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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9화 (19/162)

19화

거대한 괴수가 공중에서 떨어지다가, 하윤의 능력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배 속에 뭘 넣고 있었는지 괴수는 산산조각 나며 엄청난 양의 오폐물을 쏟아냈다. 무경은 하윤을 있는 힘껏 불렀다.

무경은 하윤과 서이주가 다룬다는 문을 알아보진 못했으나, 늘 그것들을 불쾌하게 여기고 싫어했으므로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윤은 오폐물이 쏟아지기 전에 문을 열었고, 문은 어김없이 하윤을 삼켰다.

무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윤이 문을 다룰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무경의 머리 위에도 오폐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미 만든 방어벽에 막혀 무경에게 닿지 못했다.

“…….”

무경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윤이 사라지자 익숙한 불안과 초조가 찾아왔다. 안정이 깨어지고 그 사이로 숨겨 두었던 힘이 흘러나왔다.

방어벽으로 시야가 가려졌으나 느낄 수 있었다. 무경은 습관적으로 하윤의 기운을 찾았으나 역시나 느껴지는 게 없었다. 대신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이른 시간이라 미처 대피하지 못해 아파트나 빌라 채로 갇혀 있는 사람들의 기운, 이상을 감지하고 튀어나온 이 부근에 사는 헌터들.

무경은 그중에서 제 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기척에 집중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무경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경계했다. 그들이 제 편일지 아니면 김득철의 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내 편.’

무경은 문득 자신의 편이라는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래, 사람들 편. 여기 사는 사람들 편이지.’

어찌 됐든 김득철을 적으로 둔 존재들이면 좋겠다. 적의 적은 같은 편이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열둘, 아니 그것보다 더 많아.’

만약 그들이 김득철의 편이라면 자신은 그들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이대로 도망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어머니.’

무경은 김득철이 부친의 흉내를 내던 것을 떠올렸다. 부친은 모친이 문을 열 때까지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문지기들에게 문 열 시간을 주기만 한다면 그들을 잡긴 매우 어렵다. 아마도 모친은 무사히 문밖으로 탈출하여 이 도시를 벗어났을 것이다.

‘하윤이도.’

더군다나 하윤은 문을 여는 데 따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사히 탈출했을 것이다. 애당초 저만 아니었더라면 하윤은 지하로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고생을 무릅쓰고 위로 올라온 것은 저 때문이었다.

하윤의 조각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하윤이 연 문은 자신이 통과하지 못했다.

‘그냥 그대로 도망쳐서 숨어 있어 주면 좋을 텐데.’

모친은 저희가 지하에서 올라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 미궁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으니 저희가 지하에서 달아나기 마땅찮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돌아오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반대로 저희를 생각해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확실히 저들은 저희보다 모친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저희는 그저 모친을 손에 넣으므로 얻는 부록 정도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김하윤은 어떨까.’

돌아올까, 아닐까. 저는 하윤이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것일까.

이성으로는 제가 죽든 말든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맞겠지만, 마음으로는 함께 있어 줬으면 했다. 죽는다면 같이 죽었으면 좋겠고, 산다면 저도 살고 싶었다. 최악은 자신이 죽고 하윤이 사는 것이었다. 하윤이 죽고 저만 산다면 그는 하윤이 살라고 하든 말든 죽을 작정이었다. 그는 큰 조각인 하윤을 잃고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윤에게 자신은 너무나 작은 조각이었다. 자신이 없다고 한들, 몇 년만 지나면 김하윤은 분명 마음의 짐을 모두 털어 버리고 새 삶을 살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도 낳고, 언젠가 한두 장 남은 옛날 사진으로 ‘옛날에 내게도 형제 같은 친구가 있었는데…….’ 하고 잠시 추억하다 말 것이다.

그 꼴은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하윤이 위험에 빠진다면 제 목숨을 던져 버릴 것이다. 그것도 빤했다.

‘김하윤이 다치는 건 싫으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무경은 잠시 생각했다.

‘아무래도 김하윤이 오기 전에 다 해치우는 게 낫겠다.’

그러기 쉽지 않겠지만, 별수가 없었다.

무경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피가 묻었었는지 쇠 맛이 났다. 무경은 불안을 상기했다. 이미 분노로 벌겋던 머릿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거세게 쿵쾅거렸다. 심장이 맥박 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거대한 망치로 두들기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들끓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경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있었으나,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재차 하윤이 달아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이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무경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몸에 힘을 풀었다. 마지막으로 내쉰 한숨과 동시에 그를 보호하고 있던 방벽이 산산이 조각나 빠르게 회전하며 공간을 넓혀 갔다.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이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오폐물이 멀리 떨쳐지자, 오폐물에 쓸려 사라졌던 김득철을 찾는 것도 금방이었다. 김득철은 켁켁거리며 괴수의 사체를 뱉어 내다가 무경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이번에도 손뼉을 치다가 손이 잘려 나갔다.

“아, 아아아악!”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잘려 피를 뿜는 자신의 손목을 보며 몸을 들썩였다. 이미 괴수의 피로 범벅되어 자기 피를 뒤집어쓴들 표가 나지 않았다.

“이 애송이가아아!”

김득철은 무경을 향해 소리쳤으나, 이내 점점 소리가 작아졌다. 그의 몸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돌연 그의 갈비뼈가 살갗을 뚫고 나왔다. 김득철의 얼굴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그는 손이 사라진 손목으로 자신의 목을 긁었다.

그때 다른 곳에서 나타난 여자가 김득철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던지며 무경에게 총을 쐈다. 일반적인 총이 아니었던지 총알은 무경의 방벽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무경의 살을 뚫지 못한 채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섰다.

“하. 애송이가 제법인데.”

코앞에서 멈춘 총알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었다. 무경이 무심하게 여자를 바라본 순간, 총알은 날아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여자는 이를 예상했던지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계속해서 총을 쏘았다. 무경이 번번이 막자 악을 쓰며 욕했다.

무경이 여자에게 신경이 쏠린 사이,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 사내가 방벽의 가장 높은 곳으로 낙하했다. 사람이 떨어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굉음과 함께, 주변 땅이 진동했다.

그사이 무사히 김득철을 받은 다른 키 작은 남자가 김득철의 양 손목에 밴드를 둘렀다. 밴드는 즉시 조여들며 손목을 지혈했다.

김득철을 꺽꺽거리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키 작은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무경을 공격해 김득철을 위협하는 초능력을 무력화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아니,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다른 동료가 무경과 김득철 간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으나, 허용 범위가 얼마큼인지 아직도 김득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가오 빠지게.”

여자는 탄창을 간 뒤, 허리에 차고 있던 무전을 통해 지원을 요청했다.

곧이어 십수어 명이 나타났다. 애새끼 하나 못 잡고 저희를 부르냐는 조롱이 이어졌으나 여자는 무경을 향해 턱짓했다.

“어차피 오고 있었으면서.”

동료의 지원을 기다리는 사이 주변은 이미 쑥대밭이 되었다. 괴수가 쏟아지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 부근은 괴수가 얼씬도 하지 못했다. 동료 다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백무경도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호랑이 새낀 줄 알았더니, 새끼가 괴물이었네.”

그러나 틈이 틈 같지 않아 보이는 건 왜일까. 여자, 이경선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씨이발 새끼! 그 새끼 죽여 버려!”

“아, 깜짝이야!”

백무경의 힘에서 벗어난 김득철이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쌍욕을 뱉었다. 재생치료를 받아 그의 손목에는 아기 손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의 늙은 외양 때문에 손이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맨날 품에 끼고 도는 인형 손을 빌려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희들은 대체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일을 다 망쳐 버릴 셈이야!”

“아휴 참, 때맞춰서 와 준 사람한테 말 좀 예쁘게 해요.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서이주는!”

“서이주는 김태성이 쫓으러 갔는데, 놓친 것 같던데.”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이경선은 분노에 차 파들거리는 김득철을 몰래 비웃었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볼만했다. 그와 뜻을 함께하고 있지만, 그에게 맺힌 것도 많았다.

“걱정 마. 말 들어 보니까 얼마 못 가서 죽을 것 같던데.”

“그러니까 찾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늦으면 몸에 있던 곡옥이 없어진다니까!”

“어휴, 귀 따가워.”

이경선이 귀를 막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키 작은 남자가 자신의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김태선이 놓친 건 거리가 너무 벌어졌기 때문이야. 하지만 멀어지기 전에 추적기를 심었으니, 부근에 있는 대원이 추적을 대신할 거야. 늦기 전에 시체 수거할 테니 걱정 마요. 그것보다 영감, 열쇠는 어딨어?”

“어, 그러고 보니 열쇠가 없네. 완성할 거라면서 가져갔잖아. 인형한테 끼워 놨어? 인형 어딨어?”

씩씩거리던 김득철은 입을 다물었다. 이경선과 키 작은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곤 동시에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곧 미궁이 열릴 것만 같았다.

“어쨌든 저 새끼만 죽이면 돼. 숨이 조금 붙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지금 열쇠를 다룰 수 있는 문지기는 서이주밖에 없어. 새끼 잡아서 협박하면 서이주도 나서는 수밖에 없겠지.”

더군다나 지금 자기밖에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마냥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김득철의 의견이었다. 이경선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김득철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 작은 남자 박경조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뭐, 대애단한 헌터들이 나와서 미궁을 공략하겠죠. 서울인데 설마 그냥 두고 보려고.”

고서에 남은 기록으로 미궁을 불러들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으니 후회가 남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 어떻게 하겠는가. 이경선은 김득철을 위로하듯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사이 동료들이 백무경을 제압하는 데 성공 했다. 모양이 빠지긴 해도 다섯이서 온 힘을 다해 그를 짓눌렀다. 제각각의 힘이 뒤엉킨 탓에 공기가 따끔거렸다.

그러든 말든 김득철은 백무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화가 단단히 나서 백무경에게 다가가 머리를 힘껏 걷어찼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백무경의 얼굴이 돌아갔다.

동시에 무경을 짓누르고 있던 대원 중 하나의 머리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이 새끼!”

김득철은 백무경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어느새 갓난쟁이 같던 손이 어린애 손만 하게 자라났다. 백무경은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김득철을 향해 웃었다.

김득철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웃었다. 화가 났는지, 웃음이 나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자.”

김득철은 양손으로 백무경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안 이경선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김득철의 어린 손이 빠른 속도로 노화되기 시작했다. 희고 곱던 손이 주름지고 검버섯이 폈다. 김득철은 눈을 까뒤집고 침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손아귀에 잡힌 백무경의 얼굴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짓누르고 있던 넷도 신음하기 시작했다. 더는 짓누를 수 없다고 판단한 대원 하나가 백무경의 목덜미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백무경의 목을 향해 휘두른 칼날은 칼을 휘두른 대원의 목을 베었다.

“피해!”

박경조의 경고와 동시에 이경선은 또다시 김득철의 뒷덜미를 잡아채 뒤로 던졌다. 그리고 힘껏 내달렸다. 거대한 힘의 폭풍이 백무경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폭풍에 휘말린 모든 것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달아나지 못한 이경선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비명과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을 때, 마침내 미궁의 문이 열렸다.

스스로 열린 건지, 아니면 서이주가 돌아와 열었던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경선의 눈앞은 까맣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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