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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80화 (80/162)

80화

백무경에게 김하윤은 끔찍한 존재였다.

그는 함께한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무경에게 불가해의 존재였고, 아마도 이어질 삶에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그를 이해할 수 없음이 아니라 그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가 미워서 앞으로 이어질 생이 불행하길 바랐고 절망하길 바랐다. 왜냐하면, 그가 김희원의 자리를 넘봤고 또 그 대신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희원이 살아 돌아왔다.

그리하여 무경에겐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 번째로 김하윤의 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십여 년을 빌빌거린 것을 대가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그것은 단순히 김하윤이 미련으로 자처한 일로 치부해야 할까.

아니다. 그들의 처벌은 자신이나 김하윤 스스로가 정할 것이 아니라 김희원이 내려야 했다. 김희원만이 무고하므로.

그가 김하윤이 벌을 덜 받았다고 한다면 김하윤은 벌을 더 받아야 했다.

“…….”

그리고 두 번째로는 백무경 자신의 처벌이었다.

조각인 김희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은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 단순히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얼떨떨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에 무경은 희원에게서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애틋해야 할 존재가 도리어 거북스러웠다.

같은 극의 자석을 맞댄 듯이 도무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이는 김희원도 비슷해서 무경과 면회할 때 입을 여는 횟수가 적었다.

그가 자신의 조각이고 자신은 그의 조각이라는 건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인데.

어쩌면 김하윤을 미워하는 데 삶의 목적과 감정을 소모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김희원과 김하윤이 만났을 때, 하윤이 희원의 손을 낚아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던 그 순간에도 무경은 김하윤이 미워 어쩔 줄 몰랐다.

저한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박건영만 돌아보는 것도 그랬고, 또…….

“김하윤.”

무경은 의무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하윤을 불렀다. 핼쑥한 낯으로 축 늘어져 있는 꼴이 어떤 날을 연상시키게 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기야 김하윤과 관련해서 좋았던 날은 없긴 했지만.

무경은 하윤의 손등에 손끝을 갖다 댔다. 살갗을 꾹 눌러도 깨지 않았다. 평소라면 자신이 닿자마자 화들짝 놀라 눈을 떴을 텐데.

“…….”

찌르듯 누르고 있던 손을 떼었다가 다시 슬그머니 손등을 마주 댔다. 하윤은 여전히 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눈은 굳게 닫혀 있고 호흡은 일정했다. 낯이 조금 파리했지만 그건 집에 돌아간 뒤에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고 수면하면 자연스럽게 회복할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의 멍도.

‘사내새끼가 밖에서 처맞고 돌아다니기나 하고.’

맞은 곳을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 봤기 때문일까. 그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뺨에 제법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본 탓이겠지.’

무경은 멍 자국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뺨 부근을 맴돌기만 할 뿐 만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셔츠 옷깃을 살짝 젖혔다. 자신이 때린 곳도 제법 선명하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무경은 하윤이 이렇게 멍들기 쉬웠던가 생각하다가 손을 뗐다.

이러다가 김하윤을 진짜 깨울 것 같았다.

지금 있는 곳은 일종의 기밀 시설로 보안이 중요한 곳이었다. 텔레포터들은 공감각이 뛰어나 기밀 유지가 중요한 건물 내 출입하기 위해선 감각을 제한해야 했다. 그러나 정신계 능력자 박건영이 시술에 실패하는 바람에 무경이 손을 써야 했다.

의무실에서 나온 진료 내용을 보면 초능력이나 물리적인 충격으로 겪는 어지러움이 아니리라고 했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태로는 또다시 시술하거나 물리적으로 기절시킬 순 없어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복용시켰다. 다행히 약이 잘 들었는지 김하윤은 금세 잠이 들었다. 어지간해선 대여섯 시간 안엔 깨지 않으니 이동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무경은 괜히 불안했다.

상태를 확인하는 장치를 부착하고, 눈을 가리는 등의 사전 준비를 마치고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 어쩌면 김하윤과 닿는 게 꺼림칙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후.”

무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심해도 뾰족한 방법이 생기진 않았다. 어찌 보면 지금 방법이 가장 약식에 온건한 방법이었다.

이미 자는 사람을 때려서 기절시키거나 시술을 걸 순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시술을 걸 수 있는 박건영은 퇴근한 지 오래였다.

‘어디 가서 일러바치고 있을지도 모르지.’

무경은 미간을 찡그리다가 하윤을 안아 들었다. 건물 내부만 아니었더라면 초능력을 썼으면 됐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윤을 안아 든 무경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김하윤의 몸이 제 몸과 붙는 느낌 때문이었다. 무경은 아래를 보지 않게 주의하며 걸음을 옮겼다. 누가 보면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기에 걸음은 점차 크고 빨라졌다.

그 때문이었을까. 하윤의 머리가 자꾸만 흔들리며 무경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무경은 잠시 멈춰 선 뒤 하윤을 좀 더 위로 올린 다음, 흔들리지 않도록 손으로 목과 머리를 단단히 받쳤다. 그러다 보니 김하윤의 숨이 자연스레 무경의 목을 간질였다.

‘집에, 집에 가자.’

하루 끝에선 시점이라 몸이 고단했다.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더는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무경은 그답지 않게 가쁜 숨을 내쉬었다.

미리 출차 요청을 해 둔 덕에 곧바로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곧장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전 입력한 일회성 코드에 따라 나가는 경로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부여된 경로대로 차량용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무경은 하윤의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벌려 냄새를 맡았으나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다.

‘손을 씻어선가.’

하지만 오늘 만났을 적엔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희원이 담배 냄새에 유난스레 예민한 것일까?

‘하기야.’

어렴풋이 희원이 모친의 담배 냄새를 싫어했던 것이 생각났다. 무경은 희원이 그랬듯 하윤의 손을 천천히 쓸다가 구부린 손끝을 걸었다.

‘어떻게 잊겠어. 만지기만 해도 다 아는데.’

무경은 희원이 했던 말을 뇌까리다가 시선을 올렸다. 그러곤 안대를 낀 김하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김하윤에 관해서 가장 잘 아는 건 무경이었다. 십여 년을 함께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김하윤은 워낙 거슬려서 기척을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무경은 김하윤이 자신의 힘이 뻗는 범위 내에 있다면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해 보지도 않았고 할 생각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또 위치를 인식한 후면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초능력에 의지하지 않아도 김하윤이 알아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시끄럽다고 타박을 줘도 은근슬쩍 흘리기 일쑤였다.

집을 나간 뒤라고 다를 건 없었다. 김하윤은 아침저녁으로 무경에게 문자를 보냈으니까. 아마 흡연에 관해서도 조만간 말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무경은 만질 필요도 없었다. 이미 알았고 곧 알게 될 테니까.

‘거기다 흡연이 뭐라고.’

성인인데 피울 수도 있지. 무경은 속으로 대꾸하다가 하윤의 손을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 남은 숨을 다 뱉은 뒤 무경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앞을 보고 있었지만 모든 감각은 옆자리에 있는 김하윤에게 쏠렸다. 그가 어떤 모양으로 잠들어 있는지, 정말 잠이 들었는지 등을 느끼고 있었다. 김하윤은 무경이 창문에 머리를 기대게 했음에도 어느새 앞으로 기울어져 안전띠에 뺨을 덧대고 있었다.

무경은 초능력을 이용해 김하윤의 고개를 가누게 하려 했으나, 시도와 달리 김하윤의 고개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 자신이 능력을 쓰지 않은 것인가 싶어 안전띠를 움직이자 이번에는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 바람에 안전띠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하윤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무경이 재빨리 손으로 막지 않았다면 글러브박스에 머리를 처박았을 것이다.

“김……!”

하윤을 부르려던 무경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놀란 것과 상관없다는 양 김하윤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무경은 앓는 숨을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안전띠를 움직인 자신의 탓인데도 김하윤에게 습관적으로 화를 내려 했다. 무경은 시트를 뒤로 조금 젖힌 다음 하윤이 창에 기대게 했다.

고개를 기울일 때 불편했던지 김하윤이 얼굴을 흔들었고 무경의 손바닥에 하윤의 코끝과 입술이 스쳤다. 이전 같았으면 질겁하며 그를 뿌리쳤겠으나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무경은 하윤의 얼굴이 닿은 손을 움츠렸다.

그러든 말든 하윤은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침 차가 출구에 도착해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경은 김하윤의 뺨에 남은 멍 자국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곤 저녁 무렵에 그랬던 것처럼 김하윤의 턱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김하윤의 뺨에 남은 멍 자국과 자신의 엄지손가락이 짓누르는 곳이 겹쳤다.

“…….”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컴컴하게 느껴졌다. 무경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운전대를 그러쥐며 눈을 깜빡였다.

때마침 출차하라는 알림이 깜빡였다. 무경은 알림을 핑계 삼아 황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시간이 늦다 못해 통행 제한 시간에 돌입해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심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가슴의 두근거림과 손바닥 아래 뭉개졌던 입술의 감촉을 지워 내지 못했다. 괜히 화풀이하듯 운전대를 두드릴 때, 김하윤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대여섯 시간은 잠들 것이라던 김하윤은 약을 먹은 지 겨우 두 시간여가 지난 시점에 눈을 떴다. 깨자마자 안대를 벗어 던진 그는 무경이 싫어하는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무경이 한소리 하자 졸음이 그득한 눈으로 부근에 내려 달라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무경이 장담하건대 지금 김하윤은 자기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집에 간단 말인가. 통행 제한 시간대라 대중교통도 운행을 중단했다. 지하철에 내려가 봤자 신분증을 맡기고 대피소에서 밤을 지내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김하윤의 말을 들어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랬다간 객사라도 할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자꾸만 군소리를 웅얼거리는 김하윤에게 윽박질러 입을 다물게 하곤 집으로 향했다. 무경의 예상대로 김하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갈게.”

무경은 대꾸하는 대신 김하윤을 부축했다. 말이 부축이지 기실 그를 거의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걷는 게 싫었던지 김하윤은 무경이 현관문을 열자 황급히 그의 품을 벗어났다. 벽을 짚으며 가는 꼴이 아주 우스웠다.

무경은 김하윤이 사라진 현관에 서서 오래된 습관으로 바닥을 눈으로 훑었다. 삐뚤게 놓인 김하윤의 신발을 정리하고 자신은 김하윤의 신발 반대편에 가지런히 벗었다.

내내 텅 비어 있던 곳이 오랜만에 채워졌다. 무경은 저도 모르게 낯을 들썩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이 무색하게 김하윤은 거실에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누가 보면 십여 년을 산 집이 아니라 처음 와 보는 사람인 줄 알 것이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 짐이 하나도 없잖아.”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 룸에 가기도 그렇고, 바깥에서 뒹군 옷을 입고 안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도 없다. 남은 건 씻는 것인데 입었던 옷을 또 입어야 하나 싶어서 그조차 하지 못한다. 김하윤의 토로에 무경은 코웃음 쳤다.

“그 정도도 안 줄까 봐. 기다려.”

“…….”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것을 보아하니 자신이 안 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경은 하윤을 한번 흘겨보고는 드레스 룸에 들어가 새 흰 티셔츠와 속옷을 꺼내 주었다.

“바지도 필요해?”

잠옷으로 입을 만한 바지는 새것이 보이지 않았다. 무경은 버리는 셈 치려고 운동용 반바지를 꺼내 왔으나 하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하룻밤 자는 건데 대충 입고 자지 뭐.”

말이 하룻밤이지 출근 시간을 생각하면 잘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하윤은 갈아입을 옷을 받자 욕실에 들어가려 했다.

“김하윤.”

“……응?”

“요기라도 하고 씻지? 씻고 나서 먹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아니야, 괜찮아. 나 아까 저녁 먹었었어.”

“언제?”

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녁 내내 같이 있었고, 무경은 함께 하는 내내 김하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었다. 그런 그가 모르게 식사를 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하윤은 뻔뻔스레 거짓말을 했다.

“너랑 만나기 전에. 시간이 애매하게 떠서 간단하게 먹었어.”

“뭐 먹었는데?”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나 김하윤의 작태가 괘씸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김하윤은 놀랐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일이 다 있네. 네가 나 뭐 먹었는지를 다 묻고.”

“그래서 뭘 먹었냐고.”

“……백반?”

무경이 지그시 바라보자 매일 반찬이 바뀌는 집이라 주는 대로 먹었노라고 말을 덧붙였다.

“너야말로 더 늦기 전에 뭐라도 좀 먹어야지. 난 씻으러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

김하윤은 말을 하면서 옷을 벗었다. 무경이 시선을 거두지 않자 신경 쓰였던지 위아래 한 장씩 남기곤 욕실에 들어갔다. 욕실 문 닫히는 소리에 무경은 그제야 망부석같이 굳어 있던 몸을 돌렸다.

그러곤 하윤의 말대로 요기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간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도시락이 같은 메뉴로 둘씩 쌓여 있었다.

딱히 입맛이 없어 도시락을 대강 뒤지다가, 샐러드를 꺼내 식탁에 앉았다. 그러나 바로 먹지 않고 가만히 앉은 채로 애먼 도시락통 끄트머리만 노려보았다. 살짝 시선을 들자 약간 어둑한 반대편 자리가 보였다.

“…….”

고단한 하루라 그런지 식사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무경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에야 비로소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한 게 무색하게 무경은 금세 입을 닫았다. 포크로 풀만 뒤적거리다가 이내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물만 벌컥 마시고 있자 샤워를 끝낸 김하윤이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김하윤은 신장이 큰 편인데도 자신이 준 셔츠의 품이 제법 남았다. 살이 빠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빠진 줄은 몰랐다.

“무경아, 밥 먹었어?”

무경은 하윤의 허벅지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놀라는 줄도 모르고 하윤은 수건으로 머리칼을 말리며 마저 물었다.

“뭐 먹었어?”

“……그냥, 도시락.”

“에이, 무슨 도시락인데. 냉장고에 도시락만 가득한 거 누가 모를까 봐.”

무슨 도시락인지 말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에 몸을 돌렸다.

“말 안 해 줄 거야?”

“궁금하면 직접 보든가.”

귀찮더라도 뭐든 챙겨 먹으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저희 사이에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무경은 저를 바라보는 하윤을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으나 시야만 잠겼을 뿐, 감각은 여전했다.

무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윤의 얼굴을 살폈다. 하윤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가 곧장 몸을 돌렸다. 소파에 앉아 TV를 켜고, 몸을 늘어트렸다. 무경은 어느새 표정이 사라진 하윤의 얼굴을 확인하다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잡념이 좀처럼 떠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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