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눈앞이 가물거렸다. 상이 맺혔다가 어두워지고, 다시 상이 어른거리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완전히 까만 세상으로 갈라치면 누군가 그를 자꾸만 흔들어 깨웠다. 하윤은 작게 신음하며 반항했으나, 별 소용없었다.
바쁜 걸음 소리와 쇠 찰캉거리는 소리, 그리고 바퀴가 드르륵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덮고 있던 이불이 획 들쳐졌다.
“환자, 일어나세요.”
“…….”
“이제 계속 깨 계셔야 해요. 주무시면 안 됩니다. 보호자분, 환자분은 의사 선생님 회진 도실 때까지 깨 계셔야 해요. 환자분 자려고 하면 계속 깨워 주세요.”
“아니, 계속 깨웠는데 아무래도 진정제 때문인지 계속 정신을 못 차리네요.”
“환자분이 계속 깨려고 해야 해요. 아니면 진정제 계속 맞아야 해요. 계속 맞아서 좋은 주사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애가 상태가 이렇다 보니 손을 대기가 좀……. 안쓰럽기도 하고요.”
“그래도 깨서 식사도 하고 해야 회복이 빨라지니까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윤은 힘겹게 눈을 떠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엄마?”
하윤은 문득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금세 입을 다문 하윤은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눈이 가물거려서 그런지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하윤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환자, 환자 진정하세요!”
간호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하윤을 부르며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하윤은 그제야 눈을 제대로 떴다. 잘 자다가 갑자기 깨서 벌떡 몸을 일으킨 기분이었다.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가만히 있자, 간호사가 침대를 세웠다.
“환자분 졸린 건 진정제 맞아서 그래요.”
간호사는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하윤이 비전투계이긴 하지만 정신계 괴수한테 당한 뒤라, 수면 중이나 깨어난 뒤 갑작스레 흥분하여 능력을 쓸 수도 있어 진정제를 주기적으로 투여했다는 설명이었다.
하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능력을 잘못 써 본 적이 없긴 했지만, 허락되지 않은 문을 지나던 문지기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는 들은 적이 있었다.
정부에 등록된 데이터상 텔레포터들도 비슷한 부작용을 앓곤 했다. 그들은 문에 잘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일부 놓고 올 때가 있었다.
간호사가 혈압을 재는 사이 하윤은 자신의 다리가 침대에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짝 묶여 있지는 않았다. 침대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만큼의 여유가 있었으되, 내려가는 것은 불가할 만큼의 길이의 줄이 달려 있었다.
이동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우선 달아나고자 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상태에서 쓰는 이동 능력은 무엇보다 환자 본인에게 위험했다. 병실을 태우거나 얼리진 않지만 환자가 갑자기 동강 나거나, 병상에서 사라져 도로 위로 떨어지는 일도 있었으니까.
하윤은 자신의 발목에 감긴 줄을 보고 놀랐지만 이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럴 만한 조치였기 때문이었다.
‘진정제 때문인가, 졸리고 침착한데.’
간호사는 몇 가지를 더 점검하고 난 뒤 병실을 떠났다. 하윤은 유달리 두꺼운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일반 병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이곳은 에스퍼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원일 것이다.
하지만 일대가 난장이 되었는데 부상당한 에스퍼의 수가 적을 리 없었다. 특히나 저 같은 비전투계열은 다른 비전투계열과 같은 곳을 써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하윤은 혼자 있었다.
안 좋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하윤은 그것을 묻는 대신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을 고쳐 주는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봐도 너 못 자.”
“…….”
“의사 선생님 올 때까지 기다려. 위험 병동 먼저 보고 온다고 좀 늦는다고 했었어. 그래도 점심 전에는 올 거야.”
“엄마.”
“…….”
하윤의 모친 이인영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울컥 솟구친 감정을 삭이는 듯한 행동에 하윤은 잠시 기다렸다. 그녀가 스스로 감정을 갈무리하고 저를 돌아보았을 때 하윤은 마저 입을 열었다.
“엄마, 괜찮아? 아빠랑, 쌍둥이들 다.”
“……우린 괜찮아. 새벽에 울린 경보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해서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경비 아저씨가 다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방호벽을 빨리 내린 거야. 당시에는 빨리 다시 열라고 다 죽고 싶냐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게 맞았던 거지.”
아파트 단지 내에 대피소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이미 나가려던 찰나에 수용인원이 다 차 버렸다. 구식 아파트라 세대수 대비 대피소 허용 인원수가 넉넉하지 않았다. 매년 보완하자는 말이 나왔지만, 서울 도심 한복판이라 비교적 괴수로부터 안전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매년 무산되었다. 대피소를 증설하기 위해선 지하주차장 부지의 일부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공사 중에는 지하주차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반발이 컸다.
어쨌든 하윤의 가족들은 대피하지 못했고, 아파트의 방호벽만을 믿으며 집 안의 모든 커튼을 쳤다. 혹 그들을 발견한 비행형 괴수가 창문 등으로 달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정신계 괴수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맨날 아파트 구리다고, 구닥다리라고 만날 이사 가자 이사 가자 해도 우리 아파트가 최고야. 사방에 그 난리가 났는데 우리 아파트만 멀쩡해.”
하윤은 모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윤의 가족들이 사는 아파트는 서이주와 하윤이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곳이었다. 문과 문이 오가지 않는 곳, 보호 장치를 설치하기 좋은 곳 등.
하윤은 문득 떠오른 서이주의 생각에 마른침을 꼴깍였다. 가시를 삼킨 듯이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윤은 이불을 살짝 그러쥐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 무경이는?”
묻는 순간에 울음이 왈칵 솟았다. 백진하와 서이주가 어떻게 된 줄 알면서 자신의 가족을 먼저 챙겼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윤이 어렵사리 울음을 참고 있는 동안에도 모친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다른데 정신이 팔리길 바랐기 때문이리라.
“많이 다쳤어?”
그래, 그렇게 힘을 쓰고서 멀쩡할 리 없었다. 당연했다. 이쯤은 예상하였다.
그러나 무경은 뛰어난 에스퍼였다.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살려 놓았을 것이다.
“왜 대답을 안 해, 엄마.”
“무경이는.”
“……?”
“무경이는 아직 안 일어났어. 상태가 심각해서 그런지 아직 눈을 못 떴어. 서이주씨랑 백진하씨 행방이 확인 안 되어서 엄마가 대신 확인하고 왔거든.”
“엄마, 무경이 잘못된 거 아니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눈을 못 떴어. 얘는 전투계라 좀 먼 병동에 가 있는데, 면회가 어려워.”
무경이 바로 눈을 뜬다고 해도 면회가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너 밥 잘 먹고 회복 잘하면 데려가 줄 거야. 아니면 안 돼.”
“엄마, 무경이 많이 다친 거 아니지? 나 답답해. 제대로 좀 말해 줘.”
“말끝마다 무경이, 무경이! 너 먼저 챙겨! 너 나흘 만에 눈 뜬 거야! 엄마 아빠 교대로 돌아가면서 너 눈 뜨는 거 기다렸어!”
하윤의 모친은 하윤의 환자복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런 다음 네 꼴을 좀 보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하윤은 고개를 숙여 드러난 팔을 보았다. 실핏줄이 다 터져 있었다. 이미 나흘이 지난 뒤인데 이 정도라면 아마 병원에 실려 왔을 땐 상태가 더 심각했으리라.
“그래서 그래. 난 엄마 아빠가 기다려 줬는데, 무경이는 그게 아니라서 그래.”
“설마.”
하윤은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백진하도, 서이주도 죽었다. 이제 무경에게 남은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었다. 물론 그에게 친인척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진하나 서이주만큼 가까운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은가.
“엄마, 미안한데 무경이 옆에 내가 있어 줘야 해.”
모친은 울컥한 양 하윤에게 달려들어 때리듯 손을 휘둘렀으나, 닿기 전에 아래로 뚝 떨어졌다. 하윤은 모친을 끌어안았다.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저 몸을 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선생님이랑 약속했어.”
“……넌 내 아들이야.”
“맞아, 엄마 아들이야.”
“뚫린 입이라고 말만 잘하지. 얌전히 밥 먹고 잘 낫겠다고 하기만 하면 누가 뭐라고 할까 봐. 또 무경이한테 간다고 엄마 속을 뒤집어 놔야겠어? 이 꼴을 해 가지고!”
“미안해, 엄마.”
서이주와 모친 이인영의 사이가 원만한 것과 달리 무경과 이인영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서로가 하윤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고 겨우 눈을 떴는데, 그러자마자 무경을 찾으니 감정이 격앙되었으리라. 하윤은 문득 자신이 진정제를 맞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었다면 우느라 바빠 어떤 것도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윤은 모친을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약 때문에 슬프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나온 탓이었다. 결국, 약간의 탈수 증세를 보여 수액을 처방받았다. 의사는 수액을 다 맞을 무렵에야 하윤의 병실에 들어섰다.
보호 장비와 헌터를 대동하고 나타난 그는 하윤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고는 진단을 내렸다. 기다린 시간에 대비해 매우 짧은 시간이 지나고 의사는 곧장 병실을 나갔다. 그러나 그와 대동하고 있던 헌터들 몇이 병실을 나서지 않았다.
그들 중 하나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았다. 정부 소속 요원임을 증명하는 증명서들이 한가득 들어가 있었다. 소속도 다양했다. 정보원도 있었고 연구소 쪽도 있었다. 하윤이 익숙한 센터도 있었고, 입원해 있는 병원 소속도 있었다.
그리고 맨 뒷장에는 익숙한 글씨로 쓰인 업무지시서가 있었다.
병실에 찾아온 헌터, 그러니까 여러 분야의 요원들은 하윤의 모친을 내보낸 뒤 하윤에게 그날 집에 있었던 일을 물었다. 하윤이 미성년자에 비전투계라는 것을 의식하여 뭔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여 간단하게만 몇 가지만 물어보려고 했었고, 파일째 갖고 온 소속 증명서들은 한참 예민할 보호자를 위한 것이었다.
하윤은 말을 아꼈다. 실제로 아는 게 얼마 없기도 했고, 죽기 전 서이주가 남겼던 말이 걸리기도 해서였다.
하윤은 그날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집에 찾아왔던 사람이 있었다는 점, 그 사람이 처음엔 여자아이였다는 것. 그리고 이내 남자 손이 인터폰에 보였다는 것까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선생님은 저희를 대피시키셨어요. 무경이와 전 곧장 비상 탈출로를 이용해 탈출했고요. 하지만 지하 방공호로 대피하려던 중에 위에서 폭발이 일었어요. 방공호에 있다간 고립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밖으로 다시 나갔고요.”
“굉장히 위험한 판단인데? 위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몰랐잖아. 그리고 넌…….”
남자는 미리 조사해 뒀던지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아마 남자는 하윤이 텔레포터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텔레포터는 일반적인 검사로는 능력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에스퍼였다. 그래서 이동 거리와 함께 이동 가능한 물체의 무게와 부피 등으로 대략적으로 나눴다.
하윤은 텔레포터가 아니라 문지기였으므로 손수 들고 이동할 수 있는 건 5~70킬로그램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무경 하나쯤은 무게가 더 나간다고 해도 이동시킬 수 있지 않았겠냐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물론 하윤은 무경만 아니라면 몇 사람이고 문을 통해 이동시킬 수 있었다.
오로지 무경 하나만을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가 자신의 조각이라는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조각에 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백진하와 서이주가 있을 당시에도 숨기고 살았다.
물론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실제 말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컸다.
“당황해서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누가? 무경이가?”
“예. 위에 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요원들을 저희끼리 쑥덕였다. 백무경의 능력이 암만 뛰어나더라도 그가 어린 학생이라는 점, 판단이 미숙하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언뜻 들렸다. 하윤은 말없이 이불만 그러쥐었다.
몇 가지 더 질문한 다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막 병실을 나서려 할 때, 하윤은 무경의 소식을 물었다. 그들은 무경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점, 매우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전투계이고 정신계 괴수의 힘에 노출됐던 점, 그리고 하윤이 아직 환자인 것과 무경과 실제 가족이 아님을 들어 면회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모친이 밥 잘 먹고 회복에 힘쓰라는 게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말한 대로 무경이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직 눈을 뜨고 있지 않다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하는 수 없이 하윤은 회복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윤은 숨을 들이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하게 [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 사는 집처럼 문이 겹치지 않는 곳인가 싶다가도,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윤은 발목의 끈을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였으나, 병실이 크지 않아 어렵지 않게 창문에 다다랐다.
하윤은 밖을 부지런히 살폈다.
[문]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