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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20화 (20/162)

20화

미궁이 열렸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으나, 바깥에 있던 모든 존재가 미궁을 인식했다. 밖으로 나와 있던 헌터들은 일제히 탄식했다. 짧은 탄식과 함께 헌터뿐만 아니라, 바깥에 나와 있던 생존자 모두의 시선이 미궁을 향했다.

미궁을 경험한 노련한 헌터들이 봐선 안 된다고 소리쳤으나, 소리치는 장본인조차 무력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으려야 감을 수 없었다.

괴수에게 사로잡혀 죽어 가던 헌터 하나가 고개를 들고 미궁을 본 순간, 그의 흰자위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하더니 피눈물과 피땀을 흘렸다.

열린 미궁 안에선 시커먼 것이 쏟아졌다. 연기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덩어리도 아닌 것이 열린 미궁 사이로 몸을 내밀었다. 괴수의 몸 주변엔 오로라 같은 장막이 일렁였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잠재되어 있던 공포, 혹은 익숙한 공포, 죽음의 공포, 삶의 공포.

생명체마다 각기 다른 공포를 떠올렸다.

공포로부터 달아나는 사람, 맞서려는 사람,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너무나 무서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산지옥에 빠진 것처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미궁에서 막 나온 괴수를 보면 안 된다는 외침은 너무나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괴수가 아직 문을 다 빠져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괴수의 몸뚱어리가 미궁을 꽉 채워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랐으나, 그의 신체는 아직 지상에 닿지 않았다. 기회라면 기회라고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생명체가 없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돌풍과 함께 아스팔트 도로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전봇대와 전깃줄이 기괴한 악보를 만들고, 차와 건물이 떠오르다 못해 일그러지고 부서지길 반복했다. 거대한 에너지 폭풍 속엔 고개를 숙인 한 소년이 있었다.

미궁을 빠져나오던 괴수는 소년을 응시했다.

위험을 감지한 것일까, 아니면 거슬렸던 것일까. 괴수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괴수를 감싸고 있던 오로라가 더 강한 빛을 내뿜었다. 일순 지상으로 세차게 내리꽂히던 비가 멎고,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어떠하다고 정의할 수 없는 희미한 소리였으나, 떨쳐 내지 못할 만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폭풍 한가운데 있던 소년에게도 소리가 닿았을까.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울음을 참듯 목을 꼴깍였다.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리고, 가슴이 들썩였다.

괴수는 소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를 집어삼키려는 듯, 명확하지 않은 육신으로 소년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폭풍에 손을 댔다. 괴수의 손의 일부는 폭풍에 뜯겨 나가고, 일부는 폭풍에 뒤섞였다. 뒤섞인 괴수의 일부는 그저 돌기만 하다가, 이내 소년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괴수는 소년의 정신과 육신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여린 살갗에 자신의 육신을 욱여넣으며 이계의 말을 속삭였다.

[네가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괴수와 눈을 마주한 소년은 입을 벙긋거렸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백무경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들끓는 힘을 제어하지 않고 본능대로 풀어 놓는 것. 그러나 거대한 강을 틀어막은 댐의 수문을 연 것처럼, 힘은 세차게 몸 밖으로 쏟아졌으나 본래 힘을 다 쏟아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힘을 조금씩 풀어 놓는 수문을 공격하며 밖으로 나가려 애썼다. 무경은 이성을 잃어 가는 중에도 미친 듯이 쏟아지는 제 힘에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지를 잃고 두려움도 잊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해치려는 김득철의 일행을 상대했다. 노련한 에스퍼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조직적으로 무경을 상대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무경이 힘으로 몰아붙이자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십수어 명이 열 명이 되고, 열에서 또 일곱으로 줄었다. 다른 동료들이 죽어 나가자 나머지는 무경과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공격을 이어 나갔다. 달아날 법도 했으나, 그러진 않았다. 다만 달아나지 않는다면 생포는 둘째 치고 저희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공격을 해 댔다.

무경은 이것이 너무나 거슬렸다. 본능적으로 저를 건드리는 벌레들을 단번에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큰 폭발이 일 때, 공격을 맞은 것처럼 일부러 틈을 보였다. 노련한 에스퍼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만큼 그들은 무경이 보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셋이 동시에 무경에게 달려들어 발밑을 흩트리고 나머지 둘이 공중에서 달려들었다. 만약 무경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같은 편을 공격하게 될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암수가 무경을 찌르진 못했다.

그들의 무기는 그들 스스로를 찔렀다. 무경은 순식간에 둘을 해치운 다음, 저를 향해 달려드는 다섯 놈들의 힘에 짓눌렸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무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 그를 향해 다가오는 김득철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경은 잠시 정신을 차렸다.

‘저 새끼를 죽여야 해.’

폭주한 상태와 정신을 차린 상태가 별반 구분되지 않더라도, 무경은 목표를 세웠다. 김득철은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여야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김득철의 몸엔 그를 보호하는 장치들이 몇 개 있었다. 손을 자르고 갈비뼈를 부쉈지만 정작 머리나 심장을 터트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 상처마저 없었다. 누가 치료해 줬을까. 무경은 기민하게 주변을 탐지했다.

혹 해라도 입을까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 놈이 보였다.

“…….”

그사이 성큼성큼 다가온 김득철이 무경의 머리를 걷어찼다. 통증과 함께 저도 모르게 초능력이 쏘아져 나갔다. 그게 자신을 짓누르던 사람 중 하나의 머리를 떼어 내고 말았지만,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깜짝 놀라서 그만.’

머릿속이 새빨갛게 느껴졌다. 이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졸음이 몰아치듯 생각과 시야가 드문드문 끊어졌다. 그러나 아직 아니었다. 조금 더 참아야 했다.

김득철은 무경의 머리를 들며 그를 비웃었다. 네가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보자. 그 말과 함께 두 손으로 무경의 머리를 붙잡았다.

낯선 기운과 함께 머릿속이 헤집어지기 시작했다. 무경은 제게 밀려드는 기운을 거부했다. 그러나 계속 밀어내는 중에도 자꾸만 온갖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 바로 어제의 기억, 훈련할 때의 기억, 학교에서의 기억, 식탁에서의 기억.

부친 백진하는 달걀을 요리하고, 모친 서이주는 잡곡밥을 그득 펐다. 하윤은 쌀을 찾아 밥을 뒤적이고, 저는 하윤이 먹기 싫어하는 잡곡을 몰래 먹어 주었다.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순간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표정을 한껏 일그러트리다가 저를 공격하려던 상대의 목을 베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무경은 곧장 김득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목을 막 쥐려는 순간 다른 누군가가 김득철의 뒷덜미를 잡아채 뒤로 던졌다. 그 모습을 보며 무경은 왈칵 피를 게워 냈다.

무경은 자신이 쏟아낸 핏물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잡혀야 할 김득철은 없고 텅텅 빈 손이었다.

“씨발.”

일부러 당해 준 보람이 없었다. 무경은 욕설을 뱉으며 몸을 숙였다. 메스꺼운 속을 게워 냈듯, 요동치는 힘을 감내할 수 없었다. 이번엔 정말 어찌할 도리 없이 힘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이 부풀고 핏줄이 불거졌다.

무경으로부터 쏟아진 힘이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득철이 갈기갈기 찢기긴 했으나 무경의 몸도 제힘에 갈기갈기 찢길 판이었다.

그때 미궁이 열렸다. 무경은 미궁의 존재를 인식했다.

아주 위험한 게 나오고 있었다. 무경은 하윤을 찾았다.

‘하윤이가 어디 있지. 하윤이가. 하윤이를 찾아서 같이 가야.’

같이. 김하윤. 같이.

무경은 제힘에 이리저리 이끌려가면서도 계속해서 하윤을 찾았다. 괴수에게 당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중에 혹 하윤이 있을까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모두 하윤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을 깜빡한 순간 그들이 전부 하윤으로 보였다.

하윤의 처참한 시체를 보며 무경은 나약하게 헐떡였다. 하윤이 저렇게 되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밀려드는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소리 죽여 울고 있을 때 고개가 자꾸만 하늘로 당겨졌다. 한참 거부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무경은 괴수와 마주했다.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괴수가 탐욕스레 물었다.

[네가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대답해선 안 된다. 들킨다면 분명 저 탐욕스러운 것이 빼앗아 갈 것이다.

‘감춰야 해.’

[무엇을?]

하윤이를. 윤이를. 하.를. 이름이 뚝뚝 끊어졌다. 무경은 문득 하윤이 사라져서 엉엉 울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비어 있는 침대를 떠올렸다. 이어 팔이 잡아 당겨지며 비명을 지르던 하윤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경은 하윤의 비명에 벼락이라도 맞은 양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하윤과 눈을 마주했다.

‘내 조각.’

문득 무경은 하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이름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손상된 파일처럼, 하윤의 존재가 조각났다.

무경은 당황했다. 폭주하는 중에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숨이 턱 막혔다. 왜 기억이 나지 않는가. 무경은 계속해서 하윤을 떠올리려 애썼다. 조각난 하윤이 그를 향해 웃고는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탐욕스러운 괴수가 다시 물었다.

무경은 무력하게 입을 벙긋거렸다.

□□이 나를 떠나는 것.

무경이 대답하자, 무경이 만든 폭풍 속에 스며든 괴수의 조각은 무경을 집어삼킬 듯 크게 덩치를 부풀렸다.

‘빼앗긴다.’

그때 짤랑짤랑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에 쏟아지던 불길함과 공포가 가로막히더니, 미궁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괴수의 몸이 짓눌리기 시작했다.

짤랑짤랑짜랑!

짤랑 거리는 소리가 더 거세어지다 못해 깨지는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짜각짜각짜각짜각! 알알이 부서지는 소리가 무경의 신경을 거슬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큰 것이 쪼개어지던 소리가 들리더니 믿을 수 없게도 미궁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괴수는 허겁지겁 문 속으로 자신의 몸을 욱여넣었다. 그러나 미처 회수하지 못한 신체 일부가 문에 걸렸다. 문은 그대로 닫히고, 괴수는 비명과 함께 몸부림쳤다.

무경은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눈앞이 희어져 보이는 게 없었다. 지나치게 쏟아진 자신의 힘이 어디서 자극을 받았는지 폭발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무경을 향해 달려왔다.

“백무경!”

소년은 무경을 향해 힘껏 달렸다. 그러나 절박해 보이는 것과 달리 속도가 형편없었다. 원래 그랬던지, 아니면 힘을 많이 써서 그랬던지. 달리다 넘어지고 주저앉길 반복했다. 그러나 다시금 일어나서 계속해서 무경을 향해 달렸다.

마침내 무경의 몸에서 터져 나온 힘이 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무경을 에워쌌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폭발 속에서도 계속해서 무경을 향해 나아갔다. 무경의 힘은 그에게 아무런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다. 마침내 무경에게 다다른 소년은 무경을 끌어안았다.

마개 없이 물을 쏟아내던 병을 일으키고 다시 입구를 틀어막았다.

거대한 폭발이 일었으나, 폭발은 일정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졌다. 충격파를 쏟아내지도 않았다. 폭발로 인한 빛이 잦아든 뒤 다시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 시간여 뒤, 나라에서 파견된 에스퍼들과 군인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잔여 괴수들을 처리하고 생존자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유례없이 거대한 규모의 미궁이 서울 한복판에서 열렸으나, 어떠한 조치 없이 스스로 문이 닫혔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구조팀은 폭발의 흔적으로 깊이 팬 땅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두 소년을 발견했다. 몸에 차고 있던 인식표로 기관에 등록된 미성년 에스퍼라는 것을 확인하자 최우선으로 구출되었다.

일대는 빠르게 정리되었으나, 미궁과 관련된 어느 전문단체도 이번 현상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했다. 그저 살아남은 헌터들과 생존자들을 치료한 뒤,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폭발 속에서 살아남은 두 소년이 사건과 관련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흘 뒤, 두 소년 중 하나인 김하윤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사건에 휘말린 뒤 능력을 잃었다.

또 다른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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