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무경은 흐릿한 시야를 다잡으려 애썼다. 아직 눈앞이 흐릿한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몸을 휘감은 이불에 나른하게 얼굴과 발을 비볐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가 개고 자신이 누워 있는 위치를 인지한 순간, 무경은 더는 나른함에 잠겨 있을 수가 없었다.
“김하윤?”
무경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자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그는 평소에 잠들던 좌측이 아닌, 김하윤의 자리였던 우측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다못해 중앙을 어정쩡하게 넘어선 것도 아니었다.
김하윤이 집을 나간 이후에 홀로 침대를 쓸 때도 이런 적이 없었다. 무경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침대 밑을 바라보았다. 혹, 잠결에 자신을 피해 김하윤이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진 게 아닌가 생각해서였다.
“…….”
그러나 침대 밑은 텅 비어 있었다. 순간 얻어맞은 듯이 머리가 얼얼했다. 무경은 서둘러 방을 박차고 나왔다.
“김하윤!”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경은 기운을 푸는 것과 동시에 집 안의 모든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김하윤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물건도, 입었던 옷도 아무것도 없었다.
‘……또 나는 아무것도 없네?’
별안간 미아가 된 것 같았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갑자기 익숙하던 모든 것이 무서워지는.
무경은 잠시 눈만 끔뻑이다가, 베란다를 향해 달려갔다.
닫힌 베란다 문을 열고 방충망까지 열어젖히자 새벽 찬바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무경은 마디가 희어질 정도로 난간을 힘껏 부여잡았으나 고작 새벽 봄바람 하나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문틀에 무릎을 대고서야 가까스로 아래를 볼 수 있었다.
베란다 밑 아파트 화단은 푸른 새벽에 잠겨 파랗기만 할 뿐 잠잠했다. 그가 숱하게 꿈으로 봤던 산산이 조각 난 김하윤은 보이지 않았다. 확인을 마쳤으나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무경은 조심스레 난간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집 안엔 김하윤이 없었다. 화단에 떨어진 것도 아니면 제 발로 걸어 나갔다는 것인데 무경은 하윤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깊이 잠들었다고?’
무경은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자던 사람이 하윤이 아니라 다른 위험인물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무경은 목덜미를 손으로 훑으며 계속해서 기운을 퍼트렸다.
그때, 아파트 단지 외곽에 자리한 흡연장에서 익숙한 기척이 잡혔다.
“…….”
본래 흡연장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마련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워낙 외진 곳이고 볕도 잘 들지 않아 흡연자들만 그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흡연장이 된 곳이었다.
흡연장인 만큼 하윤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축 늘어진 것을 보니 머리가 덜 말랐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김하윤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무경은 급히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초조해 몇 번이고 입술을 씹었다.
“빨리 좀.”
무경은 엘리베이터를 재촉하며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밤사이 차가워진 쇠로 된 난간을 쥐는 바람에 냉기가 스민 탓인지, 아니면 초조한 탓인지 주먹을 풀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꾸만 모래 빠져나가는 느낌이 나서 괜스레 주먹을 보게 되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엘리베이터 띵 하는 소리에 무경은 그 이유를 떠올렸다.
아, 꿈 때문에.
꿈에서 □□이 모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런 게 사실일 리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것만 생생해서는 꿈을 깨고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무경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시선을 올렸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일 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자 베란다에서 쐬었던 것보다 짙은 봄내음이 담긴 바람이 불었다. 꽃잎과 흙먼지가 섞인 다소 어지러운 바람이었다.
‘흙냄새.’
무경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샌가 내내 쥐고 있던 주먹이 풀렸다. 당연하게도 빈 손바닥을 보던 무경은 눈을 깜빡였다.
꿈을 꿨는데…….
‘그게 뭐였더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또다시 미아가 된 기분이 밀려들었다. 무경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것에 정신 팔릴 때가 아니었다. 김하윤을 찾으러 가야 했다.
김하윤을 찾으면 아침을 먹여야지.
깡마른 몸을 안았을 때 얼마나 불안했던지. 당장 먹는다고 살이 붙진 않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입에 넣어 줘야 했다. 그래야 몸이 덜 상할 테니까.
그리고 왜 말도 안 하고 그냥 갔냐고 따져 물어야지.
‘그런데 내가 언제 김하윤을 안은 적이 있었던가?’
무경은 기억을 더듬다가 어젯밤 잠든 김하윤을 차로 옮겼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 그때. 그때 그랬었지.’
그때 키만 길쭉한 김하윤을 안고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갔어야지.’
무경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화면을 나갔다가 들어와도 새로 온 문자 메시지가 없었다.
‘이것 봐. 아무 연락도 안 남겨 뒀잖아.’
김하윤은 늘 자신의 연락을 귀찮아했다. 사람이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전화를 안 받거나 답장을 안 하기도 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면 볼 거 아니냐면서. 보기 전까진 사람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
무경은 문득 자기 생각이 의아해 고개를 기울였다. 김하윤이 언제 자신의 연락을 무시한 적이 있던가? 오히려 자신이 안 받으면 안 받았었다. 문자 메시지만 해도 자신은 대답한 적이 없고 김하윤 홀로 떠들기 바빴다.
무경은 문자 메시지 위에 자리한 날짜를 눈으로 훑었다. 하루에도 몇 통씩 오던 문자 메시지가 최근 들어 크게 준 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많이 오든 적게 오든 자신은 답장하지 않을 건데.
‘그래, 맞아.’
무경은 서둘러 휴대전화의 화면을 끄고 걸음을 옮겼다. 흡연장이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제법 걸어야 했다. 어느새 무경의 걸음은 뛰는 것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밥도 먹일 게 아니고 그렇다고 인사도 할 것도 아니면 김하윤을 찾아갈 필요가 있나?’
김하윤의 회사는 무경의 집에서 출근할 때 두 시간여가 필요했다. 지금은 아직 파란 새벽이기는 하지만 곧 세상은 희게 밝아질 것이다. 본래 김하윤의 출근 시간은 일렀으니 지금 간다고 해도 평소보다 조금 빠른 시간일 뿐이었다.
게다가 출근 시간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도 정작 움직이다 보면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이르지 않게 될 때가 많았다. 특히나 김하윤같이 장거리 통근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고.
‘그리고 차라리 연락 없이 간 게 김하윤의 처지에선 나았을지도.’
무경은 흔치 않게 하윤의 역성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침에 김하윤을 봤으면 분명…….’
매일같이 벼르는 미움도 어느 순간에 무뎌질 때가 있었다. 미워하는 게 지치고 힘들 때, 혹은 미움일지라도 익숙함에서 찾아오는 편안함을 느낄 때 등. 그럴 때면 무경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음식점에서 누가 멋대로 틀어 놓은 TV 채널같이 떠오른 장면을 생각하거나 꿈을 꾸곤 했다.
그 속에서 무경은 김하윤과 평온하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 시간에 각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거나, 아니면 휴일에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동안에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혹은 김하윤이 ‘무경아.’ 하고 부르면 자신은 ‘하윤아.’ 하고 대답하는 있을 리 없는 그런 일들도 있었다.
무경과 하윤은 안락해져선 안 됐기 때문에, 무경은 그럴 때마다 하윤을 매섭게 몰아세웠다. 아마 오늘 아침도 그랬을지도 몰랐다. 행복한 꿈을 꿔서 김하윤을 더 몰아세웠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 내가 행복한 꿈을 꿨던가?’
일어날 때 나른했던 걸 생각하면 좋은 꿈인데, 조금 전에 떠올린 건 불안이었다. 어쩌면 불안한 꿈을 꾼 뒤에 이를 달래듯 행복한 꿈을 꿨을지도 몰랐다.
‘그랬으니 기분 좋게 일어났겠지.’
무경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지금이야말로 김하윤을 만나면 안 되는 순간 아닌가? 자신의 물음에 무경은 곧장 반박했다.
‘하지만 밥을.’
자신이 언제 김하윤의 밥을 챙겼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랐는데. 어제 피곤해하기도 했고.’
자신이 언제 김하윤의 몸을 챙겼다고.
얕은 변명은 떠올리는 족족 틀어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김하윤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냥. 그래, 그냥.’
그냥. 그런 이유로 김하윤의 얼굴을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무경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금 움직였다. 어느새 새벽이 희게 밝아오고 있었고,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무경은 아직 하윤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소리가 닿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무경은 거기 가만있으라는 말을 소리 내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무경의 걸음은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점점 뛰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그냥 얼굴을 봐야 하는데 김하윤이 이대로 가 버릴까 봐.
흡연장의 정자 꼭지가 조경수 사이로 빼꼼 보였다. 아직 김하윤이 보이지 않았으나 무경은 급한 마음에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내 소리 나지 않던 목소리가 어쩐 일에서인지, 아니면 이 또한 그냥일는지 또렷한 소리를 냈다.
“하윤아!”
그러나 소리를 맺기 전에, 무경이 다급히 입을 벌리던 그 순간에 무경의 고민이 무색하게 김하윤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덜어 낸 것처럼.
‘제발 좀 자라. 제발 좀!’
무경에게 깔려 정신없이 흔들리는 내내 하윤은 무경이 잠들길 빌었다. 그러나 하윤의 기원이 무색하게 무경은 잠들지 않았다.
“……진짜 제발.”
잠결에 무경이 자신을 더듬었을 때, 하윤은 그가 평소같이 폭주했다고 생각했다. 희원을 처음 보고 온 날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놀라서 폭주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무경이 꼭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하윤은 꼭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이대로 무경이 눈을 뜰 것만 같았다.
무경이 어렸을 때처럼 자신을 더듬는 순간 내내 하윤은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쏟아지는 다정함이 죄악이 되어 하윤을 짓눌렀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기 바빴다.
하윤은 차라리 빨리 끝나길 빌며 무경의 행동에 동조했다. 물론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꼬리같이 달라붙었었으나 하윤은 이를 습관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오래도록 무경은 하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비비며 입을 맞추고 흔적을 남겼다. 목 위에 남기는 것은 막긴 막았으나 다 막아 냈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초조하게 눈동자만 굴려 대던 차에 마침내 무경의 손길이 둔해졌다.
마침내 손이 멈추고 숨소리가 바뀌었다. 하윤은 조심스레 무경의 품을 빠져나왔다.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으나 무경을 이대로 둘 수 없었다.
무경의 아래를 조심스레 닦고 옷을 입힌 후, 저를 찾는 무경의 손에 이불을 들려 주었다. 잠들어 있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욕실에 들어가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머리와 콧대가 얼얼하더니 기어코 코피가 쏟아졌다. 휴지를 뜯어 코를 막아야 하는데 손이 닿지 않았다. 일어날 힘이 없어 셔츠를 벗어 핏물을 닦았다.
‘어차피 내가 입어서 버릴 것 같고.’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속옷에 있었다. 하윤은 앉은 채로 입고 있던 속옷을 벗었다.
‘이걸 빨기도 그렇고.’
하윤은 알몸으로 속옷 빨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상상만 해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냥 버리는 게 백번 천번 나았다. 하윤은 씻고 나오자마자 옷을 비닐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불룩해진 가방을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멀쩡한 기분일 수는 없으리라.
대강 몸의 물기를 닦아 낸 하윤은 옷을 꿰어 입고 [문]을 열었다. 길을 뚫으면 그만이지만 이 집에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신발을 손에 들고 자신이 아는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아파트 외곽에 있는 흡연장이라 새벽녘에는 사람이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담배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하윤을 맞았다. 이전이라면 질색했을 냄새였으나 오늘은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피워도 왜 피우는지 몰랐는데,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방에 남아 있던 담배를 찾아 한 대 태우며 밀려드는 회의감이 그저 지나가길 기다렸다. 물론 다 지나가기 전에 저혈당이 먼저 찾아와 하윤의 손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어지럼증과 함께 또다시 콧대가 알싸했다. 결국, 한 대를 다 태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CCTV가 비추지 않는 사각지대로 향하며 남은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다 문득 최악만 가득하던 회의감의 물결 속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을 찾아냈다.
‘무경이가 아직 깨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것만은 정말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