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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34화 (34/162)

34화

퍼억!

“……!”

깜박 잠들었던 하윤은 걷어차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뜸과 동시에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다행스럽게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낙상은 면했다. 얼떨떨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무경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집에서 나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무경이 자신을 놓지 않으려 하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힘이 빠지길 기다리다가 그만 깜빡 잠들고 만 것이다. 거기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바깥이 어둑했다. 학원도 학원인 데다 귀가도 늦어졌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눈앞에 있는 무경이었다.

“네가 여기 왜 있냐고.”

무경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네가 그. 연락을 너무 안 받아서. 그래. 그래서.”

“연락을 안 받은 거랑 네가 여기서 자고 있는 게 무슨 상관인데.”

“아니, 아니 일단 들어 봐.”

하윤은 몸을 일으켰다. 불시에 허리를 걷어차이는 바람에 놀랐는지 허리가 뻐근했다.

“네가 너무 연락을 안 받으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그래서 찾아왔는데 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런데 네 대답은 없고.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서.”

“그래서 문을 따고 들어왔다?”

무경의 질문에 하윤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쓰는 비밀번호 뻔하지 뭐.”

“…….”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찌 됐든 들어오니까 거실에 가구는 어떤 건 떠 있고 어떤 건 떨어져 있고 완전 난장판인거야. 거기에 넌 공중에 떠 있고. 가만 두면 진짜 크게 다치겠다 싶어서 침실로 데려왔지.”

하윤은 말을 하다 말고 무경의 눈치를 살폈다. 불을 켜지 않아 무경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좋지 않은 건 알겠는데.’

“내가 너 일이 년 본 것도 아니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다 아는데 안 할 수 없잖아.”

무경은 계속 말해 보라는 양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침대에 내려놨는데 네가 안 떠오르게 해야 하잖아? 근데 또 내가 일어나니까 너 떠오를 것 같은 거야. 암만 침대라지만 잘못 떨어지면 목이 꺾일 수도 있고. 그래서 상황을 지켜보자 싶어서 옆에 있었던 거지. 더 심각해지면 신고도 하려고. 근데 그러다가……. 자 버렸나 봐.”

무경은 말 대신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죽든 말든 내버려 두라고.”

“어떻게 그래.”

“네가 뭔데 그래?”

“……네 친구.”

하윤의 대답에 무경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하윤의 앞까지 걸어왔다. 무경은 긴장한 하윤의 이마를 검지로 툭 툭 밀어내며 말했다.

“누가 네 친군데?”

무경의 눈을 본 순간 하윤은 머리가 얼얼했다.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했으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를 잊었던 병원에서도, 연구소에서 봤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그의 눈빛을 무어라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멸이 섞여 있었다. 하윤은 밀려드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친구, 하기로 했잖아.”

하윤은 무경에게 약속을 상기시켰다. 자신이 그가 잃어버린 기억을 말해 주고 그 기억이 사실이면 친구가 되자 하지 않았던가.

“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왜 못 믿는데.”

“넌 김희원이 아니니까.”

하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무경의 서슬 퍼런 기세에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으나 본래 그는 지고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 사실 져 본 적이 없었다. 백무경과의 관계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날 안 믿는데 김희원은 왜 믿는데.”

“…….”

“내가 알려 준 이름인데, 그것도 의심하고 믿지 말아야지.”

“비록 잠시 잊긴 했었지만 네가 알려 주지 않았어도 떠올렸을 거야. 다 잊어도 그 애만큼은 알 수 있었으니까.”

거짓말. 네가 뭘 알아. 대체 뭘 아느냐고. 바늘같이 날카로운 말들이 목구멍에서 쏘아지길 기다렸다.

무경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른 듯 숨결이 떨렸다. 아마 그 또한 모순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경에게 희원의 존재를 말해 준 사람은 하윤이 유일했고, 잃어버린 추억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하윤이 유일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경에게 말해 준 김희원은 실제 김희원의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김하윤의 거짓말로 만들어진 존재니까. 무경이 암만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려 해도 할 것이 없었다.

아예 없으니까.

“나가.”

“…….”

“당장 나가라고 했어.”

하윤은 말없이 무경을 바라보았다. 무경은 하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하윤은 그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꽉 쥘 대로 꽉 쥔 주먹이 떨렸다.

하윤이 움직이지 않자 무경은 하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나 너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제발 내 눈앞에서 꺼져 좀!”

하윤은 무경의 손을 피해 몸을 틀었으나 이미 벽에 몰려 있었다. 성큼 다가온 무경은 하윤의 멱살을 틀어쥐곤 우악스레 당겼다.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도록 어정쩡한 위치에서 잡아끌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이거 놔!”

하윤은 무경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옷 뜯어지는 소리만 요란하게 날 뿐 무경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하윤은 이대로 끌려 나가지 않으려 버텼다. 그러나 발끝과 손끝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무경은 작정을 한 것인지 하윤이 버틸 때마다 방해했다. 하윤이 일어나 뒤로 누우며 버티려 하면 발밑을 중심을 잃게 하고, 손으로 문틀을 잡고 버티면 뒤로 밀어 나동그라지게 했다.

하윤이 쓰러지면 뒤든 앞이든 옷을 잡고 끌어당겼다.

하윤은 그 와중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손이나 발에 닿는 대로 잡거나 걸고 보다 보니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서는 온갖 가구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하윤은 무경의 손을 잡은 손에 체중을 실었다.

무경이 짜증을 내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몸을 재빠르게 돌려 무경의 오금을 걷어찼다. 중심을 잃은 무경은 하윤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복도 벽에 몸을 기댔다.

“…….”

“…….”

하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갖은 애를 썼더니 열이 훅 피어올랐다. 하윤은 무경이 그랬던 것처럼 참담함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안하다고 했었잖아.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너야말로 왜 이렇게까지 버티는 거야. 내 집에서 나가 달라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

무경의 말이 맞았다. 그냥 무경이 나가라고 할 때 자신이 나갔으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몸싸움하듯 버티고 끌어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하윤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다. 나가라는 대로 나가기엔 너무 분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경에게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백무경이 귀하게 키운 날 이렇게 취급하냐고.

걔가 알면 얼마나 속상해할지 알고서 그렇게 하느냐고.

하지만 그렇게 소리칠 여유가 없었다. 애쓰느라 한껏 흥분했다가, 기진맥진해서 화도 억울함도 한풀 식었다. 열기를 따라 부글부글 끓기만 하고 쏟아 내지 못한 말이 뱃속에서 졸아들다 못해 굳었다.

그러고 나자 그냥 성질 긁지 말고 나가라고 할 때 나갈 걸 하는 애매한 후회만 밀려들었다. 옷도 엉망이고 몸도 엉망이 됐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하윤은 무경을 올려다보았다.

“쳐다보지 마. 네가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좆같으니까.”

“그럼 진짜 친구 안 할거야.”

“너 돌았어? 지금 상황 판단이 안 돼?”

무경은 기가 찬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냥 입 닫고 나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이대로 나가면 정말 무경의 말대로 관계가 끊어질 것 같았다. 물론 지금도 이렇다 할 관계는 아니었지만.

“마지막이야. 말로 할 때 나가. 창문 밖으로 내다 꽂기 전에.”

무경은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하윤은 잠시 고민했다. 무경은 무력이든 염동력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하윤을 창밖으로 집어 던질 수 있었다. 무력으로 던지면 운이 좋았을 때 골절로 그칠 수 있으나, 염동력으로 했을 때는 목이 꺾일 것이다.

하지만 죽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진작에 능력을 썼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화를 참을 필요도 없었다.

하윤은 곧장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여지. 일말의 여지가 남은 것이다.

“내 말은 믿을 수 없고, 남들도 말해 줄 수 있는 거니까 내가 필요 없다면 나만 아는 걸 말해 주면 되잖아?”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하윤은 대꾸 대신 복도 한쪽에 내팽개치듯 벗어 둔 가방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트 한 권을 찾아 무경에게 건넸다. 마음 같아선 던지고 싶었으나, 조금 남은 이성이 제지했다. 그러나 무경은 노트를 받지 않았다.

“능력은 잃었어도 선생님한테 배운 걸 전부 잊어버린 거 아니야. 그날 선생님이랑 마주쳤던 곳 찾을 수 있어. 아니, 거의 다 찾았어.”

거짓말이었다. 그곳을 찾으려고 이곳에 온 것이니까.

“선생님은 찾을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은 찾을 수 있을지 몰라. 물론 시간이 지나서 흔적이 손상되었을 수도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찾아는 봐야 하지 않겠어?”

“잊어버린 게 아니면 진작 찾았어야지. 시간 끌려고 개소리 지껄이는 거 다 알아.”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마.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근데, 진짜면 너도 약속 지켜.”

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윤은 돌아서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무경이 자신을 제지하지 않는 틈을 타 기억 속 문이 있던 장소를 살폈다. 아주 조그맣게 표시해 둔 흔적부터, 인테리어용으로 세워 둔 그림 속 흔적들을 찾아내 메모했다.

그사이 무경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소리가 크게 난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윤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숨을 고르고, 머릿속을 비우자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무경의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자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거울에 모습이 비쳤다. 옷은 다 뜯겨 있고 손톱에 긁혔는지 상처가 나 피가 맺힌 곳도 있었다. 그리고 무경에게 잡혔던 이곳저곳에서 슬슬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뚱해 보이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견딜 수없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달아나듯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숨이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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