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하윤이 문을 움직이려 사고한 순간, 하윤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원형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이에 반응하듯 주변의 모든 문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윤은 자신의 공간처럼 주변에 산재한 문들을 보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때 자신이 어떻게 했던가. 하윤은 천천히 왼손을 들었다.
‘할 수 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그날의 감각이 다시금 손에 깃들었다. 가슴께가 뜨거워지며 옥구슬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이명같이 들렸다. 하윤은 시야 확보를 위해 열어 둔 문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응시했다.
문을 자신의 마음대로 닫을 수 있었다면 움직이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근거 하나 없는 억지에 가까웠으나 지금만은 그렇게 생각하고자 했다.
‘해야 하니까.’
무경은 어느새 헬기에서 내려 건물 옥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함께 파견된 대원들이 그를 엄호하고 섰고, 무경은 문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수많은 긴다리불가사리들을 염동력으로 감쌌다. 하윤은 자신의 문과 반응하고 있는 문들을 통해 무경이 힘을 펼치고 있는 범위를 산정했다.
‘조금만 더.’
하윤은 괴수들이 튀어나오고 있는 문틈까지 무경의 염동력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경의 기운은 하윤이 바라는 곳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문 아래의 긴다리불가사리들을 느리게 회전시켜 오목한 그릇 같은 모습으로 빚었다. 추가로 더 떨어질 긴다리불가사리들을 받아 내어 덩어리째 비교적 안전하게 사살하기 위해서였다.
껍데기가 철과 비슷한 성분이라 긴다리불가사리의 사체는 제법 선호도가 좋았다. 물론 이는 사후 처리 기준이지만.
‘어쨌든 더는 쇳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하윤은 문에 시선을 고정하며 왼손을 움직였다. 왼손은 문에 연결되기라도 한 양 움직여지지 않았다. 온 힘을 다 끌어모으고서야 아주 조금 움직였다. 팔에 힘줄이 서는 게 느껴졌다. 과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았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문인 만큼 틈새가 많았고, 미궁으로 산정할 수 있는 저쪽 세계는 문이 활짝 열린 채 가파르게 이쪽 세계의 문을 추격하고 있었다. 긴다리불가사리가 주로 튀어나오는 곳이라고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긴다리불가사리들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윤은 문이 이제까지 움직이던 궤도에서 틀어 버리기로 작정했다.
‘제발 좀 빨리 움직여라!’
본래 움직이던 관성이 있던 탓일까. 문은 하윤의 마음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좀!’
손목이 잘릴 듯이 옥죄어 오고, 콧등에서는 알싸한 느낌과 함께 핏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숨을 쉬기 어려워 입으로 거친 숨을 뱉으면서도 하윤은 계속해서 감각을 유지했다.
통증과 오기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목구멍을 메운 듯이 신음을 참고 있을 때, 왼손을 옥죄던 감각이 트이며 손목에서 흰빛을 띄는 고리가 떠올랐다. 하윤은 여전히 감각을 유지한 채 손목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리를 응시했다.
빛의 고리는 하윤을 감싼 채 천천히 회전하며 크기를 늘렸다. 고리는 무척 가벼운 것처럼 하윤의 숨결에도 흐트러졌으나 바람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왼손에 깃들었다. 하윤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왼손 손끝을 까딱였다.
그러자 빛의 고리가 더 강한 빛을 뿜더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떠한 모양을 만들려고 했다. 십 년 전 하윤이 미궁의 문을 열고, 다시 닫으려 했을 때처럼.
“…….”
[열쇠를 완성하렴.]
그날로부터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것 같은 선명한 부름이 다시금 떠올랐다.
‘열쇠.’
하윤은 그날 스승의 유언과 같이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김, 하윤.”
문을 움직여라.
“김하윤!”
비명같이 자신을 호명하자 고리는 음파를 따라 움직이듯 요동치다가 마침내 하윤의 이름을 만들었다. 이어진 선으로 만들었기에 언뜻 보면 알아보기 힘들 수 있었으나, 하윤은 분명하게 알아보았다.
“…….”
하윤은 숨죽인 채 눈동자만 움직여 자신이 움직이려는 문을 바라보았다. 손끝만 겨우 까딱일 수 있었던 손이 이제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윤은 오른손으로 온 힘을 다해 왼손을 밀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각!
거칠고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기묘한 파장이 하윤의 몸을 흔들었다. 하윤은 홀로 지진을 만난 것 같았다. 분명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있음에도 온 사방이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어느 순간부터 바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문의 소리만 그의 귀에 들릴 뿐이었다. 자신의 공간에서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들이 각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를 깨달은 순간, 하윤의 시각 또한 문들만 인식했다. 자신이 숨은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아득히 먼 곳에 자리한 문들 모두를 인식했다. 과도한 정보에 머리가 열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윤은 자전하는 세상을 따라 함께 움직이는 문들의 궤도를 읽었다. 그러자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문이 어디쯤 가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린 저쪽 세상과 닿지 않을 곳. 하윤은 최적의 위치를 찾아 문을 움직였다. 가기 싫다는 양 거친 소리를 내던 문은 어느새 하윤이 찾은 자리에 본래 있었던 것처럼 자리했다. 그 순간 하윤은 헐거운 문과 서로 맞대어 허락 없이 들어오려던 이계의 불청객을 인지했다.
무섭고 두려운 것은 아니나 꺼림칙한 삿된 것. 그 존재가 쏟는 집요한 탐욕이 다시금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쏟아 낸 분노 섞인 울부짖음을 뒤로하며 하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문만이 존재하던 세상이 아닌, 모든 것이 함께 있는 세상이 다시금 눈에 들어찼다. 쏟아지는 세상의 소음에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켰다.
“……!”
심장이 세차게 뛰어 온몸이 펄떡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윤은 벽에 몸을 기대 가까스로 선 채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열어 둔 문틈 새로 자신이 옮긴 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열린 채 빠르게 다가오던 이계의 문은 더는 이곳에 닿지 못했고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문틈 사이를 꾸역꾸역 비집고 나오던 긴다리불가사리들은 문에 짓이겨진 채 무경이 염동력으로 만든 그릇으로 떨어졌다.
무경은 곧장 그릇을 움직이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다가, 문득 하윤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화들짝 놀란 하윤은 곧장 문을 닫으며 몸을 숙였다.
급하게 숙인 탓일까. 하윤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급하게 바닥을 짚었으나 더는 몸을 지탱할 힘이 없었다.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엎드린 하윤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손등으로 대강 훔쳐 내려 했으나 간단히 훔쳐질 정도가 아니었다. 하윤은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손등에 묻은 피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십여 년 전 미궁의 문을 여닫을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었다.
“……힘들어 죽겠네.”
멍하니 있던 하윤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도 해냈다.
‘내가 씨발 진짜.’
해냈다.
하윤은 기침같이 웃음을 터트리다가 괜스레 주변에 있던 문을 건드렸다. 주변에 산재한 자잘한 문들은 하윤의 시선이 닫자마자 그의 의지대로 덜컥거렸다. 온 힘을 다 쥐어짰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힘을 잃지 않았다.
다만 이젠 주먹 하나 쥘 힘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땅을 후려치며 속 시원할 만큼 고함을 지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다가 가까스로 주먹 비슷하게 손 모양을 만들고선 좌우로 까딱였다.
어설픈 세리머니를 마치자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왼쪽 손목으로 향했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는 거야.’
이따금 손목이 아플 때마다 이상하다고 여기기는 했으나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근육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어서 늘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잠시 잠깐 욱신거리고 말았다.
그러면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하나밖에 없었다. 능력과 관련 있는 통증. 능력을 잃은 마당에 능력과 관련된 사항을 말하고 생각하기 싫었다. 에스퍼들을 대상으로 한 진료를 받아 봤자, 쓸데없는 검사 끝에 진통제나 처방받고 끝날 게 뻔했다.
아니, 처음엔 무서웠다. 이전보다 더 안 좋은 진단을 받을까 봐서. 그 뒤로는 이따금 아프니 대수롭지 않아 했고, 능력을 되찾은 최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죽으면 다 끝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죽을 수 없게 된 뒤에야, 살 수밖에 없게 된 뒤에야 하윤은 왼손의 통증에 의문을 풀었다. 또 터지듯 풀려나온 빛의 고리는 뭐란 말인가. 하윤은 오늘 본 고리와 비슷했던 선을 본 기억이 있었다.
‘김득철의 팔찌.’
그것을 스승인 서이주는 열쇠라고 했다.
‘선생님은 나한테 열쇠를 완성하라고 했었어.’
하윤은 서이주의 유지를 따라 그녀의 몸속에 있던 곡옥을 꺼내 열쇠를 완성했다. 그리고 미궁의 문을 닫고, 미궁이 닫히며 부서졌던 다른 문들도 닫겠노라 생각했다.
팔찌를 낀 손을 미궁을 향해 쳐들었을 때, 팔찌에 달린 무수히 많던 곡옥은 하윤이 힘을 쓰는 동안 바쁘게 흔들리며 낭랑한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한 알씩, 나중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수수 깨졌다. 그때마다 곡옥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하윤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수많은 이름이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마다 주변에 깨어진 문들이 수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미궁의 문을 닫을 땐 스승 서이주의 곡옥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 제 속에서 쩌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하윤은 마침내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왜 주변 문들부터 수복한 뒤에 미궁이 닫혔을까? 그것들로는 문을 닫지 못해서?’
안타깝게도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