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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86화 (86/162)

86화

하윤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폐쇄 구역으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풍경이 바뀌고 높낮이가 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하윤은 적당한 바위산을 발견했다.

‘저 사이로 떨어지면 시체조차 찾기 힘들겠지.’

죽은 줄도 모르리라. 좋은 장소를 고른 것 같아 하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윙윙 울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 기분 좋게 옷자락을 흔들었다. 가장 높은 바위 끄트머리에 선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조금 늦긴 했지만.’

본래 스스로 기한을 정했을 때, 하윤은 생일 전에 죽기로 했다. 혹 그사이 무경이 기억을 찾아서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웠기도 했고, 생일 뒤에 죽는 건 구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어찌어찌하다 생일 다음 날까지 와 버렸다.

그리고 무경은 하윤의 우려와 달리 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

몇 년을 그럴지도 모른다고 설레다가, 또 몇 년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괴로워했다. 마지막 날조차 그대로일 줄도 모르고.

‘그렇게 겁낼 일이 아니었는데.’

이제 한 걸음만 내디디면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대부분 죽으면 용서받으니까.

‘게다가 선생님이 남긴 말이나 곡옥도, 어차피 내가 죽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 일이야.’

자신의 몸 안에서 한데 뭉쳐졌을 곡옥도 그의 죽음으로 다시 산산이 조각날 것이다. 그러면 또다시 자잘한 곡옥이 될 것이고, 이전과 달리 새로운 문지기들이 많이 태어날 것이다. 즉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찌어찌 해결하지 않겠는가?

“…….”

문득 희원이 갇혔던 곳을 떠올리다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지금도 문지기 수는 적잖아. 많아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려.’

괜히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저지하겠다고 설치는 것보다, 시간이 그들을 녹슬게 하는 게 훨씬 나았다. 또 그편이 응보에 응한 것 아닌가? 그들이 문지기를 그렇게 죽이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을 테니까.

“이게 맞아.”

백번 생각해도 지금 죽는 게 맞다. 그러나 한 걸음, 아니 반걸음만 내디뎌도 될 위치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윤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는 끈질기게 울어 대다가, 잠시 멈추는가 하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하윤은 굳은 표정으로 미간을 긁다가 휴대전화를 절벽 아래로 집어 던졌다. 누가 전화했는지는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뒤, 하윤은 저 또한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래는 날카로운 바위가 즐비했고, 자신이 곧 곤죽이 되리라. 그러나 하윤은 아직 곤죽이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과 문이 계속해서 하윤을 삼켰다. 이미 뛰어내렸던 바위는 보이지도 않았고 수풀과 물, 그리고 잎 파란 나무들이 번갈아 보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들어서는 그것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문만 보였다.

머리부터 떨어지던 하윤의 몸은 점점 똑바로 세워졌고, 어느 순간엔 바닥을 딛고 서 있었다. 연이어 다가온 문들이 하윤을 삼키더니 주변은 시뻘겋게 변해 갔다. 하윤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고 있었다. 순간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하윤은 급히 몸을 숙이며 속을 게웠다. 그 흔적조차 금세 멀어지고, 마침내 ‘그곳’으로 향하는 문이 서너 개쯤 남았다. 꼭 끌려가는 것만 같아 겁이 덜컥 났다. 하윤은 버티듯 바닥을 짚으며 바락 소리 질렀다.

“나는 열지 않을 거야!”

그 순간에, 왼쪽 손목이 징 울리더니 하윤을 집어삼키기 위해 다가오던 문이 움직임을 멈췄다.

하윤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하윤의 가슴팍에서 뚝,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뼈 맞는 소리라기엔 맑고 가벼웠다. 하윤은 조심스레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윤을 삼켰던 문들이 다시금 하윤을 뱉기 시작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문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깜짝한 순간 하윤은 자신의 자취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윤은 스스로 뺨을 때렸다. 아프긴 하지만 그런다고 정신이 드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얼떨떨했다. 다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신발을 신은 채로 방 한가운데 서 있다는 점이었다.

“뭐야, 대체.”

언제 맺혔던지 이마와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시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하윤은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짜 징글맞다. 김하윤.’

무의식중에 능력을 쓴 게 틀림없었다. 산산이 조각나야 한다고, 서이주의 죽음을 떠올리다가 자신의 공간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나 보다. 더없이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으니 의식적인 연결이 있었지 않겠는가 하는 게 하윤의 가설이었다.

하윤은 자기 뺨 연신 후려갈겼다. 그것 하나 똑바로 못하냐고 스스로 다그쳤다. 뺨이 얼얼하고 열이 오르자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하윤은 곧장 문을 열어 자신이 뛰어내렸던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뛰어내린 순간, 하윤은 또다시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절벽 아래로 수십 번을 뛰어내렸지만, 김하윤은 조각나지 않았다. 땅에 닿기 전 수십, 수백 개의 문을 통과하여 충격 하나 받지 않고 자취방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이동해도 지나치는 문의 개수가 조금 달라질 뿐, 하윤은 목적에 다다를 수 없었다.

그러나 목숨에 지장 없는 부상은 달랐다. 바위에 긁히고, 나뭇가지에 찔리고. 피멍이 들거나 삐어 퉁퉁 붓거나, 손발톱이 들리고 찍혀 그 안에 피가 차는 일은 당연하다는 듯 몸에 남았다.

하윤은 스스로가 산산이 조각나서 죽는 것보다 골병이 들어 죽는 게 쉽겠다는 생각했다. 그때쯤이 다리가 풀려 절벽 아래가 아닌 옆 바위로 굴러떨어진 뒤였다. 하윤은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바위를 붙잡고 말았다.

“아…….”

당황해 아래를 보는 순간, 저를 삼키려 아가리를 벌린 문이 보였다. 하윤은 눈을 감고 탄식하다가, 바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래로 미끄러지기 무섭게 하윤은 문에 삼켜져 자취방 한가운데 떨어졌다.

똑같은 위치로 떨어졌으나, 몸이 말이 아닌 관계로 하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미 앞서 떨어지며 울분에 차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바람에 이제는 뭔갈 더 할 기운이 없었다. 하윤은 깔깔한 목으로 신음하며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좁은 방이라 누운 발끝이 중문을 건드렸다. 조금만 더 뻗어 신발을 벗어도 될 테지만 그것조차 할 힘이 없었다.

“……넌 어떻게 된 게 이런 것도 못해?”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끓었다. 분을 내는 것도 할 수 없어서 맥 빠진 눈물만 눈 옆으로 흘러내렸다. 홀로 있는 방인데도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윤은 울음을 흘리지 않으려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자신의 울음을 인지하자 더는 막을 수가, 참을 수가 없었다. 눌러 참은 게 서러웠던 것처럼 꺽꺽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중에는 숨을 쉴 수 없어 괴상한 소리를 내다가 좀 더 나중에는 울음을 내지 않았다.

그저 흘러내리는 대로 가만두었다가, 꽉꽉 막힌 코만 훌쩍였다. 그렇게 가만 내버려 두자 어느 순간에 눈물이 멈췄다. 울음에 흐트러진 숨이 볼썽사납게 새어 나왔지만, 이 또한 금세 그칠 것이다.

하윤은 눈물로 흠뻑 젖은 귓가와 목덜미를 훑었다. 슬픔이 대부분 그러하듯 손쓸 새도 없이 주르륵 흘러내려 구석진 곳에 고여 있었다.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앉은 하윤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들어올 때만 해도 끄트머리는 남아 있던 해가 이젠 온데간데없고, 하늘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

발끝을 까딱이자 아직 신고 있던 구두코가 만나 툭 소리를 냈다. 하윤은 슬그머니 손으로 주변을 훑었다. 사방이 흙투성이였다.

긴 한숨과 함께 한숨을 내쉰 하윤은 발로 신발을 벗어 현관으로 밀어냈다. 제멋대로 데굴데굴 구른 신발은 하나는 뒤집혀 하늘을 보고, 다른 하나는 얌전히 바닥을 향했다. 하지만 그것을 똑바로 고쳐 놓을 힘이, 마음이 없었다. 고작 신발 한 켤레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일 뿐인데도.

‘죽었어야 했는데.’

그저 멍하기만 했다. 머리도 멍하고, 몸은 몸살이 올 것처럼 무겁고 뼈마디가 쑤셨다. 살갗이 드러난 곳은 성한 곳이 없었다. 쓸려서 피가 났던지 딱지가 그득했다. 하윤은 뒤집히다 부러져 끄트머리만 붙어 있던 손톱을 툭 떼어 냈다.

‘도대체 왜 실패한 걸까.’

하윤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주변에 즐비한 무들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심한 손길이 상처를 건드렸던지 통증과 함께 손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툭툭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다가 하윤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차라리 총을 쏜다면.’

따라오기 힘든 외딴곳에서 총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절벽 위에서 쏘고 떨어지면? 그때도 문이 나를 삼켜도 이미 죽은 뒤니 괜찮지 않을까? 내 몸이 그놈들 손에 들어간다 해도 나는 이미 죽은 뒨데 상관있나?’

이 세상 사람들이 어찌 된다 한들 죽은 저와 상관이 있느냔 말이다. 하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가족들과 무경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그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윤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뒷일이야 모르겠고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어디서 봤던 긍정적인 문구를 제 편의에 맞게 들이대며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 그래, 총을 먼저 구하자.’

목적이 생기자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벗어던져 둔 신발을 찾아 퉁퉁 부은 발을 들이밀었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몸을 숙여 신발을 제대로 신으려다가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좁은 현관에 볼썽사납게 구겨지자 반사적으로 속이 꼬였다. 하윤은 벽에 기댄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과 화를 가라앉히며 마저 신발을 신었다. 요즘에 살이 빠져 헐겁다 느꼈었는데 오늘은 꽉 끼었다. 결국, 다시 벗어 구겨 신은 다음 벽을 짚고 일어났다.

“후우…….”

‘분명 타임캡슐이 있던 곳에 총이 있었어.’

제법 세월이 지났긴 했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다. 그곳은 서이주가 준비한 공간이니까. 어지간한 세월의 흐름 정도는 그 안에 있는 물건들에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곳에 타임캡슐도 숨겨 두지 않았던가.

“어…….”

타임캡슐.

자신이 떠나고 나면 무경은 타임캡슐을 찾을 수 있을까?

예전에 물었을 때 무경은 타임캡슐에 관한 것도, 그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에야 타임캡슐을 묻었다는 추억이 있다는 것 정도는 하윤에게 들어서 알지만,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진작 찾았겠지. 아니, 찾자고 했겠지.’

암만 자신이 싫더라도 찾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면 도움을 받아 찾았을 것이다. 지금껏 찾지 않았다면 그냥 찾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즉,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에 기억이 돌아왔을 때 찾고 싶으면 어쩌지?’

찾고 싶은데 저도 없고 서이주가 무경에게 아무런 단서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

하윤은 자신이 타임캡슐을 찾았던 때를 떠올렸다. 타임캡슐은 자신이 문지기이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늘 내가 무경이 곁에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남겨 뒀었겠지만. 이제 내가 없으면.’

무경은 어떻게 타임캡슐을 찾는단 말인가.

하윤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지금 데려가서 보여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주기 싫어.”

기억을 못 찾았으면 못 찾은 대로, 기억을 찾았으면 찾은 대로 주기 싫었다.

전자는 무경이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무경이 그것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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