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3. 거짓말쟁이의 결과
“하윤아, 벨트 제대로 매고. 에어컨 바람 괜찮지? 오늘 안 틀고 가면 쪄 죽겠어.”
“네.”
모친의 말에 하윤은 곧장 대답했다.
‘어차피 싫다고 해도 틀 거였으면서.’
심사가 단단히 틀린 게 분명했다. 하윤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지우려 애썼다. 무심결에 툭 뱉을까 봐 무서워 마른침을 꼴깍였다. 삼키고 또 삼켜서 가시 돋친 말을 뱃속 깊이 내려보낸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 몇 조각 있긴 했지만, 날이 맑았다. 그 난리 통에 살아남은 매미들이 번식하기 위해 우렁차게 울었다. 본능에 따른 당연한 울음이 왜 그렇게 부럽고 심술이 나는지 몰랐다. 하윤은 또다시 시큰거리는 눈가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에어컨 바람이 살짝 고인 눈물을 빨리 말려 주길 바랐다.
“어휴, 이 부근만 들어오면 골치가 아파.”
병원에서 벗어나 조금 지나자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덕분에 도로선이 엉망이었다. 이리저리 휘어졌다가 일차선이라기엔 애매하게 굵은 길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줄어들었다. 그렸다가 지운 차선도 혼잡도에 한몫했다.
길이 복잡하게 느껴졌던 건 하윤의 모친 이인영뿐만이 아니었던지 앞서 있던 차들도 우왕좌왕했다. 덕분에 신호에 걸려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길에 얼마 남지 않은 가로수가 마침 차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파릇한 잎사귀를 보며 하윤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에 여름이 다 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네.”
“그래도 여름도 이제 잠깐이야. 아차 하는 사이에 가을 되고, 가을이다 싶음 겨울 와 버리잖아.”
“…….”
“그나저나 하윤이 너 옷 사야겠더라. 집에 있는 건 이제 죄다 작아서 못 입겠어.”
“괜찮아, 엄마. 기준이 옷 입으면 돼.”
“야, 너 네가 기준이 보다 얼마나 큰 줄 알아? 휠체어에 앉아서 보니까 커 보였는가 보지?”
기준은 하윤의 세 살 어린 쌍둥이 동생 중 하나였다. 쌍둥이들은 이란성으로 다른 하나는 여동생이었다. 하윤은 문병차 방문했던 두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기준은 확실히 키는 작았지만 덩치가 있었다.
즉, 하윤이 옷을 얻어 입기엔 별문제가 없었다. 물론 상의에 국한되겠지만 말이다.
“걔가 자기 거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모르지? 지하가 자기 옷 입었다 치면 얼마나 소리를 지르고 싸우는지.”
인영은 둘의 싸움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하는 기준이 옷 입을 수 있지만, 기준이는 지하 옷 못 입잖아. 약 오르겠지 뭐.”
“안 그래도 억울하다고 지하가 새로 산 옷 꾸역꾸역 입다가 둘이 엄청 싸웠어. 지하 걔도 입을 테면 입어 보라고 계속 약 올리다가 기준이 진짜 입으려고 고개를 넣으니까 그때부터 울먹이는데.”
인영은 기준과 지하의 흉내를 내며 그들의 싸움을 재생했다. 우쒸, 우쒸 하면서 손 휘젓는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으나 확실히 기준을 연상시켰다. 반면 여동생 지하는 입술 모양만으로 흉내를 냈다.
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다가 마침 신호가 바뀌려는 것을 봤다.
“엄마, 신호 바뀌었어.”
“어머.”
인영은 다시 핸들을 잡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하윤에게 웃을 일이 아니라고, 너도 곧 거기 끼게 될 것이니 네 몫은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등의 조언을 남겼다.
하윤은 여태 동생들과 싸운 적이 없었다. 가족이 있는 집은 일 년에 몇 번 가지 않았다. 명절 당일 잠깐, 무경과 싸운 날 잠깐. 그러니 싸울만한 시간이 없었다. 또 비전투계이긴 하지만 백진하 밑에서 무술을 사사한 만큼 싸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내 붙어 있던 무경이랑도 심하게 싸운 적은 없지.’
무술을 배우느라 대련을 하긴 했으나 무경과는 진작 체급 차이가 났기 때문에 한 번도 진심으로 붙은 적이 없었다. 더욱이 무경은 하윤이 다칠까 봐 제대로 손대지도 못했다. 일상생활에서는 더 싸울 일이 없었다.
어지간한 일은 무경이 참고 넘어갔고, 저 혼자 골을 내는 일이 많았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일단 제게 넘겼다. 자신이 쓰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넘겼고, 쓰기 싫다고 하면 그제야 가져갔다.
음식도…….
“…….”
불시에 떠오른 기억에 예고도 없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하윤은 창가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청승맞게.’
세상 모든 게 저를 슬프게 했다. 적어도 하윤에게 있어선 이 세상은 이전에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원래 세상이 부서지고 저는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게 아닐까.
애써 소리를 죽이고 있는 사이 인영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선 마침 교통 방송과 토막 뉴스가 흘러나왔다. 정체가 좀처럼 풀리지 않더라니 요 앞에서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서로 빨리 가려다가 더 늦게 가잖아.”
차는 한동안 더 잠깐 움직이고 오래 서기를 반복했다. 정체 구간을 벗어날 때쯤에는 눈물도 어느새 말라 있었다.
정체 구간을 지나자 집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하윤은 인영을 도와 트렁크에서 짐을 내렸다. 병원 생활이 오래였기 때문에 이것저것 쌓인 게 많았다.
“이리 줘. 엄마가 들게.”
“아니야. 내가 들게. 이 정도는 들 수 있어.”
“안 무겁겠어?”
“안 무겁겠어?”
인영의 물음에 하윤은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하윤의 대답에 인영은 하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하여간 능글맞기는. 기준이 내려오라고 하면 되는데.”
“뭐 하러 그래. 그냥 하면 되는데.”
“그래도, 너 깁스 푼 지 얼마나 됐다구.”
“무거우니까 빨리 가자. 응?”
하윤은 인영을 재촉했다. 인영은 미련스레 꾸역꾸역 짐을 짊어진 하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하윤은 출입문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인영은 서둘러 하윤의 뒤를 쫓아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집 열쇠도 줘야겠네.”
“……그렇네.”
하윤은 생전 열쇠를 들고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챙겨 다녀야 했다.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자 인영이 입을 꾹 다물며 숨을 헉 들이켰다.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나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뭐.”
“그래. 나을 때까지만 들고 다니자. 끽 해야 몇 주 되겠어.”
하윤은 대답 대신 씩 웃기만 했다. 응, 이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하윤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중에, 좀 더 나중에. 좀 더 괜찮아질 때까지 생각하지 말자.’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었다.
집에 도착해 집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고도 낯선 냄새가 났다.
‘우리 집이 이랬던가?’
변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 그랬다. 거실 한편에 걸린 초등학생 때 찍은 가족사진, 낡은 소파, 치는지 마는지 모를 지하의 전자 피아노, 식물이 그득한 베란다.
하윤은 천천히 집을 돌아보았다.
“얘, 짐부터 내려놔야지.”
인영은 하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짐을 내려놓으라는 뜻이었지만 하윤은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손에 들고 있던 병 음료수가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순간 가슴이 철렁이고 신경이 곤두섰다.
하윤은 잔뜩 긴장한 자신을 보고 도리어 놀란 모친을 보고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아, 깜짝이야.”
하윤은 웃음을 흘리며 소파 밑에 짐을 내려놓았다. 음료수는 주방으로 가져가고, 책들은 기준의 방에 넣었다.
“그나저나 너 방은 어쩌니. 진짜 기준이랑 쓸 수 있겠어?”
“정 거슬리면 거실에서 자면 돼요. 혹시 기준이 코 곯아요?”
“가끔 거실에서 낮잠 잘 때 프프 거리긴 하는데, 밤엔 잘 모르겠네.”
하윤은 인영과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병원에 있을 때도 말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구체적이진 않았다.
‘생각하기 싫기도 했었고.’
인영이 가족 이야기를 하면 슬며시 화제를 돌렸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은 이야기해 두는 게 좋았을지도 몰랐다.
저녁때쯤이 되자 가족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제각각 집에 있는 하윤을 어색해했으나, 그렇지 않은 척했다. 하윤도 덩달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생각을 미루고, 대답해야 할 일이 있으면 웃고, 밥을 먹으란 대로 먹고, 물도 마시고, 과일도 먹고. 또 그러다가 거실에 앉아 내용도 알지 못하는 드라마를 봤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다 저물었다. 하윤은 기준의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냄새나고, 좁기도 하고.’
인영의 걱정대로 사내애 둘이 쓰기엔 방이 좁았다. 기준도 불편한지 연신 몸을 뒤척였다. 하윤은 잠자코 누워 눈만 끔뻑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가만있을 때, 자는 줄 알았던 기준이 입을 열었다.
“형, 진짜 이젠 능력 못 써?”
“……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
“그러게.”
이제 어떻게 하지.
하윤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기준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저가 뭘 안다고 혀까지 찼다. 하윤은 기준이 누워있는 방향으로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괜히 주먹만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당장 일어나 기준을 쥐어박기보다는 조금 전에 떠올린 생각만 계속 곱씹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현기증과 함께 점점 숨이 가빠 왔다. 하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호흡을 조절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하윤은 몸을 웅크리며 진정하려 애썼다. 식은땀이 뻘뻘 흘러내리는데, 돌연 기준이 프프 소리를 냈다.
“프흐르르릉, 프으.”
“…….”
딱 거기서 정점을 찍고 진정되기 시작했다. 하윤은 이불을 그러쥔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홀로 조용히 울음을 삭이다가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간 하윤은 TV를 틀었다. TV가 켜지기 무섭게 소리를 낮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제야 리모컨을 놓고 소파에 누웠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