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희미하게 들리는 속을 게워 내는 소리에 하윤은 다급히 방문을 두들겼다.
“무경아, 무경아 왜 그래? 체했어? 괜찮아? 문 좀 열어 봐.”
달칵, 달칵, 달칵.
이미 잠갔는지 문손잡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윤은 굳게 닫힌 방문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하윤은 무경이 휴일이라 쉬는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몸이 안 좋아서 쉬는 모양이었다. 폭주가 잦긴 하지만 무경은 건강 체질이었다.
하기야 그러니 잦은 폭주를 견디는 것이리라. 그런 애가 아픈 거면 얼마나 아픈 걸까.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지도 몰랐다. 하윤은 급히 휴대전화를 찾았다. 마침 거실에 둔 충전기가 있어 다행이었다. 급히 충전 선을 연결하고 무경이 의식을 잃은 건 아닐까 싶어 재차 그를 불렀다.
“무경아, 대답 좀 해 봐. 몸 많이 안 좋아?”
무경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답답해하던 하윤은 문득 마스터키를 어디에 뒀는지 떠올렸다. 급히 열쇠를 들고 와 문을 따려고 할 때, 무경이 소리쳤다.
“제발, 다가오지 좀 마!”
손끝에 걸린 열쇠가 짤그랑 소리를 냈다. 이어지는 침묵이 너무나 무거웠다. 하윤은 침묵에 짓눌린 채 몇 번이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겨우 소리를 쥐어 짜내며 물었다.
“……그래도, 괜찮은지 알아야 말지.”
무경은 대답 대신 비명을 질렀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에 공명하듯 하윤의 몸 또한 함께 떨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슬프고 모든 일이 막막했다.
하윤의 손은 잠긴 문을 두드리지도, 열지도 못하고 그대로 미끄러졌다.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 담긴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윤은 무경에게 타임캡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무경은 하윤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말 한마디 붙이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마저도 경고일 때가 많았다. 하윤은 그 과정에서 무경이 하는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고 또 바쁘게 살았다.
다가오는 게 버겁게만 느껴지던 날들이, 늘 그랬듯이 별다른 기억을 남기지 못하고서 하윤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하윤은 모든 것이 괜찮았다. 무경이도 가족도 곁에 있지 않은가. 그런 중에 무경이 절 괴롭히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저는 무경을 사랑하고, 무경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저희에게 종속된 운명이었으니까.
무경이 절 사랑해서 예전에 자신의 모든 짜증과 수고를 감내했던 것처럼 저 또한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윤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이따금 견딜 수 없이 힘들어지면 엄지로 손바닥 안을 긁는 척 중지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그러면 어느 정도 나아졌다. 딱 견딜 수 있을 정도로만.
“…….”
새벽 이른 시간 즈음에 하윤은 문득 잠에서 깼다. 아직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몸도 나른하고 눈에 졸음이 가득했으나 가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윤은 곧장 거실로 향했다.
‘얜 왜 이렇게 불쌍하게 자고 있어.’
하윤의 예상대로 무경은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무경을 안아 침대로 옮길 수 없는 하윤은 곤란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난방이 잘 되는 집이라지만 이불 없이 덜렁 누워 자기엔 조금 허전할 것이다.
하윤은 침실에서 담요와 베개를 들고 나왔다.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술병을 보아하니 암만 예민한 백무경이라도 쉽게 깰 것 같지 않았다.
‘술김에 착각할 수도 있고.’
예전과 달리 무경은 저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수더분하게 굴었다. 물론 수더분인지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건지는 조금 헷갈리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베개 하나 베게 해 주는 것엔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하윤을 조심스레 무경의 머리를 받쳐 올려 그 사이에 베개를 대어 주었다.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머리 건드려서 깨긴 깰 거로 생각했는데.’
문득 욕심이 돋아 손이 나갔다. 그러나 하윤은 무경을 만지지 못하고 다시 손을 거뒀다. 담요를 마저 덮어 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불을 끄려고 했으나 아쉬운 마음에 멈춰 섰다. 하윤은 소파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잠든 무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더럽게 잘생겼네.’
예전에 비하면 인상이 사나워졌으나 워낙 이목구비의 배분이 좋아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무경을 마음에 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윤은 주먹을 쥔 채 엄지로 반지를 굴렸다.
‘깨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어나지 못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또 언제쯤에야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때 무경이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오랜만에 어린 무경과 지금의 무경이 겹쳐 보였다.
“……나, 너 좋아해. 몰랐지.”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에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켰다.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가둬 두었던 숨을 뱉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불을 끄고 막 돌아섰을 때, 누워 있던 무경이 일어나 있었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하윤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무경의 한쪽 눈에 쌍꺼풀지고 흰자위에 주변이 불그스름했다.
“……씨발, 역겹게.”
“…….”
언짢은 무경과 눈이 마주치고, 그 순간 무경의 눈이 번들거렸다. 하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무경이 기억을 잃고 처음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어떤 꼴을 당했는지 하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처럼 무경은 하윤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그는 하윤의 손을 우악스레 잡아끌었다. 그가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알아차린 하윤은 곧장 몸을 뒤로 젖히며 반항했다.
급한 대로 소파를 잡았으나, 무경이 소파를 띄워 아예 뒤집어 버렸다. 소파가 뜨는 순간 예상한 하윤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바짝 엎드렸다. 그러나 무경은 별 어려움 없이 하윤의 상체를 염동력으로 띄웠다.
떴다가, 가라앉았다가. 자다 깨서 그런지 무경의 능력이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윤의 무게중심을 무너트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무경은 중심을 잃은 하윤의 발목을 우악스레 잡아끌었다.
“무경아, 무경아!”
“…….”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봐!”
“들으면 뭐? 달라지기라도 해?”
“아니, 그게.”
“그런 거 아니면 입 다물어. 토할 것 같으니까.”
무경은 잡고 있던 하윤의 다리를 팽개치고, 왼손을 잡아챘다. 무경의 시선이 하윤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닿았다.
무경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눈에 혐오가 가득했기 때문에 무어라 말하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하윤의 뱃속이 펄떡거렸다. 감추듯 손을 아래로 내렸으나 이번에도 무경이 빨랐다.
무경은 하윤의 손을 억지로 펼쳐 헐거운 반지를 빼내기 시작했다. 하윤은 어떻게 해서든 무경의 손을 떨치려 했으나, 무경의 염동력에 발이 뜨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의 대치 끝에 무경은 하윤의 반지를 빼앗았다.
“도, 돌려줘. 무경아, 제발. 제발 이러지 마.”
하윤의 애원에도 무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하윤을 팽개친 다음 베란다로 나섰다. 곧장 창문과 방충 문을 열었다. 무경은 문을 열자마자 밀어닥치는 냉기에 조금도 움츠리지 않았다. 까만 밖을 응시하던 그는 빼앗은 반지를 창밖으로 던졌다.
“……!”
까만 밤에 잡아 먹혀 작은 반지는 모습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윤은 허겁지겁 일어나 무경을 밀치고 베란다 창틀 위에 섰다. 난간에 기대 아래를 봐도 보이는 건 늘 보는 전경뿐이었다. 하윤은 입을 달싹였다.
‘안 돼.’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제게 남는 게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하윤은 난간 턱에 발을 올렸다. 순식간에 난간 위로 뛰어오른 하윤은 이번엔 난간을 박차고 뛰었다.
아래로 떨어져야 할 몸이 잠시 주춤하더니, 갑자기 목이 콱 졸렸다. 뒤에 서 있던 무경이 하윤의 옷깃을 잡아채고 뒤로 당겼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하윤은 벽에 부딪혔다. 아찔한 충격에 머리가 얼얼해지는 것과 동시에 또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낙법을 쓰긴 했으나 차가운 타일 바닥이라 충격이 상당했다. 하윤이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이, 무경은 하윤의 멱살을 잡아채고 비명같이 소리 질렀다.
“너 미쳤어?!”
“…….”
“죽으려고 작정했냐고!”
“…….”
“어?! 대답해 봐!”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반지를 되찾고 싶었다. 가볍고 작은 반지가 떨어진 궤도와 자신이 떨어질 궤도가 같을 수 없는데도, 그저 같은 장소에서 떨어지면 근처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반지와 달리 사람인 저는 떨어지면 터지고 부러져 죽을 게 뻔한데도.
‘능력도 쓰지 못하는 게.’
아무것도 못하는 게.
턱밑이 떨리고 목이 축축했다. 하윤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윤은 자신의 멱살을 잡아챈 무경의 팔을 붙잡았다.
“고작 반지 하나 되찾으려고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거냐고. 대답해 보라니까!”
“…….”
고작 반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윤은 쌕쌕 바람 새는 소리만 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 진짜 사람 질리게 한다.”
“…….”
“그래, 어디 한번 실컷 찾아봐.”
무경은 하윤의 멱살을 잡고서 현관으로 이끌었다. 이번엔 하윤 또한 맥없이 끌려갈 뿐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더는 저항할 힘이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간간이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꺾여도 무경은 힘으로 하윤을 잡아끌었다.
무경은 문을 열고 하윤을 복도로 밀쳤다. 힘없이 주저앉은 하윤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무경은 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하윤은 복도에 주저앉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고백해서 그래?”
답이 돌아오지 않을 말인 줄 알면서도 하윤은 문에 질문을 던졌다.
“내 사랑이 더러워서?”
하지만 무경의 대답 대신 제 머리가 대신 답을 떠올렸다.
“아니면 내가 더러워서?”
서글픔이 밀려와 하윤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들썩였다. 소리를 내지 못한 탓인지 가슴이 갑갑했다. 쿵쿵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다가, 이내 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닥에 봉분같이 엎드렸다.
차가운 타일 바닥을 손끝으로 긁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떨 땐 머릿속이 새까맣게 되었다가, 또 어떨 때는 눈앞이 벌겋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온몸이 다 타서 회백색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 위층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하윤은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들어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