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선생님……! 제발, 제발 좀 일어나 봐요.”
하윤은 입술을 발발 떨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이주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요! 장난치지 마세요.”
아, 선생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뉴스니 뭐니 볼 생각 말고 주변부터 살폈어야 했다. 그래서 서이주를 좀 더 빨리 찾았어야 했다. 자신이 연 문을 무경은 통과하지 못하지만, 서이주는 통과할 수 있었다.
‘선생님을 데리고 병원을 갔어야 했는데.’
발견 즉시 인근 지방 병원에 데려갔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등신 새끼. 돌대가리 새끼.”
생각을 좀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좋았을걸.
이곳에 찾아온 것은 우연에 불과했으나, 우연이 아니게 느껴지는 상황 때문에 하윤은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하윤은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몸을 들썩였다. 마음 같아선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그러나 서이주는 숨어 있었다. 그 말인즉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하윤은 입을 다문 채 흐느꼈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먼저 나왔다. 소리 죽인 채 가슴만 들썩이던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순간, 하윤의 눈동자 테두리가 금빛이 서렸다.
그러자 하윤과 서이주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문이 다가와 그들을 삼켰다. 공간과 공간이 이어졌다가 멀어지고, 또다시 다른 공간을 열어 마침내 익숙한 공간으로 인도했다.
하윤의 상태를 알았던지 공간을 이루고 있던 문들이 잠잠했다. 하윤은 시뻘건 공간에서 한 번 더 울음을 삼켰다. 좁은 공간에서 옹송거리고 있던 서이주를 너른 공간에 데려다 놓자, 조금 전엔 보지 못했던 상처가 보였다.
왼쪽 발목이 없었다. 핏물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던지 노란 마트 봉투가 묶여 있었다. 하윤은 서이주를 향해 엎드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피처럼 벌겋던 공간은 어느새 안정되어 황금색으로 변했으나, 하윤의 머릿속은 여전히 붉기만 했다. 하윤은 내내 참고 있던 소리를 터트렸다.
“흐으……윽, 서, 선생니임.”
엉엉 울고 있을 때였다. 서이주에게 받았던 단도가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쨍그랑, 쨍쨍쨍.
시끄럽게 소리 낸 것도 모자라 빙글빙글 돌다가 날 끝으로 하윤을 가리켰다. 하윤은 시뻘게진 눈으로 단도를 노려보았다. 꼭 절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고, 얼른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윤은 서이주와 단도를 번갈아 보다가 단도를 주워 들었다. 슬픔에 겨워서 단도를 줍는 것마저 서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발 그만 울고 생각 좀 해. 이 멍청아.’
하윤은 자신의 이마를 연거푸 세게 쳤다. 칠 때마다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떨어졌으나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에 단도에 관해 생각했다.
[열쇠를 완성하렴.]
‘열쇠.’
그녀가 말한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하자마자 답이 떠올랐다. 하윤은 자신의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의심할 게 이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팔찌가 어떻게 열쇠인지,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는지는 몰랐다. 하윤은 팔찌를 자세히 살폈다. 팔찌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곡옥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멀리서 볼 땐 그냥 장식이 많이 달린 줄 알았는데, 전부 곡옥이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으며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옥 장식 중간중간 금장식에 들어가 있었는데, 회로 같은 모양의 섬세한 세공이 되어 있었다. 다만 이것들은 크기가 일정했다.
‘부품이 모자라 열쇠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문태강을 납치했으나 실패했고, 선생님을 잡으러 왔어.’
열쇠의 부품이 되는 건 문지기들이다. 하윤은 크기가 다른 곡옥들을 매만졌다. 찍어 낸 듯 반듯한 금장식보다는 곡옥 쪽이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사리나 담석같이.’
문득 비슷한 생각을 언젠가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윤은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단검으로 어떻게 곡옥을 만든단 말인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도 모르겠다구요.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무경이 곁에 있었다면 기민하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윤은 다시 새어 나오려는 울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서가, 단서가 어디 없을까.’
하윤은 서이주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이라곤 은색 비닐 조각밖에 없었다. 왜 이런 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지 몰랐다.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 하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막 자신의 머리를 때리려고 할 때, 서이주의 상의 틈새로 뭔가가 빛나고 있었다.
‘레이저 포인턴가.’
그래도 혹시 몰랐다. 하윤은 서이주의 상의를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자신이 지혈하느라 내내 눌렀던 곳 바로 근처였다.
‘살 속에서 빛나고 있잖아.’
서이주의 뱃속에서 초록색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단도의 사용법을 알아차린 하윤은 단도를 내동댕이쳤다.
“……!”
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윤은 하도 깨물어 넝마가 된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기를 반복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더는 서이주 몸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윤은 빛이 보이는 위치를 보며 서이주의 환부 속에 손을 밀어 넣었다. 생경한 감촉에 턱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그때, 손목 팔찌가 조금 당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록 불빛이 하윤의 손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윤은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와 손바닥에 쑥 들어온 것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손을 빼내자 피내음이 훅 피어올랐다. 하윤은 벌겋게 물든 손을 조심스레 펼쳤다.
그러자 팔찌에 있는 가장 큰 것보다 두 배는 더 될 법한 큰 곡옥이 나왔다.
‘이걸 이제 어떻게 해야 팔찌가 되는 거지?’
팔찌에 끼우기 위해선 구멍을 뚫어서 팔찌 줄을 꿰어야 했다. 하윤은 팔찌 매듭이 어딨는지 찾기 위해 팔찌 사이사이를 살폈다.
그러나 매듭이 보이지 않았다. 실도 일반실 같지 않았다. 낚싯줄도, 흰 실도, 그렇다고 고무줄도 아니었다.
“도대체.”
그러나 탄성이 있긴 했다. 하윤은 자신의 손목에 딱 맞는 팔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에 낀 채 흔들면 묵직한 곡옥들 때문에 줄이 늘어지는 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를 샅샅이 벌릴 땐 벌어졌다. 하지만 실을 잡고 늘려 보려고 하면 늘어나지 않았다.
‘빨리 해야 하는데.’
서둘러야 했다. 어서 무경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김득철이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서 쏟아진 괴수의 시체가 문제였다. 하윤은 무경이 쓸려가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봐 초조해졌다.
하윤은 한 번 더 팔찌 사이를 샅샅이 뒤지다가 조급한 마음에 팔찌를 움켜쥐었다. 성질 같아선 집어 던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환하게 빛나던 곡옥도 이제 점멸하고 있었다.
‘팔찌를 끊고 연결하면 되잖아.’
다시 못 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매듭을 찾아도 똑같았다. 보이지도 않는 매듭이었다. 끊는 것과 푸는 것의 차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윤은 잠시 팔찌를 내려놓은 다음 자신의 팔을 잡았다.
“후우우.”
백진하에게 기본 호신술을 배우며 부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웠으나, 실제로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다치려고만 하면 무경이 나서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경이 없었다.
얼른 끝내고서 무경을 찾아야 했다. 다시 숨을 고른 하윤은 스스로 팔을 맞췄다. 지금까지 보기만 했을 뿐 해 보지 않았으니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짐승같이 흐느끼듯 비명을 지르다가 세 번 만에야 팔을 맞췄다. 그러나 맞췄다고 해서 곧장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더 망설일 수 없어. 더 늦을 순 없어.’
통증을 삭이기 위해 계속 심호흡하면서 입으로 칼을 물었다. 팔찌 양쪽을 최대한 옆으로 당긴 뒤 양손으로 실을 잡았다. 고개를 움직여 칼로 실을 끊었다.
실이 툭 갈라진 순간, 실 양 끝에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흘러나와 공중에 부유했다. 글자들은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꿨다. 처음 본 문의 문패를 읽을 때와 비슷했다.
글자들은 친숙한 알파벳이나 한자로 바뀌기도 했으나 한글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번역이 깨진 것처럼 이상한 도형이 나오기도 했다. 하윤은 눈으로 글자를 쫓다가 쥐고 있던 곡옥이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손 떠는 건 줄 알았는데.’
하윤은 손을 살짝 벌렸다. 곡옥 주변에도 흰색 선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모양을 만들려는 것만 같았다. 이미 구부러져 모양을 갖춘 것도 있었다. 하윤은 그것들이 연상시키는 글자를 입에 담았다.
“서이주.”
빠르게 움직이던 글자들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하윤은 다시 서이주의 곡옥을 내려다보았다. 흰 선들이 어느새 똑바로 정렬되어 있었다. 휘갈겨 쓴 듯하지만 정갈한 글씨체. 하윤은 문득 그것이 서이주의 필체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사이 실 사이에서 나왔던 글씨들의 틈이 벌어졌다. 딱 세 글자가 그 사이에 들어가기 알맞아 보였다. 하윤은 다시 서이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곡옥의 글자가 그 사이로 들어가 공백을 메웠다.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켰다. 그 순간 허공에 떠있던 글씨들이 순식간에 끊은 양 실 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팔찌는 끊어졌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본래 모양으로 돌아갔다. 하윤은 어느새 팔찌 사이에 들어간 서이주의 곡옥을 보며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된 건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지만 일단 뭔가 했다. 하윤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팔찌를 챙겼다. 열쇠가 완성된 건지, 만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문을 여닫는 것만 남았다. 이 또한 머리가 나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나 해야 했다.
하윤은 서이주의 피로 범벅된 손을 보다가 팔등으로 눈가를 쓸었다.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을 훔친 뒤 서이주에게로 다가갔다. 서이주의 옷을 내려 준 다음, 가방에서 모포를 꺼내 덮어 주었다.
“선생님, 다 끝낸 뒤에 데리러 올게요. 꼭.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은 가만히 서서 울 때가 아니었다. 다 끝내고 돌아온 뒤에 울어도 된다. 아니, 그때에야 울어도 될 것이다. 하윤은 울음을 꾹 눌러 참으며 미궁의 이름이 붙은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