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하윤은 자신을 다그쳤다. 지금 깊이 생각해선 안 된다. 생각에 골몰했다간 그 생각들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이다. 끝없는 우울과 절망과 자기 연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스스로와의 약속을 깨 버릴지도 몰랐다.
하윤은 무경이 밖으로 던진 반지로 생각을 돌렸다. 반지를 찾아야 했다. 캄캄한 밤중이라 찾기 어려울 게 빤했으나,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사이 다른 누가 주우면 어쩔 것인가. 게다가 반지는 금반지에 별다른 장식도 없어 팔아먹기 딱 좋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에 다다랐을 무렵 하윤은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얼굴을 적신 눈물을 훑어 냈으나 슬픔을 닦아 내진 못했다. 하윤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외면한 채 밖으로 향했다.
무경이 베란다 밖으로 던진 궤도를 생각하며 예상 지점을 더듬거리고 있자, 마침 부근을 순찰 중이던 경비가 다가왔다.
“아니, 야밤에 왜 그러세요.”
“아, 그게……. 반지를 잃어버려서요.”
하윤은 경비를 보고 꾸뻑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하윤의 차림새를 살핀 경비는 혀를 작게 찼다.
“아니, 이런 모습으로 그러고 계시면 신고 들어와요. 아휴, 이 엄동설한에 신발도 안 신으시고. 반지는 어쩌다가 잃어버리셨는데요?”
“……창밖으로 던져서요.”
하윤의 대답에 경비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을 골랐다. 그는 이내 무경의 호실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안 그래도 오늘 민원이 들어왔으니 소란을 자제해 달라고 말했다. 직접 찾아가지 않는 것은 군에서 보낸 협조문과 감시 요원들 때문이리라.
“요새는 경비 호출도 안 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경찰 오면 솔직히 피차 골치 아프잖아요. 안 그래요?”
“예…….”
하윤이 대답하며 코를 훌쩍이자 도끼눈을 떴던 경비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이런 것도 댁에 계신 다른 분께 말해야 하는데. 어휴.”
“…….”
“그리고 이 야밤에 불빛 하나 없이 반지가 찾아집디까?”
쯧쯧 혀를 차던 경비는 하윤이 더듬고 있던 바닥을 손전등으로 비춰 주었다. 하윤은 경비에게 한 번 더 꾸벅인 다음 반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초조해졌다. 괜히 급해진 마음에 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억지로 화를 내리누르자 뱃속을 들들 끓이다가, 돌연 눈으로 솟구쳤다. 핑 눈물이 돌았다. 눈물이 아차 할 사이에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하윤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찬 바람을 오래 쐰 덕분인지 얼굴이고 손이고 자기 것 같지 않았다. 눈물을 제대로 훔쳤는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윤은 다시 옷소매로 눈가를 찍어 내다가, 멀지 않은 자동차 바퀴 아래서 반지를 찾아냈다.
반지는 굴러가다 끼였는지 자동차 바퀴 밑에 세로로 서 있었다.
“……!”
“찾았어요?”
“네!”
하윤은 서둘러 반지를 빼냈다. 겉이 많이 긁혔지만 그래도 멀쩡했다. 경비는 이 밤에 반지를 찾으러 나온 것도 나온 것이지만 진짜로 반지를 찾은 게 용하다며 손뼉을 쳐 주었다. 하윤은 경비에게 꾸뻑 인사를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세요. 몸 다 얼었겠네. 특히 발도 조심하시고요. 발은 한번 얼면 정말 고생해요.”
“……감사합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왔지만,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잠금쇠가 걸렸는지 비밀번호를 누른 뒤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윤은 문에 이마를 콩 박다가, 이내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집 밖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것이 서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한바탕 운 데다가 반지도 찾았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고단함과 추위가 밀려왔다. 이젠 감정을 쏟아 낼 힘이 없었다.
‘다행일지도 몰라.’
감정이 잡히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문은 아침 출근할 때는 열겠지.’
그때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하윤은 꽁꽁 언 발을 주무르며 시간을 가늠했다. 최대한 적게 잡아도 다섯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얼어 죽을 것 같으면 경비실에 가지 뭐.’
막연하게 건물 안이니 다섯 시간쯤은 버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윤은 몸을 웅크린 채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가만히 있기엔 날이 너무 추웠다. 하윤은 이러다간 얼어 죽겠다 싶어 계단을 오르내렸다. 밤중에 뭘 하나 싶어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가, 단순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버거워 성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약이 바짝 올랐다. 그 무렵에 무경이 문을 열고 나왔다.
꼬질꼬질해진 하윤과 달리 무경은 여전히 깔끔한 차림새였다. 무경은 하윤의 발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사과해.”
“……뭘.”
약이 바짝 올랐던 것과 별개로 입을 열자마자 억울함에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그 속에서 서러움이 목구멍으로 불쑥 튀어 올랐다. 내가 아니라 네가 잘못한 거겠지. 가까스로 입을 다물지 않았다면 바락 소리 질렀을 것이다.
하윤은 입술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찬 날씨에 모든 게 둔하게 느껴졌다. 말하거나 움직이는 것, 또 촉감이나 상황 판단 등. 이 와중에 그나마 기민한 것은 오직 마음뿐이리라. 그조차 얼어 둔해졌을 텐데도.
그때 무경이 입을 열었다.
“불편하게 했잖아.”
“…….”
무경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윤은 거친 숨을 내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왼손 엄지 끝에 반지가 닿았다. 바닥을 굴러 거칠어진 표면과 언 손가락의 감각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너 나랑 친구 하자고 한 거 아니야?”
“……난 너 자는 줄 알았어.”
형편없는 변명이 튀어나왔다.
‘아, 말하지 말걸.’
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제발 참아 달라고 자신에게 빌고 또 빌었으나 눈물은 야속하게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네가 이러는 거 불편해. 그러니까 접어. 안 그러면 나 너랑 못살아.”
무경은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참에 정리하자. 나가, 그냥.”
문틈 사이로 슬리퍼가 날아와 하윤의 정강이를 때렸다.
“질질 짜지 말고 대답 좀 해. 사내새끼 질질 짜는 거 보는 거 역겨우니까.”
무경의 손이 하윤의 한쪽 어깨를 툭 쳤다. 별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몸이 휘청거렸다. 하윤은 복도 벽에 몸을 기댔다. 엄지손가락으로 긁듯 반지를 만졌다. 가슴이 갑갑하고 목에 바늘을 꽂은 듯이 따가웠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정해져 있는데, 그 대답을 하는 게 어려웠다. 하윤은 무경이 이 기회마저도 거두기 전에 대답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겨우 입을 열어 무너지듯 말했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할게.”
“…….”
“……접을게. 정리할게.”
하윤의 대답이 떨어지자 무경은 하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현관문을 열었다. 하윤은 울음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 고였다가 가슴께로 뚝뚝 떨어졌다.
집으로 들어온 하윤이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무경은 하윤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주방 옆에 있는 다용도실로 들어가게 했다.
다용도실 앞과 옆에는 기존에 넣어 두었던 짐들이 다 나와 있었다.
“……무경아?”
의아해하는 하윤을 두고 무경은 들어가라는 양 턱짓했다. 그러고는 아까 하윤이 그에게 덮어 주었던 담요를 하윤에게 던졌다. 하윤이 담요를 받느라 두 손을 쓰자마자 무경은 다용도실 문을 닫았다.
“…….”
문이 닫힌 순간부터 하윤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입을 떼는 순간에 잘못되기라도 할 것처럼 꾹 다문 채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았다. 가슴팍을 거칠게 들썩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수많은 생각이 결론도 내지 못한 채 머릿속에 부유했다. 하윤은 무경이 제게 던졌던 담요를 세게 틀어쥐었다.
숨에는 아직 울음이 남았으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하윤은 서늘한 눈으로 희미하게나마 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틈을 노려보았다.
‘모질게 내치지도 못하면서.’
무경은 말로는 절 내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럴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말로만 그럴 게 아니라 저를 잡고 건물 밖으로 내동댕이쳤었어야지. 자신에게 머물 곳을 주는 게 아니라.
‘쫓아낼 생각은 없는 거야.’
이유가 뭘까.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자신이 그에게 필요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무경이 자신의 조각이고 자신이 무경의 조각인 이상 서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비록 그것을 무경이 잊어버렸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물론 예전만큼 확실한 영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윤은 무경에게 영향을 끼쳤다.
‘폭주.’
자기 몸 상태이니만큼 무경이 눈치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무경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였다.
무경은 지나치게 폭주가 잦았다. 스스로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무경의 폭주가 잦아지는 점,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회복하는 점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어쩌면 무경이 스스로 폭주 주기를 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폭주 중에만 하윤을 알아차리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만약 폭주 중인 상태로 잠깐이라도 이지를 되찾는다면, 그리고 그때 날 본다면.’
무경은 어떻게 할까?
일그러진 기억을 본래대로 회복할까, 아니면 그대로 절망할까.
일그러진 기억을 되찾는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고, 아니라면 하윤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여길 것이다.
본능이 앞설까, 아니면 이성이 앞설까.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으나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내쫓겼다 돌아온 뒤, 하윤은 크게 앓았다. 집에 가려니 쌍둥이 동생들이 마음에 걸렸고 또 무경의 집에 홀로 있자니 몸을 추스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간 모아 둔 용돈을 털어 병원에 입원했다.
젊음이 무기라고 하루면 나으리라 자신했던 것과 달리 하윤은 닷새 정도를 입원해 있었다. 열이 수시로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고 뼈마디가 어긋났다가 다시 맞춰지는 것만 같은 통증이 일었다.
병원에서 전염병이 아닐지 의심하는 바람에 잠시 소동이 있었으나, 닷새가 지나자 하윤은 말끔하게 회복했다.
하윤은 뼈마디가 아팠기 때문에 성장통은 아닐까 하고 은근히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신장의 변화는 없었다. 대신 체중만 좀 빠졌을 뿐이었다.
하윤이 집에 돌아왔을 때, 무경은 하윤을 보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가라고 윽박지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상태가 어떤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날 하윤은 다용도실 대신 안방 침실에서 몸을 눕혔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무경을 마주 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이제 막 나아서 추운 데서 자면 안 돼. 안 닿게 얌전히 잘 테니까 그냥 둬.”
“…….”
무경은 대꾸하지 않은 채 옆자리에 누웠다. 인내하듯 긴 한숨을 내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하윤은 돌아누운 채 무경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든 척했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견디다가 늦은 새벽 즈음에야 겨우 눈을 감았다. 검고 깊은 곳에 빠지듯 잠이 들고, 또 거기에 빠져든 게 무서워 허우적거리다가 얼마 못 되어 눈을 떴다. 하지만 그렇게 깨고서도 혹 자신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릴까 봐 숨을 죽였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을 무렵이었다.
하윤은 몸이 뜨는 기분에 흠칫 떨며 눈을 떴다.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안방 욕실로 들어온 뒤였다. 가쁘게 숨을 들이켜는 순간, 하윤의 몸은 욕조에 처박혔다. 물이 없었기 때문에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하윤은 얼얼한 머리를 문질렀다.
“……야!”
말을 채 맺기 전에 샤워기가 움직이더니 찬물을 쏟아 냈다.
“…….”
샤워기의 물줄기는 하윤의 얼굴을 때렸다가 이내 가슴팍을 스쳐 가랑이 사이로 떨어졌다. 물에 젖은 천이 드러낸 윤곽에 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찬물을 뒤집어썼는데도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윤은 제 앞에 서 있는 무경을 바라보았다. 무경은 아무 말 없이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하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해.”
“…….”
하윤은 샤워기를 잡아채거나 끄거나 둘 중 하나를 하려 했으나 몸이 짓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하윤이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거센 힘이 하윤을 짓눌렀다. 고개를 가누기도 힘들었다. 점차 머리가 숙어지더니 어느새 몸이 반으로 접혀 이마 끝이 욕조 벽에 닿았다.
“그만…….”
하윤의 가랑이 사이를 때리던 샤워기 물줄기는 이제 하윤의 머리로 쏟아졌다.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르고, 욕조 난간을 잡은 손끝은 희게 질렸다. 하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가 몰렸던 살덩이가 사그라들고, 온몸이 발발 떨렸다.
언제 마개를 막은 건지 물이 고여 허벅지 옆에서 찰랑였다. 무경은 욕조 빈 곳에 샤워기를 던지고선 몸을 돌렸다.
하윤은 무경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숨을 죽였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아주 잠깐 가쁘게 가슴팍을 들썩였다.
다용도실에 남겨졌을 때처럼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가, 머릿속을 얼얼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수치스러운 곳을 숨기듯 하윤은 자기 성기를 내리눌렀다. 그러다가 손끝을 오므려 꽉 움켜쥐었다.
하윤은 그날 자신이 해선 안 될 일 중에 하나를 추가했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