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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5화 (15/162)

15화

하윤과 무경은 내려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곧장 문을 열 수 없었다. 아까 지나올 때 폭발이 있었던 데다 벽면에선 열기가 느껴졌다. 갑작스레 문을 열게 된다면 재차 폭발이 일거나 불길이 거세질 수 있었다.

땀방울이 가슴팍과 등 뒤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윤은 무경을 향해 고갯짓했다. 무경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기운을 퍼트려 공간을 장악한 뒤 위의 상황을 대강 파악하려 했다. 별 이상이 없다면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외부와 이어지는 통로 겸 엄폐물을 쌓을 예정이었다.

기운을 퍼트리던 무경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느껴지는 것은 없으나 곧장 나가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윤은 이내 무경이 문밖에 있던 문하영과 언뜻 비쳤던 손의 주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통로 밖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하윤은 자신이 엿볼 생각으로 [문]을 찾았다. 막 열려는 순간 묵직한 금속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그르르르릉.

하윤은 통로를 막고 있는 블록의 두께를 생각했다. 그 두께를 생각하면 단순한 쇳덩이 끄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무경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매서운 눈으로 입구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하윤은 밖을 염탐하려던 문이 바깥쪽으로 밀리는 것을 발견하고 무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백무경!”

무경의 뒷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뒤로 굴렀다. 둔탁한 통증이 찾아오는 것과 동시에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졌다.

훅 바람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열기가 쏟아졌다. 치솟는 화염 사이로 키 큰 남자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삼 미터는 될 법한 키에, 얼굴은 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지만 겨우 입었는데, 드러난 상체는 듬성듬성 털이 나 있었다.

“……!”

남자는 자신의 키만 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십오 센티 콘크리트 블록을 가볍게 깼다는 게 중요했다. 남자는 뒤를 돌며 괴상한 소리를 내다가 다시 몽둥이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가 그것으로 무엇을 할진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윤은 곧장 그들 위에 있던 문을 열었다. 무경과 하윤을 향해 내리찧은 몽둥이는 문 너머로 들어갔다. 놀란 사내가 급히 몽둥이를 빼며 경계했다.

그사이 벽을 박차고 뛰어오른 무경이 사내의 뒤로 접근했다. 사내가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을 때, 무경은 이미 공중에 뛰어올랐다. 가볍게 뛰어오른 무경은 공중에서 빠르게 회전하며 발뒤축으로 사내의 경추를 내리찍었다.

가벼운 움직임과 달리 내리찍는 순간 육중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가슴이 터졌다.

단순히 몸만 쓴 게 아니라 발뒤축으로 염동력을 밀어 넣었다. 무경의 염동력은 부러트린 목등뼈를 바깥으로 잡아당겼다.

부서진 목등뼈는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회전하는 바람에 사내의 몸속을 곤죽으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터트리고 나와 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내는 자연스레 숙인 고개로 자신의 가슴팍을 보다가 거꾸러졌다.

사내가 거꾸러졌으나 무경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소리와 기척이 벽에 가로막힌 듯 느껴지지 않았다. 무경은 하윤이 위로 올라오자마자 자신이 느낀 것을 말했다. 그 말에 하윤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안 곳곳에 있던 문의 명패가 지하에서처럼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바뀌어 있었다. 일대가 미궁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꿈에서 보았고, 현실에서 느꼈던 문은 미궁의 징조였다. 더는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에 하윤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불길 때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 안에 오래 있어 봐야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또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경이 손쉽게 상대할 정도면 그의 부친 백진하 또한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백진하도 서이주도 없었다. 또한, 바깥의 소리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아래서 들었던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깥이 어떨지, 어떤 상대가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 화재만 해도 그랬다. 가스가 터졌는지, 아니면 다른 화염계 에스퍼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외의 요소가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지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괴한이 서이주뿐만 아니라 저희도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활활 타는 집 안에서 바닥을 두드려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둘 중 노리는 건 아마도 선생님과 같은 에스퍼인 나겠지.’

아래 남아 있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윤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무경이 하윤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사실 괜히 나왔다 싶어. 방공호로 갈걸.”

“……?”

“내 옛날 장래 희망이 김하윤 납치 감금이었잖아. 그걸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지금 헛소리할 때야?”

“헛소린 줄 아나 봐? 진짠데.”

하윤은 무경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때 불타던 천장 장식이 아래로 떨어졌다.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무경은 바닥재를 들어 파편을 막았다.

“가자.”

무경이 있어 불타는 집 한복판에 있어도 다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경로로 일어난 화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만있을 순 없었다. 나가는 게 맞았다. 하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사이 무경은 염동력으로 화염을 밀어내며 출구를 만들었다. 하윤은 그를 따라 나가며 문득 불타고 있는 이층 계단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곧장 고개를 돌렸다.

집 밖으로 나오자 안에서 듣지 못했던 소음들이 쏟아졌다. 집은 언뜻 봤을 때 반구형의 반투명한 무언가로 감싸져 있었다. 집에 걸려 있던 보안시스템 중 주술적 장치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바깥의 소리나 기척이 들리지 않았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

하윤은 빗물로 흐려진 눈앞을 손으로 대강 훔쳤다. 빗줄기가 굵기 때문일까. 하윤은 얻어맞는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 조금 전 무경이 했던 말이 옳았다.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었다.

바깥엔 수많은 게이트와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같은 말이긴 하나 단발성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미궁이 정리되기 전까지 닫히지 않는 것인지에 차이가 있었다. 또한, 하윤의 눈에 보이는 통로들도 문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부서지던 소리가 나더니 이 꼴이 됐네.’

문이 없어졌으니 통로를 오갈 수 있는 제한도 없어졌다. 그러나 문이 없어졌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은 통로를 보지 못했다. 통로를 못 보고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간 다른 곳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공중일 수도, 강이나 바다일 수도 있었고, 아주 운 나쁜 경우엔 괴수의 아가리 위일지도 몰랐다.

“심각해?”

“지금이라도 감금해 볼래?”

하윤의 말에 무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입은 방독면에 가려졌으나 눈은 한껏 웃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뒤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미궁의 게이트로부터 괴수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사이렌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헌터들이 뛰쳐나와 대응하고 있긴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현장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뒤에선 집이 불타고 있고, 하늘에선 괴수가 쏟아지는데 쏟아졌던 괴수들이 통로로 빠져 바닥에서 솟아날 때도 있었고, 어디서 걸렸는지 반 동강 나서 떨어지기도 했다.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하늘 한가운데 자리한 검은 문이었다. 문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한껏 부풀었다. 저 안에서 나오려는 게 무엇일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윤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끔 실습이나 서이주 부부 주도로 경험한 현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까딱하면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윤은 무경과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백무경,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 따라와.”

“…….”

무경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하윤은 다시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한껏 가슴을 부풀린 하윤은 주변을 빠르게 살핀 뒤 달리기 시작했다. 미궁의 영향권에 들지 않는 곳까지 달아나는 건 힘들지 몰라도 최대한 외곽으로 빠지려 했다.

익숙했으나 익숙하지 않은 모양으로 바뀐 도로를 내달릴 때였다.

근처 주차되어 있던 차에 빨간 점이 어렸다.

이를 본 무경이 하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돌렸다. 둘이 동시에 엎드린 순간, 불빛이 어렸던 차의 창문이 깨어졌다. 아마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달렸다면 총에 맞았을 것이다.

‘총은 또 뭐야.’

하윤과 무경은 곧장 주차된 다른 차 뒤에 숨었다. 하윤은 총이 날아오던 방향을 고려하여 근처에 있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총을 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눈 없는 괴수만 바닥을 킁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의심스러운 문 하나가 보였다.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더니 기다란 총부리가 쑤욱 앞으로 나왔다. 아까 찾았을 때 보이지 않은 것은, 다른 공간과 이어지는 문을 통해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 문의 문패를 살폈다. 미궁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 있었던지 문패를 읽을 수 있었다.

[킹☆마트 옥상]

‘그래, 영향권 밖에 있으니까 대인용 총을 쓰지.’

하윤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킹 마트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

킹 마트. 킹 마트. 하윤이 속으로 되뇌는 순간 그곳과 이어지는 최단거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창호빌딩 사 층 문, 거길 지나 일 호선 명학역, 명학역 세 번째 있는 기둥에 있는 문을 열면 주황색 킹 마트 간판이 보였다.

‘환승할 여력 없어.’

하윤은 자신이 봤던 통로들을 가로지르고자 했다. 하윤이 마음먹자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윤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무경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손가락 네 개. 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붉은색 포인터가 둘을 찾듯 주변에 어른거렸다.

미궁이 열리려는 판국에 괴수용이 아닌 대인용 화기를 들고 있는 이유가 뭘까. 하윤은 생각을 잇는 대신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동시에 무경은 염력으로 앞의 차를 당겼다. 차 간 충돌로 인한 굉음과 동시에 무경은 하윤을 데리고 네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둘을 좇듯 괴한들의 사격이 이어졌으나 총알은 그들을 꿰뚫지 못했다.

총알은 대신 킹 마트 옥상 위로 떨어졌다.

괴한들은 거친 소리를 내며 총탄을 피해 문을 넘어왔다. 들려오는 소리가 한국말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외국인들의 등장에 등 뒤로 땀이 흘렀다.

문득 무경이 서이주와 백진하의 수신호를 해석하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

저들이 김득철의 뒤를 봐주던 사람들과 한 패거리일까?

그들은 뭘 원하길래 김득철의 뒤를 봐주었을까?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김득철의 목적과 그들의 목적이 부합하거나 이득이 될 테니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서이주와 자신이 관련 있었고, 문하영의 존재로 미뤄 보건데 문태강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이주는 문태강과 또 다른 사람을 포함하여 문에 관한 연구를 했다.

‘문.’

하윤은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검은 문이 꼭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단축수업에 관해 무경과 이야기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무경은 김득철이 잡힌 뒤에야 정상수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김득철이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백무경 너는 이거 끝나고 돗자리 깔아라.”

하윤은 괴한들이 이쪽으로 넘어오자마자 달려 나간 무경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무경은 괴한들을 사살한 뒤 그들의 방호복과 무기를 탈취했다. 그는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하윤에게 넘겨주었다.

없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막 받은 참이었다.

위에서 짤랑거리던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떨어졌다.

떨어진 것의 정체를 확인한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켰다.

무경의 아버지 백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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