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66화 (66/162)

66화

아주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선생님의 방.’

이제는 불타 없어진 서이주의 방이었다.

컴퓨터나 기타 가구의 위치, 꽂힌 책과 액자. 천장과 벽면마다 자리한 지도, 비상시를 대비한 탈출 용품과 무기. 그리고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당장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만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대체 이곳이 어디길래 서이주의 방과 똑같은 모습을 한 것일까.

“……나머지는 안에.”

‘선생님은 내게 당신이 아는 문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동시에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다만 동시에 떠오른 탓에 소리와 장면이 겹쳤다. 압력이 가해지듯 귀가 먹먹해지고 몸이 조였다. 나중에는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때, 현관문 잠금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물에서 건져 올려지듯 압력이 사라졌다. 대신 제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윤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며 모든 문을 닫았다. 다행스럽게도 엉덩이를 찧는 소리와 문 닫는 소리가 겹쳤다.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무경이 들어왔다.

“……김하윤?”

“…….”

“여기서 뭐 해.”

“어? 어. 그게.”

하윤은 재빨리 변명을 떠올렸다.

“짐 정리하느라고.”

“……그 얼굴로?”

무경의 말에 하윤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땀이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그사이 무경은 주저앉은 하윤을 피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아니.”

무경은 얼른 일어나라는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하윤이 바닥을 짚고 일어나자 그제야 몸을 돌렸다.

“오늘은 그래도 일찍 왔네.”

“…….”

하윤은 곧장 무경의 뒤를 따라붙었다. 사실 이르다고 하기엔 늦은 시간이나 요즘 무경은 아예 집에 못 들어올 때가 많았다. 그러니 하루가 끝나기 전 돌아온 것이 이르게 느껴질 수밖에.

무경은 한숨과 함께 하윤을 슬쩍 돌아보았다. 말을 하는 것조차 귀찮다고 여기는 것인지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려는 하윤을 손으로 밀어낸 다음 문을 닫았다. 하윤은 닫힌 안방 문을 바라보며 무경이 민 어깨를 쓸어내렸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아직 자질구레하게 남은 물건들이 있었다. 쓰려고 내놓은 것과 버리려고 옆으로 밀어 두었다가 깜빡한 것들이었다.

‘빨리 치워야 해.’

여태 치웠던 것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몸이 삐꺽거렸다. 하윤은 한참 널브러진 물건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

답답한 마음에 하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멈췄던 손이 겨우 움직였다. 분류할 생각도 없이 마구잡이로 물건들을 쓰레기봉투에 욱여넣었다. 손길이 다소 우악스러웠기 때문일까. 하윤은 잡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놓쳤다.

놓친 쓰레기봉투는 하윤의 손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기껏 넣은 물건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그중 사진을 담아 둔 작은 비닐도 이때다 싶어 사진을 뱉었다. 순식간에 바닥에 펼쳐진 사진을 보며 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쓰레기봉투를 바로 세우고 사진을 줍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진이 바닥과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하윤의 손끝을 튕겨 내며 제자리를 돌다가, 마지막엔 아예 튕겨 나가 멀찍이 날아갔다.

별일이 아니었으나 더는 담을 수 없는 잔에 톡 떨어진 물방울처럼 하윤을 뒤흔들었다. 하윤은 성을 내듯 다가가 사진을 집어 들곤 아예 갈기갈기 찢었다.

쏟아지지 않았던 사진들도 모조리 꺼내 갈기갈기 찢었다. 어차피 남아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다 싶었다. 특히 얼굴이 나온 사진은 누구 얼굴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잘게 찢었다.

“…….”

사진을 모조리 찢고 나자 몸에서 열기가 훅 솟았다. 가만히 서서 흐트러진 숨을 정리하던 하윤은 이어 정리를 마쳤던 상자 중 하나를 들고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상자를 엎자 켜켜이 넣어 두었던 앨범이 쏟아졌다.

‘진작 치웠어야 했는데.’

하윤은 앨범을 열고 자신이 나온 사진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앨범 대부분은 하윤이 억지를 쓰거나 몰래 찍다시피 한 무경의 사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중 하윤이 함께 찍힌 사진은 몇 없었다.

있다 해도 하윤은 귀퉁이에서 잘려 있었다. 하윤은 몇 안 되는 사진 속에서 자신을 도려냈다. 아예 사진 전부를 찢어 버릴까 하다가, 이미 자신을 도려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사진이 아니니까.’

하윤은 정리한 앨범을 상자에 넣어 다용도실 구석에 밀어 넣었다. 가져가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이미 자신을 도려내서 괜찮겠다 싶었다. 이제 온전히 무경의 사진이니까.

‘무경이 사진 자체를 꺼리면 어쩌지.’

당시에 찍게는 해 줬으나 무경은 한 번도 찍은 사진을 보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사진이 남아 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라진 뒤에 사진이 불쑥 나오면 불쾌해할지도 몰랐다.

‘버릴까.’

아예 태워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만간 시간을 내서 태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잘라 낸 사진을 마저 쓰레기봉투에 넣은 다음 주변을 정리했다.

짐을 추리고 추린 결과 하윤은 세 개의 상자를 남겼다. 겨울 겉옷 때문에 짐이 조금 늘었다.

잘 준비까지 마치자 어느새 시간은 새벽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윤은 안방으로 들어가려다 머뭇거렸다. 무경이 들어오지 못하게 밀어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간다고 미리 말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하윤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어떻게 말하든 무경이 반기겠거니 생각했다. 무경은 내내 하윤이 나가길 바랐으니까.

‘어중간하게 모질어서는 쫓아내지도 못하고.’

벌레라고 혐오하면서도 쫓아내지 못했다. 암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다고 해도, 하윤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해도 무경은 얼마든지 하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무경이 하윤에게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미련스레 약속을 지키던 버릇이 나왔는지도 모르지.’

하윤은 무경이 예전에 미련스럽게 꾸역꾸역 약속을 지키던 모습을 떠올렸다. 작게 피식 웃고는 문에 이마를 기댔다. 열까 말까 고민하다가 문을 두드렸다.

‘자나?’

살짝 문고리를 돌리자 별다른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자 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무경이 보였다.

무경은 피로와 짜증이 그득한 얼굴로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하윤은 다시 나갈까 고민하다가 무경을 불렀다.

“무경아.”

“…….”

“혹시, 바빠?”

“……왜?”

“……할 말이 있어서. 별건 아니라 바쁘면 다음에 할게.”

하윤의 말에 무경은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고개를 들었다. 하윤은 숨을 훅 들이켠 다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이 집 나가려고.”

“……?”

하윤의 말에 무경은 눈을 치켜떴다.

“다시 말해 봐. 뭘 한다고?”

“이사.”

“갈 거라고? 아니면 간다고?”

계획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가는 것인지 묻는 무경의 물음에 하윤은 뿌듯해하며 가슴을 폈다.

“이제 곧 갈 거야. 회사 근처에 방 얻었어. 주중엔 회사도 그렇고 주인이 도배 장판 새로 해 준다고 해서 실제 이사는 다음 주 토요일에 할 것 같아.”

“…….”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거야. 내가 갑자기 없어지면 네가 놀랄까 봐.”

“내가?”

무경은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하윤은 입꼬리를 올린 채 무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은 어처구니없어하다가 침대에 누웠다. 자리를 잡자마자 방 안을 밝히던 전등불이 꺼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던 하윤은 한숨을 삼키며 조심스레 침대로 다가갔다.

손으로 이불을 더듬다가 최대한 조용하게 자리에 누웠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무경이 별 반응을 하지 않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하윤은 고개를 돌려 무경을 힐끔거렸다. 눈알만 돌린 것인데도 시선을 느꼈던지 무경이 왜 쳐다보는지 물었다.

“그냥. 되게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싱거워서.”

“진짜 나가야 알지. 말만 그렇게 해 놓고 또 버티면 어떻게 해?”

듣고 보니 그랬다. 하윤은 무경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짜 나가는 거 확실하지?”

“그럼.”

“내일 계약서 찍어서 내 휴대전화로 보내 놔.”

“에이. 진짜라니까.”

“난 너 안 믿어. 네가 날 한두 번 속였어야지.”

“……진짠데. 짐도 쌌는데.”

“계절 옷만 정리한 것일 수도 있잖아.”

하윤은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영 반응이 싱겁다 싶었는데 정말 못 믿어서 의심하는 중인 듯했다.

‘이렇게 대답해 주는 걸 보면 의심하는 와중에도 내심 기쁜 모양인데.’

게다가 평소보다 말도 빨랐다. 무경이 미처 감추지 못한 흥분에 하윤은 눈을 감은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놓고 가는 것 없이 다 갖고 가. 자취 집에 못 놓을 것 같으면 본가 갖다 놓고. 괜히 떠넘겨 두고 가서 남의 집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안 그래도 오늘 다 끄집어냈는데 양이 제법 많더라. 그래도 이제 다 정리했어. 진짜 없을 거야.”

낮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으나 하다 보니 해가 저물다 못해 날을 넘겼다. 진작 미련 없이 버렸음 됐을 것을 괜히 시간만 끌었다.

“남아 있기만 해봐. 도우미 여사님한테 말해서 다 버릴 거야.”

“그래.”

“네가 쓰던 수저랑 그릇도 가져가. 보기 싫어.”

“그래.”

“…….”

“……왜?”

무경은 입을 다물었다. 하윤은 왜 그러느냐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윤은 감았던 눈을 잠시 떴다가 이내 다시 감았다. 문득 희원이를 찾아봤느냐는 물음이 생각났으나 이번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입에 올리려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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