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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2화 (12/162)

12화

무경은 하윤이 대답을 예상했다는 양 하윤의 입술에 크게 소리 내며 입 맞췄다. 하윤이 기겁하며 고개를 떼자 그제야 물러났다. 이어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한참 반복했다.

그사이 지레 찔린 하윤은 딴청을 부리다가 이내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손가락으로 무경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그러나 오래 하지는 못하고 무경의 시선이 닿자마자 손끝을 움츠렸다.

무경은 도망가는 하윤의 손을 낚아채 손가락을 얽었다. 손가락 마디를 살짝 힘주어 죄다가 이내 위로 올리더니, 소지를 엮었다.

“나한테도 허락 안 해 줬으니까 다른 사람한테도 허락하지 마.”

“…….”

약속을 종용하며 무경은 손을 흔들었다. 소지로 얽혀 있던 하윤의 손도 달랑달랑 움직였다.

“대답해. 이건 그냥 안 넘어가.”

“알았어, 알았어. 약속할게.”

대답은 했지만, 도장을 찍을 자신은 없었다. 이게 뭐라고. 인감도장도 아니고 그냥 엄지손가락 맞대는 것에 불과한데 괜히 부담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고백이라는 것이 이렇게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오늘이라도 다른 누군가가 하윤에게 와서 고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적인 만남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잠시 무경을 잊고 그 마음을 받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윤이 다른 생각을 하며 눈을 마주하지 못하자 무경은 한숨과 함께 하윤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억지로 엄지를 눌러 지장을 찍게 했다.

“다른 사람 만나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거니까.”

“나?”

“상대. 네가 때릴 곳이 어딨다고 때리냐.”

“내가 다른 사람 만나면 그 사람 때릴 거야?”

“…….”

무경은 말없이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저 단순히 때리기만 하겠냐는 무언의 뜻이 담겨 있었다.

“너 사람 패서 감옥 간 사이 다른 사람 만나면 어떻게 해?”

“궁금하면 해 보든지.”

하윤은 무경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무경은 기가 막힌다는 양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하윤을 노려보았다.

“진짜 해 보기만 해.”

하윤이 계속 웃자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는지 무경은 자세를 고쳐 안았다. 그는 하윤의 양다리를 붙이고 무릎 뒤에 손을 넣어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발등을 깔고 앉은 다음, 당겨진 하윤의 무릎을 살살 문질렀다.

“미운 김하윤.”

말과 달리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화가 났으면서도 화도 못 내고, 좋아하면서 좋아한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하지만 하윤은 그런 그가 좋았다.

“나는 너 좋아하는데.”

“말이나 못 하면 이렇게 밉진 않겠지.”

무경은 손을 뻗어 하윤의 입술을 매만졌다. 무경의 엄지손가락과 중지가 하윤의 아랫입술을 살짝 꼬집고, 검지가 윗입술을 스칠 때. 하윤은 문득 최성한의 말이 떠올렸다.

[야, 너 백무경한테 뭘 해 줬길래 그 새끼가 빵셔틀까지 하냐? 뭐 좋은 거라도 해 줬어?]

불쑥 솟구치는 분노를 담아 하윤은 무경의 검지를 깨물었다.

“아야, 아야야.”

별로 아프지도 않을 거면서 무경은 엄살을 부렸다. 하윤은 가증스러운 무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오늘 한번 봐줬다.”

“여기 잇자국 났는데…….”

“이 정도면 살살 문 거야. 요즘 가만 놔뒀더니 자꾸 손을 대.”

“자꾸 가만있어 주니까 그러지.”

“어쭈?”

하윤이 눈을 부라리자 무경은 나직이 웃었다.

“좋아서 자꾸 건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

팔이라도 쥐어패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수업종료 종소리가 울렸다. 맥이 풀어진 하윤은 벽에 몸을 기대며 기지개를 켰다. 그 사이 무경은 커피 우유에 빨대를 꽂아 하윤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고 있어. 내가 주변 정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난 조금만 씻을게.”

무경은 대답도 듣지 않고 수련실 한쪽에 자리한 좁은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개인 수련실에 마련된 샤워실은 유독 좁았다. 덩치가 있는 무경 같은 아이들은 물 맞는 게 고작이었다.

하윤은 문득 깊은 산골짜기 작은 폭포수 아래 서 있는 무경의 모습을 상상했다. 샤워실 안의 무경이 딱 그런 꼴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물을 맞아야 하는 건 저 자신일지도 몰랐다. 뒤늦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다가 커피 우유를 마셨다. 우유곽에 맺힌 물방울이 후두두 떨어져 배와 앞섶에 얼룩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더는 무경과 단둘이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하윤은 조심스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 열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다른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오자 냉방이 되던 수련실과 달리 열기가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

하윤은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막 하윤이 아래 층계로 내려갈 때, 삼 학년으로 보이는 학생 둘이 위로 올라갔다. 저희끼리 노느라 정신없이 깔깔 웃다가, 그중 머리긴 여학생이 코를 움켜쥐었다.

“아, 탄 냄새.”

“탄 냄새?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머리 긴 여학생은 이내 목을 잡고 켁켁거렸다. 막 계단 모퉁이를 돈 하윤은 그네들이 보이지 않는 아래 층계에서 멈춰 섰다. 이상하게 탄 냄새라는 말이 귀에 박히듯 들려왔다.

하윤은 슬그머니 눈을 옆으로 돌렸다. 안경 사이로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문이 아주 가느다랗게 열렸다. 하윤은 문을 통해 머리긴 삼 학년을 바라보았다.

‘전치우’. 그녀의 이름을 소리 없이 달싹인 순간 ‘전치우의 집’이라는 문패의 문이 하윤의 앞에 나타났다. 조금 열린 틈으로 향냄새와 방울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윤은 눈을 깜빡인 다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에스퍼 연쇄 납치 살인사건의 피노키오 일당이 검거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사흘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제페토 김득철은 검거되지 않았다. 에스퍼를 동원해 추적하고 있었지만, 그의 행적은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해당 내용의 뉴스가 나올 때 백진하와 서이주는 나란히 혀를 찼다. 그들은 어떤 에스퍼가 동원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김득철의 행방을 찾지 못한다는 점을 의아해했다.

“이렇게까지 못 찾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왜요?”

“이 땅을 밟고 있는 이상 김선정의 눈을 피할 수 없으니까.”

하윤은 김선정이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서이주가 거론할 정도면 뛰어난 에스퍼인 게 틀림없었다.

“투입 시기가 문제인 걸까요? 시간상으론 이미 한국 뜨고도 남았는데.”

백진하의 물음에 서이주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 땅 뜨고 난 뒤라도 김선정이 들어갔으면 도망친 흔적이라도 잡아야지.”

“놓쳤다는 걸 공표하고 싶지 않아서 끄는 거라면요? 그런 식으로 많이 하잖아요.”

“뒤에서 쉬쉬하고 있다고 하기엔 우리 쪽에서도 들어온 정보가 없어. 우리 쪽이 그러면 당신 쪽에선 이야기 돌기 힘들지.”

백진하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고 있었다. 집안 또한 유서 깊은 무가로 가전 무술이 있었다. 백진하는 승계받은 가전 무술에 신체 능력을 접목시켜 뛰어난 무력을 갖춰, 현재는 대테러조직에 대응하기 위한 특수부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이주는 백진하의 대답을 기다리며 코끝을 매만지다 다리를 꼬고 무릎을 문질렀다. 백진하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턱 끝을 들었다. 이들을 힐끔인 하윤은 뉴스로 고개를 돌렸다. 둘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말인즉, 지금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둘이 신호를 주고받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잠자리를 뜻하는 내용 말고는 알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건 하윤도 알고 싶지 않은 비밀신호였지만, 집 안의 보안이 강화되고 특히 부부 방과 이어지는 문에 짓궂은 명패가 붙으면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득철의 도주에 의아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하윤이 방에 들어가서 의아해하자, 무경은 자연스레 하윤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며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사흘 전, 피노키오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학생들은 단축수업의 운명을 점쳤다. 납치살인사건이지만 이미 일당이 검거되었고 남은 사람은 주도자인 김득철밖에 없었다. 혹 김득철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는 도주 중이었다.

도주에 급급해 목격자가 될 일반인들을 해칠 순 있겠지만, 감시 보호의 대상인 미성년 에스퍼를 해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추가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 즈음에 모두 공포를 떨쳐 냈었다.

그들 조직이 발각된 도시만 위험할 뿐, 수도인 서울은 안전하리라.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꿀 같은 단축수업의 지속 여부였다. 김득철의 검거 때까지 계속되느냐, 아니면 당장 내일부터 끝나느냐.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된 종례 시간이 다가왔으나 담임은 단축수업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한 명이 총대를 메고 묻자, 아직 정부 지침이 내려오지 않아 공지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보안은 이전보다 풀어졌지만, 등하교 지침은 여전히 이전과 동일하게 고수되고 있었다. 하윤은 김득철이 잡히지 않는 이상, 현 상태가 유지되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하윤의 반에서 한 명이 등교하지 않았다. 가정불화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목이 쏠렸다. 단순 가출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이 났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넌 진짜 하나도 안 궁금해?”

“하나도.”

정말 조금도 궁금해 보이지 않았다.

“너 오늘 우리 반 애 하나가 등교 안 한 거 알아? 너 걔 이름도 모르지?”

“그게 왜.”

“이번 사건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잖아.”

“너 김희원 알아?”

“아니? 오늘 들었지.”

같은 반인 만큼 얼굴을 모를 순 없었다. 하지만 하윤은 오늘에서야 그 아이의 이름이 김희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 별개로 어쩐지 김희원의 이름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반이니 누가 말하는 걸 무의식중에 들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수배 중인 김득철이 김희원을 납치했다고?”

“그럴 수도 있잖아.”

“김희원…….”

무경은 희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윤과 마찬가지로 김희원이라는 이름의 급우가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무경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생각을 잇다가 이내 떠올랐는지 생각났다고 말했다.

“넌 희원이 알았어?”

하윤은 무경에게 받았던 질문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만날 제게 집중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염불 외듯 말하던 무경이 다른 사람을 안다고 말하자 이상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그럴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는 건 아니고, 조금 거슬려서 이름을 봐 뒀던 게 기억나서.”

“어?”

배신감을 느낀 게 무색하게 무경은 다소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 새끼가 자꾸 너 쳐다보잖아.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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