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꿈을 꾼 것일까. 그러나 꿈이라기엔 지독하게 생생했다. 분명 김하윤은 이미 인적 드문 곳에 도착하여 주차했었다. 주차한 뒤에 잠시 밖에 나갔었고 그사이 자신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 차 밖으로 나가려고 했고 때맞춰 돌아온 김하윤이 저를 제지했었다. 자신을 익숙하게 끌어안고 달래다가…….
‘그러다가.’
무경은 뺨에 내려앉았던 입술의 촉감을 떠올리곤 거칠게 뺨을 비볐다. 그러나 비비면 비빌수록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선명해졌다.
하지만 실제라고 단정 짓기엔 자신은 지금 막 잠에서 깼고 이와 비슷한 선명한 꿈을 꾼 전적이 있었다. 꿈의 내용이 이것보다 더 끔찍한 것들도 많았다.
무경은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꼭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어, 깼어? 몸은 좀 어때? 아까보단 괜찮아?”
“…….”
김하윤의 말에서 무경은 기시감을 느꼈다. 대답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김하윤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엔 김하윤의 손이 그의 이마에 닿는 일은 없었다.
당연했다. 자리도 자리이거니와 김하윤은 안전띠조차 풀지 않았으니까.
“괜찮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
무경의 대답에 하윤은 입을 다물었다. 새삼스레 상처받은 눈치는 아니었고 그냥 무경의 상태를 가늠하는 듯했다.
“괜찮다면 다행이고. 물 줄까? 땀 많이 흘려서 수액이라도 맞혀야 하나 걱정했거든.”
“……물?”
문득 아까도 물을 주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대화도 했었다. 약은 먹었는지, 땀을 많이 흘렸으니 물을 마셔야 한다든지. 그때 무경은 물을 받기는 받았으나 마시진 않았다.
‘물을 받아서 어디 뒀더라.’
무경은 자신이 물을 놓았던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분명 꽂혀 있었어야 할 물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김하윤이 있는 운전석 옆에 먹다 만 생수가 있었다. 무경이 생수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김하윤이 변명했다.
“차 안에 안 뜯은 거 있길래 한 모금 마셨어. 솔직히 이만큼 운전해 줬으면 물 한 병은 마셔도 되는 거 아니냐.”
“언제 마셨어?”
“오던 길 중간에. 히터 때문에 자꾸 기침이 나서.”
“…….”
무경은 입을 다물었다. 기침이 나서 중간에 차를 멈추고 마셨다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수상하게 얼마 줄지 않은 수위를 눈으로 한 번 더 확인할 뿐.
“근데 너 물 안 마셔?”
“……줘.”
무경의 말이 떨어지자 김하윤은 안전띠를 풀고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그러곤 안에 있던 작은 물병을 찾아 건넸다.
“그런데 거기 물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여태 무경은 김하윤을 자신의 차에 태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김하윤은 몇 번은 탄 것처럼 익숙하게 굴었다.
“선생님이랑 아저씨 차랑 똑같이 꾸며 놨는데 그것도 모를까 봐.”
“똑같다고?”
“그래. 차 안에 둔 물건이나 방향제까지 똑같잖아.”
뜻밖의 사실에 무경은 눈을 끔뻑였다.
“약도 옛날 약만 사 놓고. 구하는 게 더 힘들었겠다. 이거 다 유통기한 지난 거 아니야?”
“그럼 이게 내 차인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
저 궁금한 것만 늘어놓는 무경의 질문에 김하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야, 너랑 산 게 몇 년인데 네 차 번호 하나를 모를까 봐. 네 차 아파트에 주차 등록되어 있어서 들어올 때 인터폰에 다 떠.”
“…….”
“그리고 차 근처에 있던 전봇대에 걸려 있던 현수막이 위로 솟구치고 있으면 말 다 한 거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였으나 무경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하윤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김하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무경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물을 마셨다. 작은 병이라 그런지 몇 모금 마시자 금세 동났다.
“몸은 정말 괜찮아? 병원 가서 검사 안 받아도 되겠어?”
“조금만 더 쉬면 돼. 괜히 갔다가 귀찮아져.”
“그럼 아예 집에 데려다줄까?”
“……?”
“지금은 가기 좀 그래?”
무경은 하윤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집에 가야 한다는 말에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지금 여기가 어딘데.”
“여기? 여기가 어디냐면.”
김하윤은 지도 앱을 켜서 현재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런 다음 무경의 집까지의 거리를 입력했다. 도로에 슬슬 차가 빠질 시간임에도 도착 예상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었다.
“그냥 너희 집으로 가. 여기서 우리 집보단 가깝잖아.”
“너 약 얼마나 먹었어?”
“기억 안 나. 갑자기 그건 왜.”
정말이었다. 그냥 있는 걸 다 털어 넣었기 때문에 정확한 복용량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또 위세척이 필요할 정도로 필요한 건 아니었다. 물론 어지럽고 졸리긴 했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왜긴 왜야. 많이 먹었으면 내일도 운전 못 하잖아.”
“……?”
“내일 운전도 못 하는데 차 어떻게 하려고 우리 집에 와. 조금 걸리더라도 너희 집 가서 거기에 차 둬야 고생 덜하지 않겠어?”
“상관없어.”
“상관없기는. 야. 너 아까 우리 집 앞에 와 봐서 알겠지만, 주차 공간이 넉넉한 편이 아니야. 지금 가면 주차할 곳 하나도 안 남아 있어서 유료주차장에 대야 해.”
“거기다가 주차하면 되잖아.”
“너 암만 괜찮아졌다고 해도 지금 평소보단 상태가 나쁘잖아. 유료주차장에서 집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고, 거기다가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다니까?”
“왜 없어?”
“…….”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김하윤은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것도 모자라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다시 무경을 설득하려 했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말하는데, 너 진짜 불편할 거라니까. 내 말 듣는 게 좋아.”
“불편해도 내가 감수해.”
“내가 불편한 건.”
“그건 알 바 아니지.”
“한 시간 아끼고 고생하는 것보다 그냥 집에 가지? 어차피 운전 내가 해 줄 건데.”
“혹시 집에 뭐 숨겨 놨어?”
“뭐?”
“안 그럼 왜 그래?”
“아니, 아까 말한 대로 걸어가야 한다니까. 너 몸 제대로 가누기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부축하면 되잖아.”
“내가 널?”
“왜 못하겠어?”
“못하는 게 아니라, 너 나랑 닿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지.”
“그렇지?”
고개만 돌린 채 대답하던 김하윤은 아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무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경은 달리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데 도무지 고집이 꺾어지지 않았다.
“무경아, 안전띠 매. 아무리 봐도 병원 가야겠다.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너희 집으로 가.”
“백무경.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나도 너한테 농담한 거 아니야.”
“…….”
“아까도 말했지만 암만 힘들어도 내 결정이고 내가 감수해. 네가 신경 쓸 거 아니라고. 아니면 진짜 집에 내가 알면 안 되는 거 숨겨 놓기라도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것도 아니면 십수 년을 내 집에서 살아 놓고 너희 집에서 나 하룻밤 재우는 게 그렇게 아까워?”
김하윤은 답답한지 한숨 한번 내쉬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래, 네가 고생하지 내가 고생하냐.”
백기를 든 김하윤은 곧장 운전할 듯 운전대를 만지작거렸으나 잠시 뒤 차 문을 열었다.
“어디 가려고.”
“잠시 바람만 쐬고 올게. 십 분만.”
김하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경 또한 따라 내렸다.
“왜 나와. 차 안에 있지.”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이니까, 아니. 됐다.”
완연히 봄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바람결에 꽃내음이 그득했다. 밤이라 서늘하긴 하지만 또 겨울바람처럼 매섭진 않았다. 적으나마 꽃을 틔운 벚나무 가지가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바람 쐬고 온다며. 안 가?”
“네가 차에서 나왔잖아.”
“그럼 뭐가 있는 건가?”
“대답 안 할래.”
“왜?”
“……대답해도 네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밖에 나온 무경이 저 없을 때 쓰러질까 봐 걱정한 모양이었다. 무경은 하윤의 대답이 가소로워 코웃음 쳤다.
무경의 코웃음에 김하윤은 그를 살짝 흘겨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젠 봄바람에 김하윤의 머리칼이 흔들리고 있었다.
“……운전은 언제 배웠어?”
“취업하기 전에 땄으니까 꽤 됐지. 아버지가 남자는 차 없어도 면허는 꼭 있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하윤은 집에 갔을 때 아버지 차를 운전하거나 영업용 차량으로 계속 운전을 했었노라고 덧붙였다.
“나 생각보다 운전 잘하지?”
“…….”
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하윤의 운전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안경 안 써?”
“말 돌리네.”
김하윤의 힐난에 무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분명 김하윤에게 화를 내러 온 길이었음에도 이젠 화가 나지 않았다. 들들 끓던 감정들이 쥐 죽은 듯이 잠잠했다. 이전과 달리 짜증도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저 끝도 없이 허무하기만 할 뿐.
“그냥 네 눈이 까맣잖아.”
“……쓰던 안경이 다 부서져서.”
“다시 맞추면 되잖아. 요새 안경 맞추는데 특수렌즈 아니면 몇 분 안 걸린다던데.”
“그런 건 써 봤자 아무 소용없거든.”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었어.”
“…….”
“이제 들어가자. 그냥 빨리 가는 게 낫겠다.”
김하윤의 제안에 무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하윤이 차에 타는 것을 본 무경은 조금 전과 달리 조수석에 앉았다.
“뒤에 안 앉고?”
“이제 잠 깨서 뒤에 앉아 있으면 불안할 것 같아서.”
“나 운전 잘한다니까?”
“…….”
“진짜라니까 안 믿네.”
무경은 하윤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안전띠를 맸다. 김하윤은 더 할 말이 없었던지 시동을 걸었다. 스스로 운전을 잘한다고 했던 것만큼 김하윤의 운전 솜씨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긴장했는지 몸을 빳빳이 세우고 있긴 했지만.
“…….”
운전하자 김하윤은 급격히 조용해졌다. 라디오도 음악도 틀지 않고 유일한 동승자인 무경도 말하지 않자 차 안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썩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김하윤의 운전이 불안하다고 말했던 무경은 정면이 아닌 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진짜 창밖을 보기도 하고 창에 비친 김하윤을 보기도 했다. 늘 쓰던 안경 없이, 그것도 렌즈를 껴서 눈알이 까만 김하윤을 보는 게 낯설었다.
그리고 운전대에 올라온 반지를 끼지 않은 김하윤의 왼손도 조금.
아니, 꽤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