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서이주는 예전부터 건강과 관련하여 잡곡밥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방에 다녀왔다더니 어느 집 밭을 털어 왔는지 각종 곡물을 집에 들여놓았다. 집안 요리를 도맡아 하는 무경의 부친 백진하는 서이주의 뜻을 이어받아 잡곡이 9할은 될법한 무시무시한 잡곡밥을 지었다.
‘쌀, 쌀은 어딨는 거야.’
하윤은 무경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무경은 눈을 끔뻑이다가 제 밥에서 쌀밥이 주로 포진한 부분을 떼어 하윤의 밥공기에 넣었다. 그러곤 미리 하윤이 빼놓은 못 먹는 잡곡 더미를 가져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마침 서이주는 TV를 보고 있었고 백진하는 프라이팬 가득 달걀부침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서이주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소리를 냈다.
“쓰읍. 또 편식한다.”
“…….”
“…….”
무경은 서이주가 뭐라고 하기 전에 잡곡 더미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사이 하윤은 무경이 준 밥 사이에 숨은 검은콩을 골라냈다.
“얘는, 검은콩 그게 얼마나 몸에 좋은지 모르지.”
“그냥은 먹겠는데 밥에 넣은 건 싫단 말에요.”
사실 서이주도 어디에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그냥 검은콩이 노란 콩이나 완두콩보다 좋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하윤이 그 점을 짚자 서이주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하지만 하윤은 억울했다. 하윤이 생각하기에 서이주는 몸에 나쁜 짓은 골라서 했다. 술, 담배, 불규칙한 삶, 과로 등등. 그런 게 고작 잡곡 한 줌으로 해결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론 또 또 그렇게 엉망으로 사니 잡곡이라도 먹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무경은 한 번 더 하윤의 밥과 자신의 밥을 교환했다. 완전 범죄를 꿈꾸듯 무경은 하윤이 모아 놓은 검은콩을 재빨리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때 백진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커다란 접시를 갖고 왔다. 그 안에는 적어도 달걀 한 판을 쏟아 넣은 듯한 양의 달걀부침이 쌓여 있었다.
“달걀 많이 먹어. 달걀은 완전식품이야. 여보도 많이 먹어요.”
“……자기, 난 오늘 달걀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밥맛 없다고 안 먹으면 요즘같이 날 더울 때 큰일 나요.”
백진하는 달걀부침 하나로 밥 한 입을 떠서 서이주 입에 갖다 댔다. 서이주가 망설이자 거대한 덩치가 무색하게 아양을 부렸다. 결국, 버티지 못한 서이주가 달걀을 받아먹을 때, 하윤은 재빠르게 수저를 놀렸다.
백진하가 달걀을 들이밀기 전에 다른 반찬으로 밥공기를 비웠다. 더 먹으라는 말이 이어졌으나 고개를 저었다.
“전 이거면 돼요.”
“그럼 달걀이라도 하나 먹지.”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서이주가 잡곡밥을 신봉하듯 백진하는 달걀에 집착하는 면모를 보였다. 모친과 부친을 닮았기 때문일까. 백무경은 잡곡밥도 달걀도 곧잘 먹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나는 몸을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일지도 몰랐다.
식탁을 박차고 나가려 할 때 서이주가 하윤을 붙잡았다.
“밥 더 먹으란 소리 아니니까 잠시 서 봐.”
서이주는 물을 마시며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김하윤 너 당분간 혼자 등하교하지 마. 귀찮더라도 무경이랑 붙어 있어. 무경이 넌 수상한 사람 접근 안 하는지 살피고. 물론 너도 조심하는 거 잊지 마.”
“아, 왜요?”
“왜긴 왜야. 세상이 흉흉하니까 그렇지. 귀찮더라도 그렇게 해.”
새벽녘에 했던 뜻 모르던 말과 관련 있는 것 같았다. 하윤이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사이 무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를 움찔거리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백무경답지 않게 환한 표정이었다. 괜히 심술이 돋은 하윤은 서이주 몰래 무경을 찔렀다. 그러나 무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윤이 저 밥 먹는 사이 달아날 새라 한쪽 손으로 하윤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하윤이한테도 말했지만, 타임캡슐 하나 묻을까 싶어. 나 혼자만 하려고 했는데, 기왕 묻는 거 다 같이 묻으면 좋을 것 같아서. 다들 그 안에 넣을 만한 거 준비해. 십 년 뒤에 열어 볼 만한 편지나, 소중한 물건 같은 거.”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이유는 무슨 이유. 그냥 가족들끼리 추억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여름방학 숙제 같은 거 말이야.”
서이주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무경은 의아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가 아는 서이주는 이런 데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백진하가 난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이주가 식사 중에 계속 TV를 보는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이주는 TV를 끄려는 백진하를 제지했다.
[에스퍼의 실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접수된 것만 이미 세 건으로, 미성년 에스퍼의 비율이 육십 퍼센트를 넘습니다. 초인특수관리청은 미성년 에스퍼에 관한 보호를 강화할 방침입니다.]
“학교 마치면 딴 길 새지 말고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출근하자마자 그쪽으로 실습 일정 조율하라고 요청할 거야.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수상해 보이는 곳 가지 말고.”
“에이, 저희가 지금 몇 살인데요.”
“열일곱. 슬슬 저희가 다 큰 줄 알고 까불 나이지.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사람들은 서이주의 염려를 별스럽다고 말했다. 서울 바닥에서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에스퍼를 납치하는 일이 그렇게 흔하겠냐고 말이다. 단순히 괴환에 휘말렸는데 집계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둥의 말이 오갔다.
그러나 삼 일 전 실종되었던 미성년 에스퍼들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실종되었던 미성년 에스퍼들의 시신은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없도록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워낙 증거도 흔적도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그 와중에 비슷한 시기에 추가로 일어난 실종 사건의 미성년 에스퍼 또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광교 지하 수로를 청소하려던 용역 업체 직원이 발견하였으며, 앞선 시체들보다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산 채로 심장이 적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시신 처리를 위해 범인은 지하 수로를 오가는 괴수를 이용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괴수는 시신을 먹다가 다른 괴수와 영역 다툼에 휘말렸다. 헌터의 개입으로 괴수들은 사살되고, 시신은 물살에 휩쓸려 용역 업체 직원에게 발견된 것으로 추론되었다.
그러나 범인이 누구인지, 왜 심장을 적출했는지, 범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대상이 주로 미성년 에스퍼인 점을 미뤄 어떤 주술 의식을 행한 게 아니냐 추론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성년 에스퍼들의 신체는 주술 의식에 자주 등장하는 제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초인특수관리청은 각 시설의 내외 보안을 강화하는 한편, 예정되어 있던 외부 행사 일정을 일괄 연기했다. 대도시와 달리 헌터 인력이 부족해 학생들의 실습 등에 괴수 처리를 의존하고 있던 지방자치단체에서 반발이 이어졌으나 또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관련 사건을 조사 범위를 지방으로 넓히면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설은 아이들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단축 수업을 시행하고 일정 시간 외엔 개인 활동을 금했다.
등하교 때는 둘 이상 짝을 이루게 했고, 동선이 맞지 않는 등 불가피한 경우에는 경호 인력이 동원되었다.
하윤과 무경은 진작 짝을 이뤄 등하교하고 있었고 구태여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정 부근까지 길이 맞는 학생들이 따라붙으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이동해야 했다.
그냥 가던 길을 걸어가는 것뿐인데도 여럿이 함께 있으려니 기운이 빠졌다. 하윤은 마지막 무리를 보낸 다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많이 힘들어?”
무경은 자연스레 하윤의 가방을 끌러 내며 물었다. 무거운 가방이 사라지자 땀으로 젖은 등이 시원해졌다.
“그러게 가방 진작 주지.”
“야, 안 그래도 너 부려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데 거기서 가방을 어떻게 주냐.”
“그냥 줘. 너 힘들잖아. 난 하나도 안 힘들어.”
하윤은 무경을 힐끔 바라보았다. 더위에 발갛게 익어 땀을 삐질거리는 저와 달리 무경은 멀쩡했다. 이전처럼 실습한다고 바깥에 종일 있는 게 아니면 이 더위에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도록 수련하기 때문이리라.
“나도 이 정돈 괜찮아.”
괜히 약이 오른 하윤은 무경이 들고 있던 자신의 가방을 빼앗았다. 다시 둘러메자 몸이 축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애써 내색하지 않는 중에 무경은 하윤의 가방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무게를 덜어 주려 한 것이지만 미관상 좋지 않았다.
하윤이 노려보자 무경은 속없이 웃었다.
“집에 얼른 가자. 가서 수박 썰어 줄게. 씨도 다 빼 줄게.”
“……야, 내가 애냐. 그런 거로 달래게?”
무경은 하윤이 뭐에 심기가 불편한지도 모르면서 일단 달래려고 들었다. 그러나 따지고 들기엔 하윤 또한 자신이 뭐에 약이 올랐는지 몰랐다.
저보다 뛰어난 신체 조건에 열등감을 느꼈던 걸까? 아니면 무경에게 한마디라도 붙여 보려던 급우들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더위에 짜증이 났던 걸까?
하윤이 입을 다물자 무경이 넌지시 귓가에 속삭였다.
“업어 줄까?”
“됐어.”
“업혀.”
“야.”
“얼른.”
무경은 재빨리 등을 내밀었다. 하윤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경의 등에 업혔다. 무경은 하윤을 달랑 업고는 씩 웃었다. 하윤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괜히 속이 시끄러웠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변덕이 죽 끓듯 끓었다.
‘나 사춘긴가.’
하윤이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둘은 집에 도착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하윤은 대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대문에서 들어오면 곧장 있는 포도 덩굴이 하윤을 맞았다.
“벌써 도착했어?”
“중간에 뛰었어.”
“왜, 뭐 있어?”
“아니. 그냥 집에 빨리 오고 싶어서.”
무경은 씩 웃으며 하윤을 고쳐 업었다. 그냥 하윤을 내리면 될 일이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론 하윤의 엉덩이를 받치고 남는 한 손으론 문을 잠갔다. 단순한 철문으로 보이는 문 뒤에는 첨단 보안 장비뿐만 아니라 고대 술법도 함께 걸려 있었다.
무경은 세 가지 잠금장치를 다 걸어 잠근 뒤, 각 보안 장비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했다. 이어 집 안이나 주변에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점검했다. 무경의 초능력이 바닥과 이곳저곳을 매섭게 쑤셔 댔다.
무경은 강한 염동력을 갖고 있었다. 단순히 물건을 떠올리는 수준을 넘어 다양하게 응용 가능했다. 주변 탐색 또한 응용 중 하나였다. 염동력을 쓰기 위해 기운을 퍼트려 근처 사물을 인지하는 단계를 일반적인 경우보다 폭넓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장점은 숨은 에스퍼들이나 괴수를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단점은 단순히 있는 것만 알 뿐 그게 누구인지는 구분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하윤은 무경의 조각이었으므로, 하윤만은 곧잘 찾아냈다. 물론 이것도 하윤이 문안에 숨으면 말짱 소용없었다. 그래서일까 무경은 하윤이 문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무경은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하윤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서 또 네 개의 잠금장치를 잠갔다. 한껏 신이 나 있는 무경의 얼굴을 힐끔거리던 하윤은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왜, 방까지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됐어.”
이미 집 안까지 업혀 들어온 뒤라 거절이 늦었다. 그러나 또 계속 업혀 있는 건 좀 그랬다. 하윤이 몸을 돌리자 무경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왜.”
“방까지 데려다줄게.”
“백무경 까불어.”
무경은 씩 웃으며 다시 등을 내밀었다. 서 있는 곳은 현관이었고, 무경을 제치고 들어가기엔 장소가 좁았다. 어떻게 하든 다시 붙잡힐 게 뻔했다. 하윤은 입을 삐죽이다가 다시 무경에게 업혔다.
“자꾸 업어 봤자 너만 힘들지.”
“나는 너 업고 있는 거 좋은데.”
무경은 밖에서처럼 다리 밑에 손을 걸지 않았다. 당당하게 두 손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받치고선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맨날 요즘 같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