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이사하기로 한 토요일 아침. 모든 준비를 마친 하윤은 떠나기 전 마지막 차 한잔을 마시며 TV를 틀었다.
별생각 없이 틀었던 채널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어젯밤 사이 있었던 사건 사고를 보도하고 있었다.
경북에서 수년에 걸쳐 외국인 노동자와 주민의 실종사건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경찰은 실종 외국인 노동자의 비자 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과 실종 주민이 평소 폭력과 금전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납치 피해자 한 명이 납치되던 순간 극적으로 각성하여 도주에 성공했다. 납치 피해자가 초능력자로 각성한 덕분에 초인특수관리청에서 해당 사건에 관심을 가졌고, 검찰은 그제야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특수관리청의 협조로 피해자의 도주 루트를 복기하여 납치범들의 은신처를 발견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저녁, 에스퍼들과 특공대원들을 파견하여 일반 공장으로 위장하고 있던 납치범들의 은신처를 덮쳤다.
그 과정에서 납치범들이 사건 현장을 은폐하려 현장을 폭파했으나, 에스퍼들의 공조로 금세 진압되었다. 확보한 범행현장의 지하 공간에선 사라졌던 피해자들이 일부 확인되었고,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납치범 일당은 납치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당국에선 실험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일각에선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의 모방범죄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어 일대 교통망을 통제 수색하여 도주한 납치범 잔당을 추적 중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
리포터의 오른쪽 어깨 너머엔 반쯤 불탄 공장의 모습이 보였다. 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경북 영주시 장수면.’
하윤의 눈앞에서 공간이 갈라지며 뉴스 화면에 나온 곳으로 향하는 샛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스물일곱 개의 문을 관통하여 만들어진 샛길은 하윤의 시선을 TV 속 현장에 데려다 놓았다.
하윤은 가느다란 틈을 통해 바깥을 살피다가, 샛길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샛길을 보자 그곳이 어디로 향하는 문인지 ‘문패’가 보였다.
[풍운 불고기]
낯익은 가게명에 하윤은 반사적으로 어느 좌표 하나를 떠올렸다.
‘31*8-5-283-9475김.’
경기도, 구리시, 283번지, 김씨가 9475번째로 등록한 샛길. 그 길은 김희원의 집과 풍운 불고기를 잇는 길이었다.
그리고 김희원의 집에는 ‘개봉역 승강장’과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하윤은 크게 숨을 들이켜다가 바닥을 살폈다.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길 위에 흙먼지가 쌓인 곳이 있었고, 그 위에 휠체어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윤은 그날 봤던 김희원과 김득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김희원은 문을 넘었을까, 아닐까.’
그리던 중에 하윤은 문 근처에 타이어 밀린 자국을 찾아냈다.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타이어가 아닌, 자전거만 하고 바퀴 간의 간격이 좁았다.
‘휠체어.’
하윤은 김득철이 탄 휠체어를 밀며 달리는 김희원의 모습을 상상했다. 뒤에선 그의 기척을 눈치챈 수색대가 성난 개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김희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을 코앞에 두고 방향을 틀어야 했다.
‘누가 앞을 가로 막았든, 아니면 문이 열리지 않았든.’
그래서 억지로 방향을 트느라 바닥엔 타이어 밀린 자국이 남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상상하던 하윤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하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남은 차를 털어 마셨다. 그런 다음 주방으로 가 마시던 컵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집 안에 제 물건이 더 남았는지 확인하다가 서재 앞 장식용 탁자 위에 있던 액자를 발견했다.
“이걸 놓고 갈 뻔했네.”
또 무경일 화나게 할 뻔했다. 무경의 졸업식 사진은 김하윤에게만 추억일 뿐, 백무경에게는 아니었으니까. 하윤은 액자를 뒤집어 사진을 꺼냈다. 무경의 얼굴이 있어 차마 찢어 버리지는 못하고 아예 새까맣게 태웠다.
액자와 재로 변한 사진을 버리고 나니 이제 더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하윤은 반쯤 찬 쓰레기봉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
미세먼지로 하늘은 뿌옇지만, 날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볕 아래 있으면 옅지만 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자 어째 조금 가슴이 설렜다. 움츠러들고 축축 처지던 몸도 기운을 내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초인특수관리청이 금번 민간인 연쇄납치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현장에서 탈출한 피해자가 초능력자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언론에 보도된 대로 위급 상황에서 각성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각성한 초능력자였다.
다만 그 능력이 미비했고 일상에서는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위급 상황이 닥치자 능력이 일시적으로 증폭되어 탈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
특수관리청은 피해자가 의무접종이나 교육 등을 받을 수 없었던 환경이었던 점, 그리고 납치범들이 납치 대상을 골랐다는 점에 집중했다. 또한, 피해자가 현장에서 겪었던 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빠르게 전담 팀이 구성되고 조사가 진행되었다. 추적결과 납치범 일당의 은신처를 발견했고 에스퍼들이 포함된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현장을 급습하도록 했다.
초인특수관리청이 파견 전 과잉진압 논란을 우려했던 것과 달리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대인 무기가 아닌 괴수 토벌용 석궁이 날아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난전이 이어졌다.
납치범들의 전세가 확연하게 기울 때쯤, 지하에서 검은 연기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는 아니었던 만큼 불길을 진압하고 생존자들 구해 냈으나, 핵심 연구시설과 연구 자료는 연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구출 당시 주변 환경이나 피해자들의 부른 배를 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주변을 수색하던 수색대에 의문의 인물이 나타났다.
갑자기 아무도 없던 도로에서 청년과 휠체어를 탄 노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정체를 묻는 수색대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노인이 탄 휠체어를 밀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수색대는 청년이 벽에 휠체어를 처박기 전에 그를 제압했다. 앞으로 거꾸러지는 노인을 잡아채자 휠체어는 넘어진 채로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아버지!”
휠체어에 폭발물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만약을 대비하여 대원들은 즉시 몸을 낮췄다. 그러나 벽에 부딪혔었어야 할 휠체어는 반쯤 사라졌다가, 높은 곳에서 미끄러지듯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밀려 나왔다.
“…….”
수색대원들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대원 중 하나가 휠체어가 사라졌던 곳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야 함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빛을 쏘았을 땐 조금의 굴절도 없었다.
“대체 뭐야?”
의문을 대답해 줄 수 있는 대상을 향해 시선이 모일 때, 청년은 수색대원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이거 놔! 이 개새끼들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피라도 토해 낼 기세였으나, 노인을 잡아챘던 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철석같이 진짜 사람이라고 믿었던 노인이 사람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일 뿐이었다.
수색대원은 초능력자가 확실한 청년에게 마취제를 주사했다. 그러고는 곧장 상부에 보고했다.
텔레포터를 발견한 것 같다고.
연쇄 납치사건 용의자의 은신처인 줄 알았던 곳이 의도적으로 에스퍼를 만들어 내려는 인체실험 현장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파란이 일었다. 인체실험까지 감행하며 에스퍼를 만들어 내려는 존재들의 의도가 선하지 않으리라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시설과 자료들이 소실되어 조사에 다소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사망한 피해자들의 시신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어 부검을 진행할 수 있었다.
부검한 결과 납치범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초능력자 혹은 친인척이 초능력자인 취약계층을 노렸으며, 피해자들에게 동일 인물의 유전자를 주입하여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특정 능력의 에스퍼가 태어나도록 실험 중이었다.
유전자의 주인은 김희원. 피노키오 일당이 연쇄적으로 미성년 에스퍼들을 납치 살해하여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던 시기에 실종된 인물이었다.
당시와 외모는 다소 달라졌으나 유전정보 등을 통하여 분석결과 동일 인물로 밝혀졌다.
세뇌에 걸린 탓인지 당시의 일이나 갇혀 있던 동안에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거기에 기억에 왜곡이 있어 자신이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 아버지가 크게 다쳐 거동할 수 없어졌고 자신은 그런 아버지의 수발을 들기 위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둔 줄 알았다. 공장은 단순히 시골에 있는 불법 병원인 줄 알았고, 그곳에서 일하며 숙식 및 병원비를 해결했었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몰랐다.
자연스럽게 십 년 전에 있었던 피노키오 일당의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그때 미처 처리하지 못한 피노키오 일당이 십 년 전 서울에 있었던 일을 재현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일각에선 구로구에서 나타난 괴수가 십 년 전 서울에서 미궁이 열리며 나타났던 괴수의 능력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해당 사건이 그들의 소행이며 이미 우려가 아닌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초인특수관리청은 해당 단체를 극단적인 에스퍼 우월주의자 및 국가전복세력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가장 우선한 것은 김희원의 존재였다.
이미 한국에선 공간이동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보고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원래도 드문 능력인 데다, 기존 텔레포터들이 숨이 끊어지거나 능력이 소실되었다.
어찌 보면 김희원이 국내 남은 유일한 텔레포터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피노키오들이 김희원을 종마로서 어떻게든 텔레포터를 불려 보려 한 게 아닐까. 하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자면 순순히 저희 손에 들어오게 내버려 둔 게 이상했다.
암만 수색대가 몸을 날려 잡았다 한들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심스럽다 한들 또 어찌 처리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국내에 남은 유일한 텔레포터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관리청은 결국 김희원을 특별관리대상으로서 보호 및 감시하기로 했다.
김희원의 처분이 결정된 날, 무경은 비로소 김희원을 볼 수 있었다.
십 년의 기다림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