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하윤은 공책에 적은 숫자들 중, 그나마 오늘 내로 갈 수 있는 곳을 골랐다.
선택지가 얼마 없었기 때문에 고르는 것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진 않았다.
숫자를 보는 순간 하윤은 그곳이 어디쯤일지, 그리고 어떤 건물 안에, 어떠한 형태로 있는지를 떠올렸다. 간단히 기록된 숫자에는 그러한 정보가 없음에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병아리가 그려진 주황 간판, 초록색으로 상호명이 써 있고, 마지막 한 글자는 벗겨져 테두리만 남겼다. 그 바로 옆 판자로 만들어진 외문이 있었는데, 그 아랫부분에 무릎 높이 정도의 작은 샛길이 있을 것 같았다.
하윤은 그것이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능력을 잃기 전 하윤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곳으로 통하는 문을 알았다. 스스로 찾기보다는 문들이 알아서 하윤을 인도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문들이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윤은 달리 문의 위치나 표식을 외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이주는 교육을 그만두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으로선 해당 위치가 어떤지, 문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예전 기분을 떠올리며 상상한 게 다가 아닐까.
‘능력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어째, 가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희원의 집을 찾아갔을 때처럼. 그래서 로드뷰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마다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윤은 혹시 아닐 때를 대비하여 기대를 억누르려고 애썼다. 깊이 생각하지 말라며 자신을 다독이며 떠올렸던 장소에 다다랐다.
“…….”
멀리서부터 기름 냄새와 떡볶이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들의 하교를 기다리며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하윤은 달리듯 걸어가 분식집의 간판을 확인했다.
하윤은 자신이 이 동네에 와 본 적은 없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나지 않았다. 하윤은 흘러내린 안경을 손등으로 추켜올렸다. 무경과의 다툼으로 살짝 휘어진 안경은 평소보다 더 잘 흘러내렸다. 방금 올린 게 무색하게 또 스르륵 내려왔다.
하윤은 콧등을 찡그려 안경을 올리다가 분식집을 힐끔거렸다.
“미치겠네.”
“……왜, 왜 미치는데. 배고파서 그래?”
카운터를 닦던 분식점 주인이 말을 붙였다. 하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대화를 피하고 보려고 했던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삐죽였다.
“서비스 많이 줄게. 하얗게 생겨 가지고, 아줌마 마음이 약해지려고 그래. 튀김 막 튀겨서 아무거나 다 맛있어. 일 인분 포장해 줄까?”
하윤은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 만 원짜리 하나가 손에 잡혔다.
“뭐야, 돈 있네. 범벅으로 포장해 줘? 치즈 올려서?”
“예에. 저, 근데 사장님.”
“응?”
“여기 몇 년 하셨어요?”
“장사?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되게 맛집같이 생겨서.”
“아휴, 말하는 것 좀 봐. 귀엽게 생겨 가지구. 난 여기 장사한 지 십삼 년도 더 됐지.”
“되게 오래 하셨네요.”
분식점 사장은 씩 웃으며 튀김 두어 개를 더 넣어 주었다. 아무래도 많이 배고파 보였는가 보다. 하윤은 건물 옆에 있는 문에 관해서 물었다. 그러나 사장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다들 가게 내고 싶어서 기웃거리고 그랬는데, 주인이 도통 안 나타난다네?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물상도 아니고. 그냥 있어. 근데 그냥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들어가려곤 하지 마.”
“왜요?”
“왜요는 왜 왜요야. 남의 땅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동네 양아치들도 몇 번 아지트 삼아서 들어가 보려고 했다는데, 땅이고 벽이고 쇠못을 박아 뒀더라구. 다들 들어가지도 못하고 피만 보다가 말았어. 자, 여기. 사천오백 원.”
약간 강매당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하윤은 치즈 튀김 범벅이 든 검은 봉지를 받고 앞으로 걸어갔다. 예상한 문의 위치가 애매한 곳에 있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조금 뒤면 초등학생들이 쏟아질 곳에서 수상해 보일 만한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미치겠네.’
상상한 대로 분식집과 문이 있는 것도 미치겠고, 바로 코앞에 있는데 확인하지 못하는 게 미칠 지경이었다. 하윤은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애가 들들 끓어서 바싹 마른 입술을 짓씹고 핥았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뒤돌았다. 순간 안경 사이로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다.
“…….”
‘미치겠다고 했더니 진짜 미쳐 버린 건가.’
이젠 보일 리 없는 문이 보였다. 그러나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안경알 옆으로만 보였다. 하윤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왼쪽 눈으로도 보이고, 오른쪽 눈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안경을 바짝 눈에 붙이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보이지 않았다.
하윤은 아예 안경을 벗었다.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하윤은 조금 전처럼 안경을 살짝 흘러내리게 했다. 그러자 또다시 안경알 옆 사이 공간으로 문이 보였다. 하윤은 그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다른 문이 보여야 함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지금 보이는 문은 자신의 망상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문이 보인다면 열 수도 있는 것인가?
당장 열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참아야 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만약 망상이 아니라, 진짜 보이는 거라면 왜 보이는 걸까?’
왜 다른 문은 보이지 않는 걸까.
‘안경 때문인가.’
하윤은 생전 안경을 잘 쓰고 다니라고 충고하던 서이주의 당부를 떠올렸다.
그녀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었을까. 어디까지가 짐작한 바고, 어디까지가 예상치 못했던 바였을까.
‘능력이 원래대로 돌아올까?’
아니면 여기서 그치는 것일까. 돌아온다는 가정이 있다면 재활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고 아니라면…….
‘갑갑해.’
머리가 좋았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이렇게 뭘 해야 할지 몰라 헤매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 돌아온다면 그건 결코 들켜선 안 된다.
‘그놈들은 문지기를 죽여서 곡옥을 빼냈어.’
그리고 그놈들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당연히 훗날을 기약할 것이다. 혹은 소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계획에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아예 없다고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문지기인 자신 또한 노려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윤은 ‘그날’을 떠올리며 자신의 복부를 문질렀다. 서이주의 배에서 빛나던 초록 빛, 그리고 문을 닫을 때 들리던 깨어지는 소리.
‘내게도 곡옥이 있었고 그건 그날에 깨어졌어. 아마 내가 문을 일부나마 보는 건 깨어진 곡옥의 조각이나마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조각이 원래대로 복구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서이주에게도 들은 적이 없었다. 단순히 남은 조각의 힘만 쓸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씨, 하나도 모르겠네.’
하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에 오기만 하면 뭐라도 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생각만 더 복잡해졌다.
“…….”
때마침 바람이 훅 불어왔다. 어지러운 마음만큼 머리칼과 주변의 낙엽을 헝클어놓았다. 하윤은 자신의 발끝에 걸린 채 까딱거리고 있는 낙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퇴원할 때만 해도 푸릇하던 나무 잎사귀들이 이제는 색이 바뀌어 있었다.
하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지금 할 것은 생각났다.
‘일단 먹고 보자.’
배를 다 채울 무렵에 하윤은 자신이 가야 할 것 같은 장소 두 곳을 떠올렸다. 하나는 김희원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경이 있는 곳이었다.
김희원의 집을 가려는 이유는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혹시 더 남아 있을지 모르는 김희원의 흔적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쓰레기가 그대로 있으면 좋을 텐데.’
자신이 헤집고 가는 바람에 아예 치웠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고양이들이 파헤쳐 아예 뿔뿔이 흩어졌을 수도 있고.
‘그리고 집 안에 들어가야 해.’
집 안에 남아 있을 흔적을 찾는 게 이번 목표였다. 쓰레기 안에 벽지를 뜯어낸 흔적이 있어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일단 들어가는 게 문제지.’
동네 주민들한테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했다.
암만 주인 없는 빈집이지만 뭐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하윤은 미성년자였다. 경찰에 신고당해 잡히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시신을 신고했을 때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그건 시신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빨리 올 수도 있지 않은가.
‘들키지 않고, 최대한 빨리 갔다 와야 해.’
하윤은 곧장 김희원의 집으로 향했다. 한번 찾아간 곳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동네에 도착해서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까도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저녁에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그냥 길을 올라갔다.
결론적으로 하윤의 선택은 맞아떨어졌다. 낮엔 동네 주민 대다수가 일하러 나가 집을 비운 뒤였기 때문이었다.
비탈길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다음, 쓰레기를 먼저 확인했다. 계속 방치되어 있었는지 주변이 지저분했다. 하윤은 미리 준비해 둔 쓰레기 봉지에 쓰레기를 담고, 의심쩍은 것들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김희원의 집을 찾기 위해 부근을 두리번거렸다. 동네 주민이 이야기할 때 숨어 있었으므로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녹색 페인트로 칠해진 대문을 보는 순간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윤은 우편함을 들여다보았다. 텅 비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바닥에 뭔가가 붙어 있었다. 하윤은 그것을 뜯어냈다. 젖었다가 마른 흔적으로 보아 비에 젖어 바닥에 붙은 채로 말라 버린 것 같았다.
‘적십자회비. 김응.’
예상이 들어맞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윤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자신을 다독였다.
‘침착해.’
주변을 살핀 다음 문을 살짝 밀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는 등, 관리가 제대로 안 된 탓인지 부드럽게 열리지 않았다. 하윤은 한 번 더 주변을 살핀 다음 힘주어 문을 밀었다.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주인 없는 집이라 잠금장치까진 걸어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뒤 하윤은 문어귀만 맞춰 살짝 닫았다.
옆집에서 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집 사이에 제법 높은 담벼락이 있었다.
‘그래, 이러니까 바로 시신을 확인하지 못하고 집 안에 들어와서야 알아차린 거야.’
김희원의 집은 대문을 들어오면 좌측에 창고가 있었다. 창고 뒤에는 수도와 장독대로 추정되는 단이 있었는데, 장독은 없고 대신 낡은 자전거와 빨래 건조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또 다른 창고가 있었다. 처음엔 화장실인가 싶었으나 정작 화장실은 집 옆에 난 길을 따라 들어가야 했다.
집 안에는 방이 두 개, 주방 겸 거실이 하나. 그리고 각 방과, 방과 거실이 이어지는 벽에 다락이 있었다. 또 신발장이 지나치게 밑에 있었는데, 좌측 벽에 미닫이 수납장이 있었다. 어른이면 몰라도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일반적인 집이 아니었다.
하윤은 자신이 모르는 옛 양식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숨을 곳이 많은 집이다.
“…….”
엎드려 수납장을 바라보던 하윤은 문득 수납장 안에 익숙한 표시를 발견했다. 손끝으로 더듬으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 인 순간, 자세 때문에 흘러내린 안경 사이로 [문]이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