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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50화 (50/162)

50화

“…….”

무경은 사정을 마치자마자 곧장 하윤에게서 떨어졌다. 사용한 콘돔을 바닥에 팽개치고 욕실로 달려갔다. 잠시 뒤, 무경은 속을 게워 낸 뒤 욕실 문을 닫았다.

이어지는 샤워기 물줄기 소리에 하윤은 머리를 가린 이불 속에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내 소리를 참느라 목이 아팠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축축한 물이 흥건히 묻어 나왔다. 계속 무는 바람에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핥으며 하윤은 눈을 깜빡였다.

‘아파.’

머리만 숨겨지면 제가 숨었다고 생각하는 키위 새같이, 까만 이불 속 세상에서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자위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이불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엉덩이와 다리 사이가 축축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 욕실 문을 바라보다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경이 팽개친 콘돔이 마침 하윤의 발끝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윤은 휴지를 뽑아 콘돔을 집고, 휴지의 깨끗한 면으로 바닥을 닦았다. 그런 다음 쓰레기를 버리고서 방을 나섰다.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하윤은 자신의 머리를 퍽퍽 내려치기 시작했다.

분명 아프고 머리가 얼얼한데, 이상하게 계속 멍했다.

욕실에 들어온 하윤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욕조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쏟아져 순간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늘어트렸다.

가만히 물을 맞던 하윤은 엄지손가락으로 반지를 살살 돌렸다. 문득 울음이 끓어 가슴을 들썩였으나, 금세 잦아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 다른 사람한테 보낼 순 없었잖아. 괜찮아. 괜찮은 거야.’

하윤은 계속해서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무경이를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

무경이를 좋아하니까, 무경이를 사랑하니까. 하윤은 주문같이 두 문장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러다가 다 돌아간 카세트테이프 같이 멈추고선, 감추고 또 감췄던 마음을 툭 뱉었다.

“더러워. 진짜.”

<스물 다섯>, 다시 겨울에 지하와 기준이 제대를 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군 생활이라 그런지 일 년 팔 개월여의 군 생활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엊그제 입대한 것 같은데 벌써 제대라니.’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년이 훌쩍 지났다. 제대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하윤은 아직 따로 만나 축하하거나 하지 않았다. 해묵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졸업과 동시에 노리고 있던 회사에 취직했고, 제대한 동생들은 그간 맛보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양친은 집에 같이 살아도 얼굴 보기가 힘들다며 쌍둥이들이 김씨 집안 연예인이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지하나 기준이 그놈이나 둘 다 엄마 아빠 출근할 땐 침대 속에서 퍼질러 자다가, 우리 들어 올 때쯤엔 각자 방에 허물 벗어 놓고 집 밖에 나가 있어. 그러고 통행 자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집에 오고. 또 집에 와서 바로 얌전히 자는 것도 아니야. 컴퓨터 앞에 있거나, 휴대전화 잡고 밤새 낄낄거린다. 글쎄. 그래 놓고 우리가 가면 자는 척한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웃기지도 않아. 아주.]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건물에서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칼이나 겨울 외투 색 때문에 검은 물결이 술렁이는 것 같았다. 그 속에 낀 하윤은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다. 그가 평소완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알아서일까.

하윤의 선임이 하윤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오늘은 다른 쪽으로 가네? 약속 있는가 봐?”

“네. 동생이 근처에 왔다고 해서요.”

“동생? 여동생?”

“남동생이요.”

“에이.”

선임의 수작이 빤해 하윤은 작게 웃었다. 지하가 왔었다고 해도 기준이 왔었노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직장 상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일반 사회에서 만났다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인간군상이었다.

“이번에 제대했어요. 근처에 왔다고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해서요.”

“그래, 가 봐.”

“먼저 가 보겠습니다.”

꾸벅이며 인사한 하윤은 괜히 시계를 확인하며 바쁘게 걸었다. 서둘렀던 탓에 미리 말했던 도착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하윤은 주변을 둘러보며 빨리 걷느라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겨울에 접어들며 낮이 짧아졌다. 여섯 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벌써 주변이 어둑했다. 어두워진 주변 때문에 입김이 도드라졌다.

“형!”

기준의 목소리와 동시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하윤을 찾으려 전화를 걸면서 하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하윤은 전화를 받으며 기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생각보다 꽤 걸리네.”

기준은 퇴근 시간이라 쏟아지듯 지하철로 들어온 직장인들 때문에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왔노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괜히 뛰지 말고 천천히 와.”

하윤의 말에 기준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마침 신호가 바뀌어 기준도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야아, 내가 김씨 집안 연예인 얼굴을 다 보네.”

“그거 엄마가 말한 거지?”

“아니, 아빠가.”

“아, 거참. 자기들도 다 그랬을 거면서 요새 엄청 뭐라 한다니까.”

하윤은 한걸음 물러나 기준을 바라보았다. 기준은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부끄러웠던지 검은 모자를 푹 덮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군대에서 먹은 물이 다 빠지지 않아 살짝 어색하게 느껴졌다.

“밥 먹었어? 근처에 맛있는 부대찌개 집 있는데.”

“아니야, 나 점심 늦게 먹어서 아직 소화 안 됐어. 그냥 가볍게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거야.”

“야아, 내가 언제 또 너한테 사겠냐? 기회 있을 때 먹어.”

“아니야, 진짜 괜찮아.”

“…….”

“진짜, 진짜 배불러서 그래. 아, 형 배고파서 그래? 그럼 그냥 형 혼자만 시켜 먹어도 되는데.”

“에이, 그럼 됐어. 그럼 술? 아니면 차?”

“차나 한잔하지 뭐. 술은 오늘은 됐고.”

“어쩐 일이야? 술을 마다하고. 어제 마셨었어?”

“아니, 그냥. 그냥 오늘은 술 안 마시려고.”

하윤은 기준을 데리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에 사람이 많아 걱정한 것과 달리 주문한 음료는 빨리 나왔고, 음료를 기다리느라 뻘쭘한 시간은 생각보다 짧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뻘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날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면 안 춥냐?”

“길에서 마시는 것도 아니고 카페 안이잖아.”

기준은 고개를 숙인 채 음료만 쭉 빨아 마셨다. 대화는 맥을 이어 가지 못하고 끊겼다. 하윤은 머그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용기를 내 말을 붙였다.

“건강하게 잘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 말만 벌써 몇 번째거든.”

“몇 번 말해도 다행이니까 그렇지.”

“어휴, 됐어. 내가 지하도 아니고. 남들도 다 가는 거 유난 떨어서 뭐 해.”

기준의 대답에 하윤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기준은 별거 아니라는 양 말했지만 군대 가기 싫다고 기함하던 꼴을 다 기억하고 있는 하윤으로선 우스울 뿐이었다.

“그래도 힘들었잖아. 군대 생활이 안 익숙하기도 하고.”

“그거야 그렇지 뭐. 에휴, 근데 뭐 면제 앞에서 말해 봤자 싶긴 하고. 뭘 알겠어? 군 생활 힘든지?”

“웃긴 새끼. 야, 내가 군대 면제받은 건 일찍 고생 많이 했으니까 굳이 군대까지 올 필요 없다고 빼는 거야.”

“경우가 다르지. 어릴 때부터 뭣 모르고 훈련받는 거랑, 편하게 살다가 갑자기 군사 훈련받는 건 느낌이 다르거든.”

기준은 그래서 자신이 더 힘들었노라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곤 냅킨의 귀퉁이를 살살 말며 잠시 침묵했다. 하윤은 기준의 말을 기다렸다. 기준은 좀처럼 고개도 들지 않고 딴 곳을 바라보며 혀로 입안을 훑었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억지로 신을 내 하윤에게 장난치듯 말했다.

“남들은 초능력자 가족 있으면 연줄 찔러서 군 생활 편하게 한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하나 없고. 쌩으로 뺑이 쳤잖아. 백형, 형 친구 아니야? 잘나간다고 소문 자자하던데 어떻게 말 한 번을 안 해 주냐.”

“그냥 말하지. 어차피 무경이 일반병사랑 말할 일 거의 없는데.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비벼 보지 그랬어?”

“하, 참나. 세상에 그런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그렇게 말했다가 교차 확인인 했는데 백형이 나 모른다고 하면? 난 그때 망하는 거야.”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연예인 보는 거랑 똑같아. 유명하니까 일방적으로 아는 놈들도 많고, 그중에서 형처럼 백형이 일반병사랑 안 만나는 거 아니까 허세 겸 거짓말도 쳐 보고 그러는 거지.”

“별사람 다 있네.”

“그러니까 형이 말해서 백형이 우리 부대 살짝 얼굴만 비추기만 했어도 내 입지가 그때랑은 달라지는 건데.”

“미안하다. 근데 나도 뭐 더부살이 입장이라 그런 거 말하기가 좀 그랬어. 그리고.”

“그리고 뭐?”

“지하는 몰라도 넌 좀 굴러도 되잖아?”

지하는 하윤도 무경에게 말을 꺼내 볼까 싶었다. 그러나 지하가 먼저 알고 스캔들 나니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하지만, 그때 말했어도 무경이 들어주지 않았을 것 같다.

“형이라고 하니 있는 게. 도움이 안 돼. 도움이.”

기준은 그렇게 말하며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기준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뒤 긴 한숨을 토했다.

“……군대에서 그때 생각 많이 했어.”

“그때?”

“군대 가기 전에. 형이 집에 왔을 때 술김에 말했던 거.”

“…….”

“일과 시간 지나고 나면 의외로 빈 시간이 있잖아? 그럴 때마다 불쑥 생각나더라고. 내가 잘못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고, 그래도 형인데 괜히 말했다 싶기도 했었고. 계속 번갈아 가면서 생각하다가……. 어찌어찌 결론을 내도 매번 후회하게 되더라.”

“…….”

“그래서 제대하면 형을 한번 봐야지 싶었어. 그때까지 계속 생각해서 결론을 내 보자, 뭐 이랬던 거지. 근데 뭐 사는 게 바빠서 제대하니까 날짜가 잘 안 나오더라고. 이러다가 해가 지나갈까 봐, 아예 말도 못 꺼내게 될까 봐 부랴부랴 온 거고.”

“……그래서 결론은 냈어?”

“응.”

“뭔데?”

“그때 술김에 이야기하긴 했지만, 난 나쁘다고 생각 안 해.”

“…….”

“그래서 오늘 술 한 방울 입에 안 대고 말하는 거야.”

“…….”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안 물어봐? 아니면 그럴 것 같았어?”

하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 이유를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형이 아직 그 집 사니까.”

“…….”

“내 말이 아무 소용없었겠구나. 그냥 술주정으로 흘려들었구나. 뭐라고 더 지껄이든 아무 상관없었던 거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머저리같이 이 년을 후회 속에서 살았구나. 이게 내 결론이야.”

“…….”

“예전에 난 형이 자랑스러웠어. 티는 잘 안 냈지만, 친구들한테 형 자랑도 많이 했어. 초등학교 동창들이랑 만나서 이야기하니까 말해 주더라. 형 그땐 진짜 집도 자주 안 왔는데 맨날 우리 형이, 형이 하고 다녔다고. 딱히 말할 것도 없었을 텐데.”

하윤은 기준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를 떠올렸다. 집에 잘 안 왔다던 말 그대로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졸업식에 참석할 때쯤에야 동생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놀랬던 기억이 있었다.

“나 사실 군대에서 백형 이야기 나올 때 난 한 마디도 안 했어. 그 인간 이야기하기 싫었거든.”

“…….”

“우리 형은 죄지은 것처럼 빌빌대며 사는데, 그 새낀 아니잖아.”

다행스럽게도 머그 컵 가득 담겨 있던 음료가 조금 식었다. 하윤은 바짝 마른 입을 축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왜 그렇게 미안한 거야?”

“……몰라.”

“……?”

“이젠 뭐가 미안했는지 기억도 안 나.”

“거짓말.”

“진짜야.”

하윤은 작게 웃었다. 무경에게 미안한 감정은 말로 하기 애매한 감정과 이유가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유일하게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 저와 달리 기억도 잃고 홀로 남은 무경에 대한 연민.

‘또 뭐가 있었더라.’

정의되지 못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일렁였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하더라. 하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해 고개만 살짝 가로저었다.

“기억도 안 나면 이제 그만둘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건데.”

“스물일곱. 딱 그때까지. 그때까지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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