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0화 (10/162)

10화

2. 피노키오, 거짓말쟁이의 종말

“너, 가까이 오지 마. 적정거리 유지해.”

“하윤아.”

“쓰으읍.”

“…….”

하윤은 무경에게 위협하듯 다가가는 척했다. 무경은 하윤의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반걸음 물러나며 불쌍한 척을 했다. 덩치가 무색하게 처량해 보였으나 하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윤이 돌아서기 무섭게 슬쩍 거리를 좁혔기 때문이었다.

“이게, 또!”

하윤은 가자미눈을 뜨며 무경을 노려보았다. 무경은 즉시 커다란 덩치를 옹송그리며 하윤의 눈치를 살폈다.

“등교는 해야 하잖아. 지각하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그냥 늦는 거지.”

“벌 받으면?”

“야, 난 몰라도 너한텐 뭐라고 할 사람 없거든.”

체벌한다고 해도 거뜬히 받아넘길 게 분명했고 교내 봉사를 시키기엔 이따금 현장에도 투입되는 고급 인력이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학생들의 하교를 돕고 있었다. 십분 이십 분 정도의 지각으로 벌을 받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무경은 능력이 출중한 데 비해 비교적 품행이 좋았다. 실습에도 성실하게 참석했고 성적도 우수했다.

학생 주임은 무경이 점심때 와도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말 것이다. 오히려 점심이나 간식은 먹었냐며 매점에서 빵이니 음료수니 사 줬을 것이다. 그게 다 하윤의 입에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또, 또 다가오지.”

“하윤아.”

“너 자꾸 그러면 선생님한테 다 이른다. 조만간 너 돈까스 먹으러 가는 거야!”

“나는 그냥, 그냥 조금 만졌을 뿐인데……. 네가 흥분할 줄 몰랐지. 이제 알았으니까 주의할게.”

“주의하기는 뭘 주의해.”

어느새 성큼 다가온 무경이 어깨로 하윤의 어깨를 살짝 쳤다. 방심한 탓일까. 하윤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무경은 하윤보다 더 놀라며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너어!”

“미안.”

“……너, 가! 저리 가!”

하윤은 무경의 몸을 밀어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간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이스크림이 제 가슴 위로 떨어졌을 때, 무경은 태연하게 ‘남은 거 내가 먹기로 했었지.’라며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바람에 말릴 새도 없었다. 하윤은 초조한 눈빛으로 서이주 부부의 방을 연신 바라보았다. 혹 소리를 듣고 깬 부부가 나올까 봐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가슴팍과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무경의 머리카락과 더운 숨의 감촉이 생생했다. 긴장한 탓에 감각이 예민해진 줄도 모르고 무경은 자꾸만 하윤을 괴롭혔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는 하윤의 손을 게걸스레 핥기도 했다.

물론 하윤 또한 은근슬쩍 충동에 져 버린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닌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무경은 하윤을 곧장 방으로 데려갔다. 문을 닫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숨이 얽히자 몸도 함께 얽혔다. 틈 하나 없이 꽉 끌어안은 채 체온을 나눴다.

물론 암시가 있어 그 이상의 별일 없었으나 민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쨌든 충동에 넘어간 건 하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새벽까지는 무경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가슴팍이 조금 쓰라리긴 했지만 베이거나 부러진 게 아니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아침이 밝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졌을 때, 하윤은 아이스크림이 왜 제 가슴 위에 떨어졌는가 의아했다.

물론 떨어질 순 있겠지만 그렇게 제 가슴 위로 똑 떨어질 각도였는가?

답은 ‘아니오’였다. 만약 정상적으로 떨어졌다면 배 위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용했단 말인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무경의 염력이었다.

하윤이 따지고 들자 무경은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양 환하게 웃었다. 하윤은 앙갚음하기 위해 무경의 등도 때리고 팔도 때리고 손등도 깨물었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등굣길에서까지 심술을 부렸다.

작정하고 화를 내자면 아예 학교까지 문을 열고 달아날 수 있었지만, 또 그렇게까진 화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괜히 무경을 밀쳐 내기만 했다.

무경도 그것을 안 탓인지 계속 불쌍한 척만 했다. 적당히 받아 주기만 하면 하윤이 심술을 그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무경을 떼어 놓고 바지런히 걸었으나 신호등에 걸리고 말았다. 막 신호가 바뀐 탓에 무경이 느릿하게 걸어왔음에도 따라잡히고 말았다. 무경은 슬쩍 하윤의 곁에 서서 하윤의 손등에 제 손등을 슬쩍 붙였다.

하윤이 도끼눈을 떴으나 무경은 씩 웃으며 뒤를 향해 눈짓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그늘에 있으라는 말이었다. 하윤이 한걸음 물러나 그늘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경은 환한 볕 아래 가만히 서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말을 제 마음대로 여기더니 이번에는 또 지키고 있었다.

하윤은 무경의 상의 끝자락을 슬쩍 끌어당겼다.

“뭘 미련하게 거기 서 있어. 신호 바뀌려면 아직 멀었어.”

이번엔 무경이 가자미눈으로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슬쩍 뒤로 물러나 그늘로 들어왔다.

구름 하나 없는 날이라 그런지 그늘에도 하늘의 푸름이 묻어 푸르게 보였다. 하윤은 무경을 보지 않는 척하다가 다시 슬쩍 힐긋거렸다.

자신이 보지 않는 줄 알았던지 무경은 이제 신호등을 보고 있었다. 볕 아래 있을 때보다 그늘이 얼룩진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라 큰 눈인 줄 모르지만, 무경은 눈이 컸다. 이따금 신경이 예민하거나 피곤할 땐 양쪽 눈 다 옅은 쌍꺼풀이 졌다. 코는 옆에서 볼 때 날렵한 선을 가졌으나, 정면에서 봤을 때도 밉지 않고 모양이 좋았다.

얼굴에 살이 없는 편이라 턱선이 선명했다. 눈이나 턱선 때문에 사뭇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 인상이나 눈빛 때문에 글러 먹었다. 하윤은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고 급히 고개를 돌리는 무경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무경은 웃음이 많은 편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하윤만 보면 웃어서 그런지 모를 일이었지만.

‘내가 옆에 없을 때도 웃고 있는 것 같긴 하던데.’

웃지 않아도 항상 여유로운 표정이라 가만 보면 약이 오르기도 했다. 하윤은 무경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좀 재수 없어.’

웃음에 관한 걸 생각하다가, 표정으로 생각이 이어지고, 또 그 표정으로 간밤에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입술이 생각나서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을 때의 일이 훅 떠올랐다. 그늘에 있는데도 볕 아래 있는 것처럼 열이 훅 올라 목덜미를 덥혔다.

열기 때문일까, 하윤은 또다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옆을 힐끗거렸다.

드문드문한 그늘 때문에 햇살 한 조각이 무경의 머리칼을 비추고 있었다. 머리칼이 자갈돌처럼 반질거린다고 생각할 무렵에 때마침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왔다.

“…….”

하윤이 반질거린다고 생각했던 머리칼이 바람결에 올올이 나부꼈다. 열기로 들떴던 가슴이 이번엔 바람결에 제 마음대로 술렁였다. 하윤은 발끝을 움츠렸다.

신호 한번 길었다. 그러나 이제 제법 기다렸으니 곧 바뀔 것이다. 하윤은 무경을 보지 않은 채 슬쩍 한 걸음 다가갔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상대의 온기가 아주 살짝 느껴질 거리에 섰다.

무경이 웃음인지 숨소린지 불분명한 소리를 냈을 때, 하윤은 슬쩍 손등으로 무경의 손등을 쳤다. 그러자 무경이 하윤의 손에 슬쩍 손가락을 걸었다. 잡지도 뿌리치지도 않자, 무경이 아예 손을 잡았다.

잡힌 손이 더웠다. 하윤은 발뒤꿈치를 올렸다가 내렸다. 신호가 바뀌길 애타게 기다리다가 신호가 바뀌자마자 무경의 손을 놓고 줄행랑쳤다.

시선이 따갑다. 하윤은 절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돌렸다. 무경은 슬쩍 하윤의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졸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하윤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칠판을 바라보았다. 흰 건 글씨고 청록색은 칠판이었다. 판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나 하윤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책에 적힌 내용도 초반에 불과했다.

글씨 대신 쭉 그어져 있는 선을 보며 무경은 소리 없이 웃었다. 깨어 있는 척하느라 바쁜 하윤의 손에서 공책을 빼냈다. 판서 된 부분까지 얼추 필기를 마친 자신의 공책을 하윤의 책상에 놓고, 손도 필기가 끝난 부분에 옮겨 두었다.

무경은 글씨가 삐져나가 있는 부분을 익숙하게 지우고 다시 필기하기 시작했다.

칠판이 다 차자 선생은 칠판을 앞부분을 지웠다. 그러나 이미 암기를 마친 무경은 막힘없이 계속 글씨를 써 나갔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던 하윤은 어느새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꾸벅이려는 고개를 솜씨 좋게 잡아채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경이 판서를 다 따라잡았을 무렵에 종이 울렸다.

종소리를 들은 하윤은 곧장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나 수업 시간 중에 쏟아지던 잠은 종이 울리면서 함께 사라졌다. 잠들기엔 모호한 피로감이 남은 채 하윤은 무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경은 하윤이 깔고 있는 자신의 공책을 빼내 모자란 필기를 보충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건 너 때문이 아닐까?”

“왜. 또. 해 줘도 난리야.”

하윤은 가지런한 글씨로 보기 좋게 정리된 공책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교시는 판서가 많기로 유명한 선생이었다. 한번 돌아서서 판서하기 시작하면 교실엔 침묵이 맴돌았다. 성적순으로 들어오는 학교가 아닌 만큼 교과 성적에 열심인 부류와 비교적 불성실한 부류가 한데 섞여 있었다.

열심인 아이들은 전투적으로 판서를 따라잡기 위해 분주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겐 ASMR이나 다름없었다. 규칙적으로 칠판을 두들기는 소리, 삼색 볼펜 색깔 바꾸는 소리 등.

그러나 대놓고 자는 일은 드물었다. 교사가 학년 부장이자 육체 계열 에스퍼였기 때문이었다.

학기 초반엔 여럿 까불다가 실제로도, 추상적으로도 피를 봤다. 그가 불시에 공책 검사를 해서 수행평가를 매겼기 때문이었다.

이곳 아이들은 수행평가가 크게 작용했다. 일반인이 아닌 만큼 기관의 수행평가 등으로 사회적응 능력을 가늠했다.

물론 능력이 크게 뛰어난 경우엔 사기업이든 국가기관에서 모셔가기 바빴다. 그러나 능력이 어중간하거나 전투계가 아닌 경우엔 대학 진학이든 사회에 첫발을 내딛든 고교 수행평가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른바 다년간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떤 작업에 투입되었고, 어떻게 능력을 발휘했는지 등 쓸모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오늘 특히 잠도 못 자서 진짜 졸려 죽는 줄 알았네.”

“지금 좀 자. 다음 시간엔 졸지 말고.”

“넌 안 졸려?”

“나른하긴 한데 졸린 정도는 아니야.”

“와, 독하다 백무경.”

“커피라도 사올까?”

“피자 빵도.”

“눈 붙이고 있어. 금방 사 올게.”

무경은 하윤의 머리칼을 흩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경이 교실을 나선 뒤 하윤이 막 잠들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하윤의 의자 다리를 찼다.

“야.”

“……?”

하윤은 고개를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짜증부터 밀려왔다.

“야, 귀먹었냐?”

재수 없는 목소리는 재차 하윤이 앉은 의자 다리를 걷어찼다. 미묘하게 몸이 밀리자 하윤은 즉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오. 화났는데, 화났는데.”

재수 없는 목소리, 최성한은 하윤이 일어나자 과장된 동작으로 물러났다. 그의 양옆에 있던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장단을 맞췄다.

“야, 미쳤냐?”

“얘, 미챘녜~.”

최성한은 하윤을 따라하며 낄낄거렸다. 하윤이 불쾌감을 느낀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문들이 생겨났다. 하윤의 감정에 반응하여 당장이라도 최성한 패거리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희가 어떤 상탠 줄도 모르고 셋은 계속 낄낄거렸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좆만 한 새끼가. 확 씨.”

“야, 적당히 해. 무경이 왔을 때 이르면 어쩌게.”

“야, 걔한테 이르면 뭐. 백무경이 뭐? 씨발 그 새끼는 뭐라도 된 것처럼 맨날 나대기만 하고 좆도 없어.”

하지만 말과 다르게 최성한은 무경을 껄끄러워했다. 화염계 에스퍼인 최성한은 자기 능력에 자부심이 넘쳤으나 아직 능력 제어가 능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백무경을 라이벌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예전부터 비슷한 놈들이 많았기 때문에 무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무경의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반면에 비전투계로 분류된 하윤에겐 은근슬쩍 시비를 걸었다.

물론 하윤도 예전부터 비슷한 놈들이 많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작은 개가 겁먹고 짖는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시끄럽기는 하지만 딱히 겁먹거나 하지 않았다.

하윤은 셋을 피해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바쁘게 쫓아온 셋이 앞을 가로막았다.

“말하는데 어딜 가, 새끼야!”

“이르러.”

“이 미친 새끼가. 야 시발, 니가 그러고도 사내새끼냐?”

“야, 야. 둬. 저 새끼 사내새끼 아니니까.”

최성한은 낄낄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야, 너 백무경한테 뭘 해 줬길래 그 새끼가 빵셔틀까지 하냐? 뭐 좋은 거라도 해 줬어? 아니, 진짜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래. 비결 좀 알게. 그래서 내 필기도 시키려고.”

최성한은 상스러운 손짓을 하며 동의를 구하듯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평소라면 같이 웃었야 할 친구들이 웃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에 고개를 돌린 최성한은 그대로 굳었다.

커피 우유와 빵을 사 온 백무경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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