 잘 먹고 잘 자라고 하더라.”
“그럼.”
“수저나 놓으러 가. 오빠 손 좀 씻자.”
“알았어.”
욕실로 들어온 하윤은 손을 씻기 전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