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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07화 (107/162)

107화

좀처럼 뚫릴 것 같지 않던 도로가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슬슬 차간 거리가 벌어지고 속도가 났다. 영영 갇혀 있을 것 같던 도로에서 풀려난 것이다.

속도가 나자 집으로 돌아오는 건 금방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무경은 하윤을 깨웠다. 그러나 하윤은 좀처럼 잠에서 깨지 못했다. 깬 척을 하려 숨을 들이켜며 가슴을 부풀리는데, 눈은 여전히 감고 있었다.

“……나, 조금만 자다가…… 올라갈게. 차 키 주고 먼저 올라가면 안 될까?”

“…….”

그러라고 하기엔 김하윤 손에 들어가면 안 될 물건이 차에 실려 있었다. 무경은 다시 잠든 하윤을 안아 들었다. 하윤은 놀라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무경은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김하윤은 금세 포기했는지 짧은 한숨과 함께 몸을 늘어트렸다.

몇 번 안겨 봤다고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요즘은 긴장이 풀어진 건지. 하윤은 예전같이 빠릿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손끝만 닿았어도 바로 잠에 깼었는데.’

요즘은 이렇게 온몸이 닿아도 잠을 잤다. 사실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로 김하윤은 어딘가 김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예전이라면 지금 같은 태도를 달갑게 받아들였을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 묘한 위화감이 거슬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미 깨진 것같이 날카로운 모습을 봐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의 생각을 김하윤이 안다면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것이냐며 화를 낼지 몰랐다.

‘아, 이제는 하지 않겠구나.’

또다시 가슴속이 뜨끔거렸다. 무경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는 핑계로 하윤을 고쳐 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무경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층을 이동할 때쯤에야 자동차의 문을 잠갔다. 괜한 소리가 김하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길 바랐다.

왜냐하면…….

‘그냥 이대로 올라가면 되는데 괜히 깨면 귀찮아지니까.’

적당한 핑계에 마음이 편해졌다. 무경은 집에 들어간 뒤에도 여전히 하윤을 깨우지 않았다. 조심스레 새로 마련한 방의 침대에 하윤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안으면서 느껴진 머리칼에 남은 습기와 비누 냄새에 따로 씻길 필요는 없다 싶었다. 무경은 하윤을 배를 짚어 본 다음 마지막으로 잠든 얼굴을 확인하고 방을 나왔다.

김하윤은 씻을 필요가 없었으나 퇴근하자마자 움직였던 무경은 씻어야 했다. 곧장 욕실로 들어간 무경은 문득 이 상황이 얼마 전의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무경은 그때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떠올렸다.

자신이 폭주 중에 겪었던 그 모든 순간에 김하윤이 있었던 걸까? 혹시 그때 그 순간뿐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김하윤은 자신의 조각이 결코 아니다.

자신이 그렇게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던 감각을 착각할 리 없었다. 분명 다른 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되겠는가.

물론 무경은 폭주한 상태로만 느낄 수 있는 그 안도감과 그 소중함만으론 그 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거기에 집착한 것은 더는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흐려지지 않도록, 제게 남은 흔적들만이라도 남겨 놓으려고.

물론 고통을 잊기 위한 호르몬의 작용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하지만 둘 중 뭐가 됐든 그로서는 그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멈출 수 있었겠는가. 둘 다 그의 목숨 줄을 잡은 것이었는데.

‘만약 착각이라면.’

자신은 폭주 중에 하윤을 그 애라고 착각한 걸까. 아니면 다른 누가 있어도 그 애라고 착각했을까? 둘 다 최악의 사태였으나 적어도 자신의 착각이 김하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길 바랐다. 적어도 그러면 변명의 여지는 있으니까.

하지만 아니라면. 김하윤에게 국한된 착각을 하고 있었다면?

평소 무경은 하윤만은 자신이 조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폭주 상태가 되었을 땐 이러한 확신이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키는 걸까? 그게 아니면 폭주 상태였을 땐 자신의 감각이 김하윤을 그 애처럼 느끼는 걸까? 그게 아니면 김하윤이 그 애를 흉내 내기라도 하는 걸까.

정신과 육신의 감각, 그리고 기만.

도대체 어디일까.

‘차라리 지금 확인해 보는 건?’

때마침 상황이 너무 적절하지 않은가. 꼭 그날과 비슷했다. 물론 무경도 멀쩡하고 김하윤도 졸릴 뿐 안정제를 먹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로 그날과 비슷한 감각이,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무경은 자신을 어지럽히던 가정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생각 후, 무경은 이제는 하윤의 방이 된 서재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리는 대신 안에 힘을 불어넣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열었다.

하윤은 다행스럽게도 아직 잠들어 있었다. 소파 위는 아니었지만, 무경은 그날처럼 하윤의 위로 몸을 드리웠다.

그날 이후 자신을 벌벌 떨게 했던 수치심이 이상하게도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열 때까지 그를 잡아채던 상념들도 존재를 감춘 지 오래였다. 대신 크나큰 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

무경은 자신이 그날 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어렵진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짚어 낸 적 있었으니까.

‘그래, 어렵지 않지.’

가장 먼저 입을 맞췄었다. 무경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맨정신에선 몹시 역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해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거부 반응을 일으키듯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어찌나 세게 뛰는지 어딘가 잘못될 것만 같았다. 무경은 즉시 입술을 뗐으나 그렇다고 그리 멀어지진 않았다. 계속 붙어 있었다간 죽을 것 같았으면서도 또 멀어지고 싶진 않았다. 무경은 하윤의 어깨 대신 이불을 움켜쥐고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를 밀어내는 듯한 숨을 헤치고 나아가 다시금 입을 맞췄다. 혹 전처럼 가슴이 세차게 뛸까 봐 잘게 입 맞추며 상황을 살폈다. 서너 번 닿았다가 떨어졌을 때쯤 무경은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경은 처음과 같이 지그시 입술을 맞댔다. 짧게 맞닿았다가 떨어졌을 때와 달리 다시금 심장이 크게 뛰었다. 덜컥 겁이 날 정도로 거세게 뛰는 맥에 다시 물러날까 고민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감각이, 모든 몸이 산산이 분절되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조각난 감각과 몸뚱어리는 무경이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빈틈없이 갇혔다. 숨이 턱 막히다가도, 비로소 구속되었다는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쾌감이 다시 손끝과 발끝까지 퍼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달았다.

달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주리던 것을 비로소 맛보는 것 같은 충족감과 고양감.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 무경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를 인지한 순간부터 김하윤의 모든 것이 반가웠다.

눌린 숨결, 움츠리는 몸짓, 그리고 제게 닿는 손길 모두.

‘씨발, 이래서. 이래서 내가.’

그래서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둑이 터진 것처럼 쏟아지는 감정에 미움의 가시는 세울 겨를도 없었다. 동시에 자신의 행동 또한 멈추지 못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이성마저 잃을 것 같았다.

무경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자신의 입술과 혀로 느끼는 김하윤의 입안이 지나치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에겐 김하윤의 입안은 다른 것을 넣는 곳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컹거리고 축축하고. 낯선 감각에 놀라 저도 모르게 숨이 흐트러졌다.

그러면서도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입맞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하여 무경은 확신을 얻었다.

이런 입맞춤을 했었구나.

탐욕이 끓어올랐다. 더 깊이, 더 많이 닿고 싶었다. 무경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하윤의 손을 마주 잡고 바닥에 내리눌렀다.

숨이 부족해진 하윤이 자신의 숨을 들이켜자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손으로 김하윤의 허벅지를 힘주어 쓸어 올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김하윤을 시험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무경은 자꾸만 쓰러지려는 이성을 붙잡으려 계속해서 되뇌었다. 자신이 정신이 없는 사이 김하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래, 이건 어쩔 수 없어.’

그러나 자신과 비슷한 반응이 와야 할 곳이 잠잠했다. 손끝으로 옷 위를 살살 긁고 크기를 가늠하듯 주물러 보기도 했으나 존재 여부만 느껴질 뿐 커지지 않았다.

무경이 아래를 만져 보느라 입맞춤이 느려지자 하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윤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부턴 자신이 제정신이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자신의 기준에선 지극히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중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경은 곧장 하윤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김하윤이 자는 얼굴인지 아닌지 확인했듯, 김하윤 또한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물론 구분 기준이 무엇인 줄은 몰랐으나 무경은 눈을 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무경아?”

김하윤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다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무경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윤의 어깨를 지분거렸다.

아직도 그는 김하윤에게 더 닿고 싶었다. 더, 더. 온전히 하나가 될 때까지. 한 줄 남은 이성의 끈이 그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어떻게 되든 달려들었을 것이다.

무경은 자기 자신을 달래며 하윤의 목덜미를 혀로 핥아 올렸다. 귓불을 입술로 물었다가 혀끝으로 건드렸다. 달랑거리는 작은 살점이 좋아서 계속 그렇게 물고 빨고 싶었다. 묵직하던 아래가 이제는 터질 것 같았다.

이성 없는 움직임이 이성이 있을 때도 다르지 않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성이 있음에도 이성이 없다면 그것은 없다는 것 아닌가. 짐승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인정하자 이제야 자신의 이상함이 이해되었다. 김희원이 돌아오고 난 뒤에는 스스로 욕구를 풀지도, 김하윤의 손을 빌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저도 모르는 사이 쌓였을 것이다.

일이 어찌 됐든 간에 무경은 하윤과 몸을 섞었고, 어느 정도 욕구를 풀어 오곤 했으니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 아니겠는가.

‘발정 난 짐승 새끼처럼.’

무경은 하윤이 풀어내지 못하도록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그러나 김하윤은 익숙한 듯 몸을 비틀었다.

“무경아, 잠시만.”

이전과 같이 지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그때와 달리 몸에 힘이 들어가긴 했으나 그 정도로는 무경을 뒤집을 순 없었다. 무경은 하윤을 골리듯이 몸을 바짝 맞댄 채로 움직였다. 김하윤이 뱉는 눌린 숨이 꼭 신음같이 느껴졌다. 무경은 이내 자신이 이런 행위를 즐겼다는 것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김하윤은 소리를 내지 않으니까 어디까지 소리를 내지 않을지 몰아세우려고 했고, 그 뒤에는…….

‘그 뒤에는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떠올리려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변명할 수 없는, 모순된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숱하게 많은 모순을 뱉었음에도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너, 씨. 아. 잠깐만. 너, 너……. 혹시.”

하윤은 말을 맺지 못했으나 뒤에 올 말이 무엇인지는 빤했다. 다른 사람도 그 애로 착각했는지는 몰라도 김하윤을 그 애로 착각한 빈도가 높긴 높으리라. 무경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만.’

아직 확인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 무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윤의 입술을 더듬었다. 열감이 느껴지는 젖은 입술의 감촉에 자신의 숨이 떨렸다.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말캉한 혀가 만져졌다.

손가락으로 혀를 죄듯 잡았다가 혀 아래를 누르듯이 밀어 넣자 손가락 사이가 축축해졌다. 다시 뒤로 뺐다가 밀어 넣자 하윤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오므렸다. 무경은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도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 또한 익숙하게 느껴졌다.

‘김하윤이 나를.’

이런 식으로 자신과 관계했던 걸까? 하기야 정신이 있을 때도 관계를 하긴 했으니 정신없는 중이라고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김하윤은 자신을 좋아했으니까. 무경은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떠올리며 이러니 자신이 속을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비겁한 변명이었다. 무경은 속으로 웃으며 김하윤의 턱 끝을 붙잡았다. 다시 확인차 입 맞추려는 그때 김하윤은 눈에 바짝 힘을 주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문질렀다.

그때부터 김하윤은 무경이 입을 맞추든 말든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다가, 나중에는 천장과 벽을 응시했다.

지금의 관계가 지나치게 익숙해서 지겨워 죽겠다는 듯이.

“…….”

그 순간, 의심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무경이 기억하는 삶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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