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무경의 어머니, 서이주는 늦은 새벽에 돌아왔다. 물을 마시러 아래로 내려왔던 하윤은 주방과 이어지는 뒷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서이주와 마주쳤다.
“오셨어요.”
“잘 잤니?”
하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잠이 떨어지지 않아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서이주는 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할 거 해.”
“……예.”
하윤은 짧은 대답 후 늘어지게 하품했다. 눈을 감은 채 냉장고를 열자 다른 공간이 나왔다. 암만 손을 뻗어도 잡히는 게 없었다. 그제야 눈을 뜬 하윤은 냉장고 속 까만 공간을 보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다시 문을 닫았다가 열자 본래 냉장고 속이 나타났다. 차게 식혀 둔 보리차를 꺼내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차가운 물을 들이켜자 머리가 얼얼했다. 통증을 참으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서이주가 혀를 차며 웃었다.
“금제를 걸면 나을까 싶어서 안경을 씌웠더니, 이젠 안경 없으면 통제가 잘 안 되는구나.”
“어쩌다 한번 이런 거예요.”
“그리고 너 찬물 좋아하면 나중에 물 체한다.”
“그게 뭐예요?”
“있어, 그런 거. 미지근한 거 마셔.”
“마시기 전에 말해 주면 안 돼요?”
“어차피 안 들을 건데 뭐.”
“…….”
하윤은 눈을 반짝 뜨고 서이주를 바라보았다. 서이주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하윤을 힐긋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뒷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장례식장은 잘 갔다 오셨어요? 원래 장례식장 갔다 오면 소금 뿌린다고 하던데, 뿌려 드려요?”
“안 그래도 오다가 편의점 들러서 소금 사다가 집에 들어오기 전에 뿌렸어. 재수가 없어서 말이지.”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경이한테 누구 장례식장에 갔다 왔는지 들었니?”
“전……, 전.”
지읒이 들어가는 것 같은데 나머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윤이 쉽사리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자 서이주는 정답을 말했다.
“정기오.”
“지읒만 생각나더라고요.”
“……괜찮아. 별 기대 안 했어. 어쨌든 너도 본 적 있을 거야. 아니, 느낀 적 있을 거야.”
[문]에서.
서이주는 마지막 말을 아주 작게 읊조리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껐다. 어느새 바짝 타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곧장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무 많이 피우지 마세요. 몸에 안 좋잖아요.”
“네 몸에?”
“……예. 간접흡연이 더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윤의 대답에 서이주는 소리 없이 씩 웃었다. 얄밉다는 양 하윤을 쏘아보다가 이내 손을 뻗어 하윤의 머리를 흩트렸다.
“한 대만 더 피우자. 지금은 좀 심란해서 그래.”
담배 끝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서이주는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슬슬 밝아 오는 바깥을 바라보던 그녀는 슬쩍 몸을 돌리던 하윤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아, 담배 냄새 때문에 싫은데.”
“사내새끼가 까탈은.”
“…….”
“정기오와 나, 문태강은 아주 오랫동안 문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 아마 네가 좀 더 크면 그 연구를 물려받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제가 싫다고 해도요?”
“그래.”
“왜요?”
“그럴 수밖에 없어질 것 같거든.”
하윤은 서이주의 말에 더는 딴죽을 걸 수 없었다. 어째 지금은 듣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절로 양손이 등 뒤로 갔다.
“하지만 전 연구할 만한 머리가 아닌데요. 그런 거 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하잖아요.”
하윤은 속이 쓰렸으나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히 말했다. 답지 않게 자신 없는 얼굴을 하는 하윤을 보며 서이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기야 가만히 앉아 연구하기엔 네 능력이 좀 아깝지.”
“머리는 상관없고요?”
서이주는 담배를 문 채 하윤의 머리를 붙잡았다. 가늠하듯 하윤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마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길게 남은 담뱃재를 서둘러 털어 냈다.
“그 점은 조금 아쉽긴 해. 하지만 너라고 어쩌겠니. 머리도 써야 느는 건데. 생각하기 전에 일이 다 끝나 버리니 쓸 일이 있나.”
서이주는 하윤에게 두뇌가 발달할 시간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노라고 위로했다. 하지만 위로랍시고 가만 듣고 있자니 기분이 안 좋았다.
“지금 제 머리 안 좋다고 욕하시는 거죠.”
“그래, 이거 봐. 아는 거 보면 그렇게 나쁘진 않다니까.”
하윤은 서이주를 쏘아보았다. 서이주는 그런 하윤이 우스운지 그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였다.
“나는 너한테 내가 아는 모든 걸 가르쳤어. 지금은 비록 네가 관심도 없고, 쓸 필요도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가르쳤다고 머리에 다 있으면, 일반고 애들 다 한국대 가지 왜 다 다른 데로 가요?”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은 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서이주의 말은 영 신빙성 없게 들렸다. 시큰둥한 하윤의 태도에 서이주는 남은 담뱃재를 털며 키득거렸다.
“네가 태어날 때부터 본 사람이 난데, 네가 뭘 알아?”
“…….”
하윤은 자기 자신이니 자신이 더 잘 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나 당당한 서이주의 태도에 말문이 막혀 입술을 떼지 못했다.
“수가 있다, 이 말이야.”
“…….”
“어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눈빛 봐라. 왜 이렇게 불손해. 손만 공손하면 다야?”
하윤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한 번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서이주는 손끝으로 하윤의 안경테를 툭 쳤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유리한가 싶다가도, 또 갑자기 역전되는 일이 숱해. 그래서 사람은 한 끗을 숨겨 두고 살아야 하는 거야.”
“타짜 같은 말을 하시네요.”
“그래, 그런 게 되어야 하는 거야. 어느 분야든 수도 잘 읽고, 잘 숨기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패를 내는 거. 그렇게 해야 돈도 벌고 목숨도 버는 거야. 물론 그러려면 짬이 쌓여야 하는데, 우리 하윤이는 짬이 차긴커녕 아직 희고 말랑하기만 하고. 도대체 언제 다 크니?”
“저도 이만하면 다 컸거든요.”
“어머, 그으래?”
서이주는 하윤의 양 뺨을 꼬집었다.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며 하윤의 볼살을 늘렸다.
“그래도 아직은 덜 큰 게 낫다. 무경이 좀 봐. 걔는 삼사 년 전에도 시커먼 게 다 큰 것 같았어.”
서이주의 말에 하윤은 삼사년 전의 무경을 떠올렸다. 무경은 어릴 때부터 컸다. 저도 꾸준히 자랐다고 자부하지만, 무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짬이 모자라면, 경험 많은 어른이 도와줄 수밖에. 너 밖이든 안이든 안경 잘 쓰고 다녀라.”
“왜요?”
“왜요는 뭘 왜요야. 넌 벗은 모습이 나으니까 이래저래 다른 사람 꾈까 봐 그러지. 내가 내 아들 안 챙기면 누가 챙겨 주냐?”
서이주는 하윤의 안경을 톡톡 건드렸다.
“안경 좀 그만 건드려요. 삐뚤어지잖아요.”
“내 마음이다. 왜.”
하윤은 안경을 사수하기 위해 두 손으로 안경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서이주는 치사하고 더러워서 장난도 못 치겠다고 중얼거리다가 품에서 담배 한 대를 더 꺼냈다. 다만 이번엔 불을 붙이지 않은 채 입술로 담배를 위아래로 까딱였다.
“타임캡슐을 하나 묻을까 해. 좋을 때, 평안할 때 추억을 남겨 둬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적당한 곳을 찾고 있었어.”
정기오의 죽음, 연구, 그리고 타임캡슐까지. 하윤은 서이주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속 시원하게 풀어 주면 좋으련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대신 서이주는 턱 끝으로 자신이 생각한 장소를 가리켰다.
정원엔 수많은 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도 문이 많은 곳이었으나 서이주가 만든 문에 하윤이 연습 삼아 만든 문들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이주가 가리킨 곳에는 문이 없었다.
서이주는 문과 문이 겹치지 않는 공간, 그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이주와 짧은 대화 후 하윤은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 시간은 오 분도 귀했다. 조금이라도 아끼려 벌컥 방문을 연 순간, 하윤은 벽처럼 서 있는 무경과 마주쳤다.
“깜짝이야.”
무경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달랐다. 자명종 시계며 얇은 책등이 두둥실 떠 있었다.
“……어디 갔었어.”
막 일어나서 그런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무경은 얼굴을 비비다가 하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윤은 잡힌 손을 힐끗 바라보다가 평이하게 대꾸했다.
“물 마시러.”
“이야기하고 가지.”
“자는데 물 마시러 간다고 말해?”
“응.”
“또, 또 억지 부리네.”
“…….”
무경은 하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입꼬리만 올려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얄밉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하윤도 피식 웃었다. 별다른 말 없이 하윤은 침대에 누웠다. 하윤의 손을 잡고 있던 무경도 따라 침대에 누웠다.
무경이 곁에 눕자 혼자 눕기엔 넉넉했던 퀸사이즈의 침대가 꽉 차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 콩만 한 방에 킹사이즈를 놓긴 그렇고.’
이미 하윤의 방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서랍장 하나로 방이 꽉 찼다. 더군다나 큰 가구는 수치상으로 아는 것과 실제 놓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침대를 바꾸게 된다면 책상을 빼야 할지도 몰랐다.
암만 그래도 하윤은 아직 학생이었다. 방에 책상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비록 그가 교과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
눈을 감은 채로 이것저것 생각하던 하윤은 새삼스럽게 무경이 얄미웠다. 큰 침대를 써야 하는 것도, 저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그리고.
“왜?”
“너 잘생겨서 짜증 나.”
눈을 부릅뜬 탓에 져 있는 쌍꺼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윤이 눈가를 더듬으며 심통 맞게 속삭이자 무경이 소리 내 웃었다. 무슨 그런 소릴 하느냐 말했으나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너 담배 냄새나.”
“담배? 아, 선생님이 피우셨어.”
“어머니 오셨어? 난 또 너 말고 다른 사람 기척 느껴지길래. 그런데 넌 옆자리에 없고, 또 그 와중에 꿈도 꿨거든.”
무경은 작은 소리로 재잘거리며 하윤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살살 간질이는 듯한 손길이 이따금 목덜미에 닿았다.
“무슨 꿈 꿨는데?”
“네가, 아니 이야기 안 할래.”
“왜, 뭔데?”
“잘래.”
“이게 또 궁금하게 말하다가 끊네.”
하윤은 무경의 옆구리와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간질이려고 했으나 손이 들어오지 못하게 힘을 주어 그럴 수가 없었다. 약이 오르는데 또 달려들었다간 아침 시간이 다 지날 것 같았다.
복수를 포기한 하윤은 아예 돌아누웠다. 일어나야 할 때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바삐 잠을 청하려 눈을 감자 무경이 바짝 다가와 하윤을 끌어안았다. 무경의 숨이 조금 전 손짓같이 하윤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다른 사람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 나 잘 참고 있잖아.”
“…….”
하윤은 잠시 눈을 떴지만 못 들은 척 다시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