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날이 점차 따듯해지고 있었다. 조금 서늘한 바람에 꽃향기를 담은 더운 공기가 섞여 있었다. 가로수들엔 연초록 새순이 돋으려 고개를 들이밀었고, 볕 좋은 곳에 자리한 벚나무는 벌써 꽃을 틔운 가지가 있었다.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다 그놈들 탓이었다. 일 벌여 보라고 멍석 깔아 주고 자리도 비워 줬는데도 미적거리는 놈들. ‘피노키오’와 ‘김희원’.
저희 나름대로 절차도 있고 사정도 있겠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한국인인 김하윤으로선 갑갑해 견디기 어려웠다. 당장 눈앞에 피노키오 일당이 있다면 뒤통수라도 때리면서 빨리빨리 하라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좀 더 속도를 내 줬으면 좋겠는데. 적어도 봄이 지나기 전에.’
지금이 딱 적당했다. 따듯한 척하면서 춥고, 추운 것 같으면서도 따듯하고. 날이 더 따듯해지면 날이 너무 예뻐지지 않은가. 그러면 괜한 미련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하윤은 침대에 누워 빛이 새어 나오는 욕실 문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냥 잠들어 있을 때 집에 데려갈걸.’
괜한 수작을 부리려다가 말려들고 말았다. 집에 가는 중이었으면 무경이 자신의 집에 오자고 할 일도 없었을 텐데.
“…….”
긴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느새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그쳤다. 하윤은 욕실을 바라보고 있던 몸을 반대로 돌렸다. 괜히 휴대전화를 켜 포털 사이트 화면만 이리저리 내렸다.
관심 없는 기사들과 광고들을 눈으로 훑을 때, 무경이 밖으로 나왔다. 하윤은 이제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안에서 차마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던지 무경은 이제 막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무경의 옷은 차 트렁크에 여벌로 준비해 둔 것을 갖고 왔다. 이 집엔 무경이 입을 만한 옷이 없었으니까.
“좁아서 씻기 힘들었지?”
괜히 멋쩍어 말을 걸자 무경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생각을 하듯 가만히 하윤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손에 든 것을 던졌다.
“……!”
하윤은 얼떨결에 무경이 던진 것을 받아 냈다.
“한번 떨어트려서 아예 갖고 나왔어.”
무경의 말에 가슴이 덜컥였다. 꼭 반지를 없애 버리려다가 돌려준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비누기가 살짝 남아 있는 반지를 꽉 쥐었다.
“요새 빼고 다니나 봐.”
“꼈다가, 안 꼈다가 하지 뭐.”
원래도 헐거운 반지였지만 요즘 따라 더 헐겁게 느껴졌다. 비누로 세안을 하다 보면 훌렁 빠진 반지가 손끝에 걸렸다. 반지가 늘어났는지, 아니면 제 손가락 살이 빠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럴 거면 아예 끼지 말지 그래? 잃어버리는 것보단 낫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건 그렇지.”
하윤이 수긍하면서도 반지를 꼈다. 마디에 살짝 걸렸다가, 마디를 지나자 헐거워 쉽게 돌아갔다. 무경은 하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젖은 머리칼을 털었다. 하윤은 무경의 한숨에 지레 찔려 반지 낀 손을 숨겼다.
무경은 머리칼의 물기를 대강 턴 다음 젖은 수건을 빨래통에 던졌다. 살짝 힘이 실린 것이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대답은 해 놓고 또 왜 껴?”
“그냥. 안 끼고 있으면 네가 버릴까 봐.”
“버릴 거면 너한테 안 줬겠지.”
그건 그랬지만 그냥 기분이 그랬다. 하윤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반지 낀 손을 주먹 쥐었다.
“신경 쓰지 마. 너 없으면 또 잘 벗고 다닐 거야.”
“…….”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자야지. 자, 침대 써. 내가 바닥에서 잘게.”
하윤은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리에 묻은 머리칼을 대충 훑어 냈다. 무경은 침대에 눕는 대신, 하윤이 대충 깔아 둔 바닥에 앉았다.
“됐어. 어차피 그 침대 짧아서 불편해. 그리고 너 침대 아니면 못 잔다며?”
무경의 말에 하윤을 입을 다물었다. 오래전에 그에게 했던 변명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무경은 염동력으로 불을 껐다. 블라인드 틈으로 바깥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왔으나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윤은 [문]을 열어 바닥에 누운 무경을 훔쳐보았다. 무경은 하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옆으로 누웠다.
“……너 오늘 좀 이상해.”
꼭 예전같이 말하잖아. 하윤은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떠올렸다.
“뭐가?”
무경이 이상했다. 이쯤 되면 제게 날 선 말을 쏟아 내거나 아니면 눈앞에서 치우려고 했을 텐데 둘 다 하지 않았다. 폭주 전조를 느끼는 바람에 힘이 빠졌는가 하면 여태 수많은 전적이 반기를 들었다.
‘혹시 뭔가 기억난 건 아닐까.’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가슴속이 뜨끔거렸다. 무경은 지금 돌아와선 안 됐다. 하윤은 불안하게 시선을 돌리다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화를 안 내잖아.”
“화를 냈으면 해?”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하윤은 잠시 속으로 말을 골랐다.
“화를 내러 온 것 같아서.”
“내가 왜?”
“안 그러면 여기 올 리 없으니까.”
실제로 마주쳤을 당시 화를 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경은 대답 대신 침대가 있는 쪽으로 돌아누울 뿐이었다. 이미 무경이 이곳에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음에도 굳이 묻는 까닭은 그를 떠보기 위해서였다. 혹시 기억을 떠올린 건 아닐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떠보려는 수작이 너무 훤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또 둘러 말하기엔 무경은 하윤의 말에 잘 대답하지 않았다. 말로 하는 대답뿐만 아니라 아예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특수훈련을 받은 티가 이런 데서 튀어나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윤은 방 안의 작은 불빛들에 의지해 무경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아니면 여기 왜 온 건지 물어봐도 돼?”
“…….”
“내가 알면 안 돼?”
“그래. 사실 네가 알면 안 돼. 넌 일반인이니까.”
“…….”
무경은 망설이듯 시선을 움직이다가 한숨 한번 뱉고는 입을 열었다.
“조만간 네게 도움을 요청할지도 몰라.”
“도움? 대체 뭔데?”
“김희원을 만났어. 네가 말한 곳에선 아니지만.”
무경은 도움을 말할 땐 힘겨워하더니 정작 기밀을 이야기할 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말했다.
‘놀라서 겁먹고 여기까지 달려온 주제에.’
하윤은 울분과 겁에 질려 있던 무경의 얼굴을 떠올렸다.
“놀라지도 않네?”
“……그럴 리가 있냐. 갑자기 이렇게 들으니까 말문이 막혀서 그런 거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순간을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생각했던 반응들이 다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윤은 벌떡 몸을 일으켜 무경을 내려다보았다.
“내 말이 맞았지. 희원이 살아 있다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
무경은 대답하지 않은 채 하윤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마주하던 하윤은 힘없이 몸을 늘어트렸다.
“이거 봐. 이러니까 내가 말문이 막히지. 마냥 기뻐할 수도 없잖아.”
“어째서?”
“네 반응이 이상하니까.”
“…….”
“괜찮은 거지?”
하윤의 물음에 무경은 시선을 돌렸다. 몸 뒤척이는 소리가 하윤의 인내심을 쥐어짰다.
“희원이, 괜찮은 거지.”
“…….”
“이것도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무경은 이대로 입을 다물 것 같았다. 하윤은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무경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희원이. 기억이 온전치 않아.”
“기억이?”
“그래. 아무래도 피노키오 쪽에서 손을 쓴 것 같아.”
“피노키오…….”
“그래, 김득철. 그 새끼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커.”
하윤은 지하철 승차장에서 봤던 김득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명력 없이 말라비틀어져 장작개비 같던 모습을.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지만, 만약 아까 말한 대로 네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그땐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겠지.”
무경은 사실 지금도 딱히 해 줄 만한 이야기는 없노라고 덧붙이며 말을 맺었다. 하윤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윤은 무경을 흘겨보다가 이내 자리에 누웠다.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백무경은 희원의 이야기를 하며 하윤의 태도를 지적했으나, 하윤이야말로 답답했다. 무경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물론 십여 년간 부지런히 생각하고 기대해 온 것이 있으니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김희원이 눈에 안 찼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십여 년 전 김하윤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에 반감을 느꼈다거나.
‘김하윤이 끔찍할 백무경에겐 끔찍한 일이긴 하겠지.’
김희원의 기억이 분명치 않은 것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백무경도 기억이 온전치 않고 김희원도 온전치 않으니 서로 맞는 구석을 찾지 못했을 테니까.
‘그거야 겹치는 곳이 없기 때문이지만.’
게다가 무경은 뛰어난 염동력의 소유자였다.
뛰어난 염동력을 가졌다는 건 뛰어난 정신력을 가졌다는 것과 같고, 뛰어난 정신력은 정신방어력이 높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래서 기억이 엉킨 무경을 치료해 볼 생각도 못 했다.
‘이렇게 피노키오 놈들 두둔해 주긴 싫은데.’
어째 무경의 상태를 생각하면 피노키오 놈들이 늦는 게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음에도.
‘무경의 상태를 보고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위해 기억상실을 가장했을 수도, 아니면 아예 그 상태로 만든 것일 수도 있지.’
무경이 있는 곳은 국내 내로라하는 에스퍼들이 모인 공간이었다. 가짜로 상태를 가장하기엔 위험이 컸다.
‘그럼 진짜라는 건데. 뭐, 멀쩡하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무경은 조만간 하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도 둘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아니 거짓말을 물으려는 것일 테지. 그게 아니면 문지기에 관한 것을 물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서이주와 오래 붙어 있었으니까.
어느새 침대 밑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무경이 깊이 잠든 것이다. 하윤은 무경과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벽에 바짝 붙었다.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