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박건영이 내민 증명사진 속엔 약간 흐릿한 인상에 짧은 머리카락, 그리고 익숙한 교복을 입고 있는 앳된 소년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앨범에서 잘랐던지 아래에 친절하게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김 희 원
하윤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그는 사진 두 장을 더 꺼냈다. 하나는 하윤의 중학교 졸업앨범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중학생 때 김희원이고, 이건 당신 거.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김희원 잡아 왔을 때 찍은 사진.”
박건영의 설명을 들으며 하윤은 김희원의 최근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꼭 어릴 적 자신을 흉내 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 하윤을 아는 사람이라면 김희원이 누굴 따라 모습을 꾸민 것인지 알 법한.
“…….”
하윤은 한숨과 함께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신과 박건영을 지켜보고 있을 백무경을 위해.
“……그러면 속으니까.”
“예?”
“그렇게 말해야 속으니까 거짓말을 했어요. 속이려면 상대가 속을 만한 말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애당초 왜 속이려고……!”
“도저히 못 믿겠다잖아요.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하잖아요.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 기억만 구명줄인 것처럼 잡고 있는데 제가 뺏을 수 있겠어요?”
어차피 무경은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믿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 참.”
“그리고 당신들도 안 말리더라고.”
백무경에게 자신의 존재가 해악이 됐다면 진작 조처했을 것이다. 당시 능력을 잃은 자신과 달리 백무경은 우수한 인적자원이었으니까.
무경이 스스로 폭주를 의도해 관리 대상이 되었다고 한들 대규모로 폭주한 적은 없었다. 방송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에스퍼들이 일으키는 스캔들을 보도했다. 그들에 비하면 무경이 자잘한 폭주는 없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런 만큼 무경의 신경은 하윤에게 쏠려 있었다. 하윤을 미워하고 불행하게 하려고 그 자신 또한 불행에 처박았다. 감히 김희원을 잃어버린 주제에 행복해선 안 되기 때문에.
이를테면 백무경의 현 상태는 제어 가능한 안정적인 불안이라는 것이다.
백무경의 윗선, 그러니까 그를 관리하는 처지에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랬으니 지금껏 나를 떼어 내지 않은 것이겠지.’
무경의 곁에 있을 때는 시야가 매몰되어 보이지 않던 것이 조금 떨어졌다고 눈에 들어왔다.
‘무경을 고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칠 생각도 딱히 없다.’
그런 중에 김희원이 나타났다. 그것도 십 년 전의 김하윤의 모습을 흉내 내고서.
“당신 주변에 지금은 몇이나 압니까? 내가 백무경 조각인 거.”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 박건영은 하윤처럼 입가에 손을 올리며 나직이 대답했다.
“……몇 없어. 서넛?”
“알 사람은 다 안다는 소리군.”
다 죽거나 은퇴한 줄 알았더니. 하윤이 작게 덧붙이자 박건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그렇지. 아직까지 붙어 계신 터라 아무래도 앉은 자리가 높거든. 그런 사람들이 알리려고 하면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지니까.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는데.”
“……?”
“분명히 아는 이야기였는데, 김희원 이름이 나오고 다시 백 소령의 이야기를 파는 동안에도 그게 기억이 안 나더라고.”
하윤은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리며 박건영을 눈짓했다. 그냥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용케 알아들었는지 박건영은 코웃음 치며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혹시 제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니죠, 당연히.”
“그렇죠, 당연하죠. 보통 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머리가 나쁘고 싶어도 나쁠 수가 없거든.”
“예에에. 아, 그러시구나.”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박건영의 말이 내심 거슬렸다. 단순히 까먹은 것이 아니리라. 하윤과 무경에게 걸린 금제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하윤은 금제에 관해 묻기보다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어쩌다가 다시 기억해 내셨습니까?”
“동문이라고 해야 하나.”
“……?”
“전치우라는 이름을 압니까?”
하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이름도 다 생각나지 않는데, 하물며 동문 수준으로 두루뭉술해서야.
“뭐, 그럴 것 같긴 했습니다. 저도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분이 한 말을 곱씹다가 보니 김하윤씨가 생각나더군요. 서이주의 제자, 김하윤이.”
“…….”
“어쨌든 이건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일단 협조 좀 해 줘야겠습니다. 김하윤 씨한테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아니, 협조해야 도와 드릴 수 있어요.”
“……협조라.”
“김희원한테 엮인 놈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 테고. 사진 보면 누가 제일 위험할지 감이 오지 않습니까?”
“……누군데요?”
“그건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고 잡겠다, 잡지 않겠다 정도만 말씀하세요.”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결정합니까?”
“상황이 긴박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무슨 줄인지 분간해서 잡을 겁니까?”
“암만 급하다고 해서 썩은 줄을 잡을 순 없잖아요. 살려고 잡은 건데, 썩어서 끊어지면? 게다가 썩은 걸 몸에 두른다는 게 좀…….”
박건영은 하윤의 너스레에 이상하게 웃었다.
“김하윤 씨. 재밌는 사람이었네요. 십 년 전에 봤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땐 저한테 말도 못 거셨을 텐데.”
“왜요? 그 정도로 대단하신 몸이었나요?”
“해석은 마음대로 하세요.”
하윤은 ‘네가 고추 달린 시커먼 사내새끼에 정신계 능력자라서 내 눈에 띄기 전에 백무경에게 걸러졌을 것이다.’라는 말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능력이 잃었어도 대단한 몸이 된 것 같은데 내 몸 의지할 선택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부정할 수는 없겠군요. 확실히 중요한 몸이긴 하니까.”
“…….”
“하지만 설명은 다음에 하도록 합시다. 사실 진짜 여기서 설명하기 복잡해서 그래요. 정말 여기까지 말하려던 건 아니거든.”
박건영은 하윤이 들고 있던 사진을 눈짓했다. 하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사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사진 뒷장에 덧대어져 있던 종이 한 장을 밀어냈다.
“이런 구닥다리 수법을 쓸 줄 몰랐는데.”
이것까진 말하진 않으려 했는데 같은 말을 하기엔 준비를 했고, 또 미리 준비했다는 측면에서 볼 땐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 새끼 진짜 어정쩡하네.’
하윤은 속으로 박건영에게 박한 평가를 남겼다.
“클래식의 품격이라고 해 줄래요?”
클래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윤은 속으로 혀를 차며 사진은 박건영에게 돌려주고 연락처가 적힌 종이는 옷 속에 숨겼다.
“이건 안 드려도 되겠습니까?”
박건영은 사진 중에서 하윤의 사진을 들어 보였다.
“…….”
사진 속에는 막 고등 교육 기관에 입학했을 때의 하윤이 찍혀 있었다. 조금 품이 큰 교복을 입은 채로 몸을 살짝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똑같은 교복을 입은 무경이 하윤의 가방까지 둘러멘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진을 바라보던 하윤은 작게 웃었다. 사진이 찍혔던 무렵에 무경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남자일 때도 있었고 여자일 때도 있었고, 혹은 한국인이 아닐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게 마냥 부러워 무경에게 심술을 부렸던 적도 있었다.
‘웃기지도 않지.’
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진을 받았다. 절 찍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나오지 않았던가. 문득 미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욕심이 질책을 이겼다. 혹여 무경에게 들킬까 봐 가방 깊숙이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신은 안 만지더라도 눈은 좀 만져야겠는데요. 이게 공식적으로 필요한 절차라서.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신경을 좀 둔하게 만드는 거예요.”
하윤은 박건영의 손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인즉 정신을 건드려서 신경을 둔하게 만든다는 뜻인 듯했다.
“대단한 일은 자꾸 별일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아휴, 괜찮아요. 괜찮아. 제가 몇 명을 건드려 봤는지 아십니까.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요.”
하윤은 짜증스레 눈을 치켜뜨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에게 듣지 않아도 눈을 가릴 것이란 예상은 어느 정도 했었다. 그게 평범한 방식이 아니리라는 것 또한.
하윤이 체념하자 박건영은 손을 내밀어 하윤의 턱 끝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아서 고개를 많이 돌리시더라고요. 그냥 가볍게만 잡고 있을게요.”
마주한 박건영의 눈에서 액체가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액체는 눈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그저 눈 안에서만 들끓었다. 액체를 따라 박건영의 검은자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한계에 다다른 듯 툭 터졌는데, 순식간에 그의 눈이 먹이라도 번진 것처럼 까맣게 물들었다.
“물이 차오를 건데, 별로 이상한 건 아니에요.”
박건영이 나지막하게 속삭였으나 물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발밑에 뭔가 찰랑이는가 싶더니 의식하자 곧 사라져 느낄 수가 없었다.
“…….”
“물이 얼마만큼 찼나요?”
하윤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멋쩍은 표정을 읽었는지 박건영은 작게 신음했다. 그는 자세를 고치더니 하윤에게 좀 더 바짝 붙었다. 별 차도가 없자 계속해서 거리를 좁혔다. 어느새 얼굴을 곧 닿을 듯이 들이밀자 그의 까만 눈이 더 크게 보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니, 가까이 닿은 얼굴이 부담스러워 더는 견디기 버거웠다. 하윤이 어깨를 짚고 밀어내자 박건영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대신 입으로 눈이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곤 눈물을 찔끔 짜냈다.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 내고 몇 번 깜빡이자 본래 눈으로 돌아왔다.
“하, 이게 이렇게 안 통한 건 처음인데.”
“제대로 한 것 맞습니까?”
“제대로 했냐니요. 당연히 제대로 했죠. 지금 눈 충혈된 것 안 보이십니까?”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실패했더니 마음이 상했는지 박건영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윤은 목 스트레칭이나 했다.
“저야 일반인이니까 제대로 하신 건지 흉내만 내신 건지 모르잖습니까.”
“한 번만 더 해 봅시다.”
박건영은 하윤의 어깨를 움켜쥐고 다시금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무경이 차 가까이에 와 있었다. 그는 노크 한번 없이 차 문을 벌컥 열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이제 다 끝났나?”
“아, 그게.”
“저쪽에서 계속 재촉해서.”
무경은 박건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하윤에게 불쑥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하윤이 뒤로 몸을 뺐지만 차 안이라 얼마 가지 못했다. 무경은 다소 우악스레 하윤의 턱을 붙잡았다. 하윤이 놀라 동그랗게 뜬 눈을 빤히 바라보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안 걸린 것 같은데?”
“하, 하하.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는데도 진입조차 안 돼서. 간혹 그런 체질이 있거든요.”
졸지에 그런 체질이 된 하윤은 눈만 깜빡였다. 무경은 대꾸한 뒤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살펴볼 것이 남은 것처럼 하윤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하윤이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
불안감이 밀려왔다. 하윤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박건영을 바라보았다. 아까 해 보려던 걸 다시 해 보라고 말하려고 할 때 무경의 다른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