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적당히 해라.”
<스물한 살의 봄>, 무경은 잦은 폭주 양상이 관찰된 탓에 정기검진 외에 추가 검진을 받아야 했다. 무경을 담당하는 의사, 최경철은 무경의 잦은 폭주가 무경 본인의 의도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가 없었던 탓에 혀만 쯧쯧 차며 경고를 남겼다.
그러나 무경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척했다. 최경철은 무경을 가증스러워하다가 케케묵은 인연을 끄집어냈다.
“서 선배가 계셨으면 얼마나 슬프셨겠냐. 응?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도 험한 세상인데 네가 널 괴롭히면 어째.”
“그러게요. 계셨다면 속상해하셨겠죠.”
최경철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무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무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려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최경철은 피식 웃다가 엄지로 머리를 긁었다. 그는 무경과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던지 검사 결과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폭주치고는 상태가 좋네. 여기 보이지? 이게 작년이랑 재작년 결과인데 스트레스를 줘도 능력치 하락폭이 일정 구간 이상 내려가지 않아. 체중은 좀 잘 챙겨 먹으면 될 것 같고, 키는 이제 더 안 커도 될 것 같고.”
“…….”
“왜? 더 크고 싶어?”
무경은 최경철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별생각 없어요. 크면 크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최경철은 있는 놈들이 더하다며 혀를 찼다.
“작은 놈들은 일이 센티라도 늘려 보겠다고 신발에 깔창을 쑤셔 넣기 바쁜데. 키 큰 놈은 상관도 없다고 그러네.”
무경은 키 작은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며 농담을 늘어놓았고 최경철은 그런 무경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얼굴이 낫다.”
“…….”
“너무 널 몰아붙이지 마. 잘하고 있으니까.”
최경철의 말에 무경은 말없이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최경철은 그런 무경을 바라보다가 나가 봐도 좋다고 대답했다. 무경은 최경철을 향해 꾸뻑 인사한 뒤 진료실을 나왔다.
“……잘하고 있다.”
검진센터를 벗어날 때쯤 무경은 최경철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경은 웃음 뒤에 일그러진 얼굴을 빠르게 가다듬었다.
최경철이 눈치챈 대로 무경의 잦은 폭주는 무경 본인이 의도한 바였다.
무경은 힘을 제어하는 데 이미 오래전부터 도가 트여 있었다. 오래전부터 힘의 제어를 중점적으로 수련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인즉 예전부터 폭주의 위험에 자주 노출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김하윤의 말로는 김희원이 없을 때 곧잘 그랬다는데 믿기 조금 어려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폭주에 취약한 몸임은 분명했다. 그걸 제어하고 있었으니 폭주를 하는 것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조금 덜 참으면 됐으니까.
굳이 문제라고 꼽을 만한 것은 폭주한 뒤 주변에 끼칠 여파였는데, 심하게 능력을 쓰거나 하진 않은 탓에 집 안 집기들과 가구를 깨는 정도로 그쳤다. 그 정도면 감당할 만한 피해라 무경은 그냥 감수하기로 했다. 솔직히 그것 말고는 별 방도가 없으니까.
무경은 폭주 중에 느끼는 안도감에 중독되어 있었다. 안도감과 중독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경은 폭주 중에서야 비로소 안도를 느꼈다. 자신이 상실한 존재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성냥팔이 소녀가 눈 내리는 겨울밤에 성냥불을 붙이며 환상을 본 것처럼, 무경은 폭주 중에서야 그토록 갈구하던 존재와 조우했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 그의 체취, 그의 체온이 그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를 만나면 지독하게 시달렸던 상실감에서 벗어나 안도를 느꼈다. 그러고는 그를 현실에서도 함께하도록 붙잡고 깨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무지개를 쥔 것처럼 깨어서 손을 펼쳐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차라리 아무도 없는 게 나았다. 때때로는 김하윤이 그 자리에 있곤 했으니까.
무경은 폭주 상태에서 벗어나 깨어난 뒤에 김하윤을 보는 것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김하윤의 존재는 무경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처박히게 했다. 무경은 그럴 때마다 모멸과 수치에 벌벌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김하윤의 존재가 자신의 폭주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자기 몸으로 몸소 실험해 봤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폭주한 뒤 김하윤을 발견했을 때와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차이가 있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폭주를 했음에도 그저 폭주 양상이 관찰되니 검사 좀 자주 받으라는 데서 그쳤을 것이다. 무경은 예전에 제대로 폭주했을 때를 떠올리며 결과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김하윤은 자신의 폭주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김하윤의 말대로 하나 남은 가족 같은 사이라 무의식중에 의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김하윤을 김희원이라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물론 어느 쪽이든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무경은 검진센터에서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에서 멈춰 섰다. 시계를 보는 사이 시커먼 특수호송 차량이 그의 앞에 도착했다.
“딱 맞췄지?”
사이드브레이크 내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고 무장한 남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무경은 시계를 톡톡 건드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작전이었으면 실패했다.”
“으휴, 깐깐한 새끼.”
차에선 두 명의 무장한 요원이 내려 무경의 소지품을 확인하고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한 측정기를 부탁했다. 수치를 대강 확인한 다음에야 요원은 무경을 차로 안내했다.
무경은 폭주 위험도가 높아 초인특수관리청으로부터 운전 자제 권고를 받았다. 덕분에 특수호송 차량과 전담 요원이 있어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전담 요원들은 초능력자와 일반 군인이 함께했는데, 사실상 제대로 폭주하게 되면 무경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구색 맞추기였다.
“별문제 없다든?”
무장한 요원 중 초능력자인 박병건이 친한 척 말을 붙였다. 그는 무경과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당시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마주하자 동창이라는 이유로 살갑게 말을 붙이는 등 스스럼없이 굴었다.
무경은 병건을 슬쩍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제 권고가 언제쯤 풀릴까?”
“글쎄.”
“글쎄는 뭐가 글쎄야. 지금 내 혈세가 줄줄 새고 있구만.”
무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이 특수호송 차량이지 움직이는 감옥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남들은 그 때문에 특수 호송 차량에 타는 것을 꺼렸으나 무경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말 많은 택시 기사가 있는 튼튼한 택시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무경이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병건은 계속해서 수다스럽게 주절거렸다. 식당에서 나온 메뉴부터 오늘 대기 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 그렇게 한참 주절거려서 오늘 왜 늦었는지를 설명했다.
무경은 병건이 영원히 입 닥치도록 만들고 싶었으나, 전담 요원을 공격하는 것은 귀찮아질 수 있었기에 참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끼어든 차량에 군인이 급제동을 걸었다. 반동으로 몸이 크게 들썩였다.
“야이, 새끼야. 운전 똑바로 안 해?!”
“죄송, 죄송합니다.”
“…….”
“미친놈아. 내가 운전할 땐 운전만 열심히 하라고 누누이 말했지! 폭탄 싣고 가는 새끼가 조심성 없이!”
박병건은 제 성에 못 이겨 쏟아 내 놓고는 무경의 눈치를 살폈다. 무경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저 고개를 돌렸다. 이른 오후임에도 도로엔 차가 많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무경은 잠깐 잠이라도 잘까 싶어 눈을 감았다. 마침 바로 앞에서 신호가 끊기고 차는 다시금 멈춰 섰다. 병건은 몸을 세우며 또다시 군인을 타박했다. 그냥 쭉 밟아서 뒤차 따라붙지 왜 섰느냐고, 이 신호가 몇 분 걸리는 줄 아느냐고. 군인이 사과했지만, 병건은 무어라 더 쏟아 내고 싶은지 입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몸을 젖혔다. 그리고 그때 때마침 건널목을 건너가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어?”
병건은 몸을 돌려 무경을 향해 손짓했다. 무경은 대꾸 없이 짜증을 가득 담아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병건이 콧등을 찡긋거리며 건널목을 건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쟤, 김하윤 아니냐?”
병건의 말대로 김하윤이었다. 무경은 김하윤을 보는 순간 몸을 세웠다. 잠잠하던 신경이 바짝 섰다. 김하윤은 일행이 있는지 간간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웃기도 하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무경은 저도 모르게 기운을 풀어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건널목을 지나고 있었으나 무경은 김하윤과 그 옆에 있는 일행만을 느꼈다. 그리고 일행의 입술 움직임을 파악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넌 남자애가 이렇게 희니? 남자애들 이렇게 희면 여드름이라도 있는데 그런 것도 없고. 화장품 모델 해도 되겠다, 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렇게 좋은데. 너 솔직히 말해 봐. 시내 돌아다니면 양복 차려입은 아저씨들이 명함 막 주지?]
[그런 적 없어요.]
[야, 너 너무 신입생 띄워 주는 거 아니야?]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자꾸 볼수록 눈도 못 마주치겠잖아.]
일행의 손이 자연스레 김하윤의 뺨을 만진 다음 어깨를 짚었다.
[얘 지금 보니 몸도 좋네. 야, 얘 만져 봐. 근육 장난 아니야.]
[에이, 그러지 마세요.]
일행의 말에 다른 일행 또한 김하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깨와 등, 그리고 복부에 몇 차례씩 손이 닿았다. 무경은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그저 웃기만 하는 김하윤을 보며 심사가 뒤틀렸다.
‘왜 웃지?’
웃을 일도 아닌데 왜 웃을까. 무경은 김하윤의 웃음이 고까웠다. 속이 타고 장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멀어져 가는 김하윤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