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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24화 (24/162)

24화

불쑥 생각난 사람 하나 때문에 하윤은 오늘도 이른 아침을 시작했다. 더 잠들지도 못하면서 눈은 뻑뻑하고 몸은 나른했다.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길게 한숨을 내쉬던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바깥은 깜깜하기만 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자 아직 다섯 시가 채 되지 않았다. 하윤은 자리에서 미적거리는 대신 곧장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가볍게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몸은 개운해졌으나, 아직 눈은 뻑뻑했다. 하윤은 눈가를 문지른 다음 안경을 쓰고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 봤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휴대전화를 챙기는 게 고작이었기에 금세 준비를 마쳤다.

“운동 갔다 올게요.”

아무 말 없이 나가는 것은 그렇고, 가족들이 깨도록 큰 소리를 내는 것도 그랬다. 그저 옆에 있으면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을 남기고 집 밖으로 나왔다.

새벽녘 특유의 냄새가 폐부 가득 밀려들었다. 이른 아침을 시작한 사람들 한둘이 길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하윤은 가볍게 스트레칭한 다음 동네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사건 이후로 두 달여가 지났고, 동네는 상흔을 열심히 지워 내는 중이었다.

하윤 또한 괜찮아지려고 부지런히 노력 중이었다. 아직 생각을 미루기만 했지만, 그래도 배운 게 있었다. 괴로운 생각을 미뤄 두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한계에 다다랐다면 어떤 일이든 조심하는 게 좋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집 카드키를 놓고 와서 경비실에 연락해야 하는 일로도 서글프고, 좋아하던 음식을 먹을 때도 서글프고, 늘 지나다니던 길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하윤은 괴로운 생각을 비워 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미워해야 할 사람도 없었고, 용서해야 할 사람도 없었다.

김득철은 그날 무경의 손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자신의 능력이 사라진 것은 그저 그날 능력을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날 능력을 쓰지 않았다면 저도 무경이도, 그리고 가족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날 일을 몇 번이고 곱씹어 봐도, 설령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하윤은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의아해하겠지만, 김득철 일당이 서이주와 무경이를 노린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면…….

‘서울은 없겠지.’

하윤은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마 그날 일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하윤일 것이다.

서이주는 하윤에게 문을 닫으라고 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문을, 그것도 미궁의 문을 열고 닫으라는 말이 얼마나 막막하게 느껴졌는지 몰랐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 하윤은 인근 가장 높은 건물로 올라갔다.

이미 문은 거의 열려 있었다. 귀퉁이 두 곳만이 가까스로 남아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하윤의 눈에는 문틈 사이로 이미 괴수가 나오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열자. 닫혀 있을 때 열지 못하면 닫으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미궁이 정복되지 않는 한.

그게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미궁을 정복하기 전에, 미궁 문 바로 아래 있는 이 부근은 초토화된다는 것이었다.

군부대는 미궁 점령 이전에 미궁에 영향을 받는 지역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지역을 제한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 부근은 물자도 인력도 보충되지 않은 채 버려질 것이다.

그래서 열었다.

어떻게 열었는지는 솔직히 기억나지 않았다. 어떠한 절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려움도 없었으며, 그저 아주 운이 좋아 그냥 아무렇게 해도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재앙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괴수는 쏟아져 나왔고, 일대는 아비규환에 빠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괴수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미궁 아래에 있던 모든 생물이 괴로워했다. 헌터들은 괴로워하며 울부짖고 짐승처럼 땅을 기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남을 죽였다.

이는 괴수들도 마찬가지라 땅은 피와 미움으로 순식간에 얼룩졌다. 하윤 또한 두려운 나머지 머리 한쪽이 마비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해낼 수 있었던 건 이대로 가만있다간 무경이 죽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자신이 구할 수 있지만, 무경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무경은 폭주 중이었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믿을 건 팔찌밖에 없었다. 이미 미궁의 문을 열었으나, 그게 팔찌로 연 것인지 자신의 힘으로 연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물러설 수 없었으므로 하윤은 팔찌를 하늘로 쳐들었다.

미궁의 문을 닫고, 미궁이 열리면서 부서졌던 다른 문들도 닫으리라. 오직 그것만 생각했다. 그러자 팔찌가 분주히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팔찌를 이루고 있던 곡옥 알알이 바쁘게 흔들렸다.

처음엔 한 알이 깨어졌다. 김응이라는 이름이 흰 글씨로 하윤의 눈앞을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팔찌의 수많은 곡옥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어졌다. 이름이 없는지 무명으로 남은 자도 있었고, 한자도 된 이름도 더러 나왔다.

수많은 이름이 어른거림과 동시에 문이 사라졌던 통로에 다시금 문이 생겨 통로를 틀어막았다. 식은땀이 뻘뻘 나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그때, 마지막으로 서이주의 곡옥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미궁의 문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좀 더,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제 속에서 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든 말든 계속해서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문이 닫혔고, 통로에 끼이기 싫었던 괴수는 미궁 속으로 돌아갔다.

미궁의 문을 닫은 과정을 종합하자면 늘 그랬듯이 ‘하려고 하니까’ 됐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다른 뭔가를 한 게 없었다. 서이주가 자신을 답답해한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됐다.

어쨌든 김하윤의 열일곱 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업적을 이뤘으나, 그 사실은 무엇 하나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학생부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은 무사하지만, 무경이는 기억을 잃었고. 선생님과 아저씨는 돌아가셨고.’

물론 아무도 그가 문을 여닫았음을 몰랐기 때문에 다행인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째 또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서운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잃은 게 크니까 뭐라도 보답받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하윤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옆구리를 잡은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예전엔 이쯤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입원의 영향인지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있었어.’

하지만 이대로 계속 부지런히 운동한다면 곧 회복할 것이다.

“…….”

하윤은 멈춰 선 곳을 바라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 ‘우리 집’이었다. 물론 서이주가 들었으면 자신의 집이라고 큰소리쳤겠지만, 서이주의 집이 그들이 있을 곳이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터는 이미 정리가 끝난 뒤였다. 지하에는 탈출로도 있고 훈련실도 있었다. 자칫 다른 사람이 들어오거나 다른 물건을 적재했다가 피해를 볼 수도 있어 빠르게 철거한 뒤 메웠다.

서이주와 백진하의 집이라 그들의 흔적을 회수하기 위해서 기관에서 손을 쓴 것일 수도 있었다.

현재는 담벼락이 있었다는 흔적만 조금 남아 있었다.

하윤은 그 흔적을 발끝으로 툭툭 차다가, 대문이 있었던 곳을 찾아 그 앞에 섰다.

훅 내쉬는 숨과 함께 문을 열 듯 허공을 밀고,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대문과 얼기설기 엮은 철사 아치 위에 포도 덩굴이 먼저 방문객을 맞이했었다. 무성한 이파리 속에 포도가 네 송이 정도 있었는데, 제법 모양을 갖춘 것도 있고 알이 고작 서너 개 달린 송이도 있었다.

알이 커지기도 전에 익기만 하면 제가 따 먹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다. 좌측에는 감나무와 앵두나무, 대추나무가 심겨 있었고, 우측에는 동백나무와 철쭉이 심겨 있고 앞 옆으로 각종 꽃 화분이 있었다.

제법 많은 화초가 있었지만, 조경에 관심이 있는 집은 아니었다. 서이주의 집은 지하에 있는 수련실 때문에 대지가 넓어서 자연스레 마당이 생겼고, 그걸 본 사람들이 집들이 선물로 화분 하나둘씩 사다 안겼다.

그 수가 제법 많았는데, 화단에 자리 잡은 것들은 강자 생존의 법칙으로 살아남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하윤은 마당에 자리한 식물들이 좋았다.

이른 아침이나 일찍 집에 돌아왔을 때 즈음에 무경은 화단에 물을 주었다. 아무도 식물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툴툴거리면서 지레 찔린 자신이 슬금슬금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호수로 물을 뿌리기도 했다.

그럼 저는 억울해하며 소리치거나 무경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서로 흠뻑 젖은 채로 집 안에 들어와서…….

“…….”

하윤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전조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크게 슬픈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니면서 눈물은 도통 그치지 않았다.

눈물을 훔쳐내느라 바쁜 탓이었을까, 내내 미뤄 왔던 그리움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늘 대단한 서이주가 보고 싶었다. 서이주라면 죽고 못 사는 백진하도 보고 싶었고, 그리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나는.’

무경아,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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