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죄, 죄송한데 전시품은 기증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대여 계약이에요. 저거 말고도 많을 텐데……. 계약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봐요.”
나긋한 말투에 사람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어떡하죠? 저 말이 사실입니까?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애쉬가 기증했다고 생각한 발광석은 게이트 환경 박물관에서 가장 가치 있는 전시물이었다.
관람객들과 견학생들은 대부분 부산물관을 견학하러 온다. 그중에서도 저 전시품은 박물관 대표작이나 다름없었다. 저만한 규모로 온전히 보존된 발광석은 흔치 않은 데다, 최초라는 것에서부터 의미가 아주 컸다. 그런데 그걸 이제 와서 불쑥 돌려 달라니 이쪽으로서도 곤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퍼님, 저 전시물은 최초 발견된 광물이라 다른 발광석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의미가….”
“지금까지 빌려줬잖아요. 그것도 무상으로.”
무상이었습니까? 그들은 무엇도 모르는 얼굴로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전시물 소유주가 소장품을 돌려 달라는데 안 주고 버틸 수도 없는 것이었다.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나인이 입을 열었다.
“……애쉬, 저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당신이 달라고 했잖아요.”
그의 한마디가 단번에 공기를 얼렸다. 가이드가 달라고 했다고 해서 저만한 걸 통째로 안겨 주려고 해? 누군들 경악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게이트 광물이라면 여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른 건 없어요? 좀 작은 거.”
“그럼 부수고 조금만 떼어 갈까요?”
애쉬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광석 일부를 훼손해 떼어 가겠다고? 그건 전시품에 대한 실례였다.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쉬와 그의 가이드는 발광석의 처분을 두고 옥신각신 다퉜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뭐야, 씹. 공간미아 주제에.”
그때, 무리 가운데 누군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린다. 대화가 멎었다. 분위기가 단번에 싸해졌다. 이름 모를 남자의 한마디에 선명하게 서려 있던 것은 분명 적의였다.
나인은 눈을 멍하게 깜빡이며 생각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혼자 있었더라면 못 들은 척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제게 들린 소리가 애쉬에게라고 들리지 않았을 리도 없다.
툭. 나인은 제 어깨 위에 놓이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어깨 위로 팔을 걸친 애쉬가 무게중심을 옮겨 나인에게 비스듬히 기댄다. 자연스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나인을 반쯤 끌어안다시피 한 애쉬는 그가 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듯했다. 남자의 얼굴이 더욱 파랗게 질렸다.
“빨리 이그노어나 데려와요.”
웃음기가 가시고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저 텅 비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바, 발광석을 찾으시는 거라면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되는 것 아닙니까?”
박물관 소장이 금방이라도 울 것같이 절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소장품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맴돌고 있었다.
“이건 박물관 규정상으로도….”
“규정?”
바닥에 내려놓은 소화기가 갑자기 벽 쪽으로 날아가 세게 부딪쳤다. 쾅! 데구르르, 다행히 한쪽이 살짝 찌그러지기만 했을 뿐 소화기가 터지는 일은 없었다.
“내가 그런 거 따박따박 지켰으면 그간 감봉을 그렇게 많이 당했을 리도 없죠. 뺏긴 돈으로만 건물 몇 채는 짓고도 남았을걸요.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일을 귀찮게 만들지.”
“…….”
“말이 기증이지, 일언반구 없이 당당히 내놓으라 요구하는 행태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어. 솔직히 여기 있는 전시물들 대부분이 다 그런 거잖아. 직접 게이트에 들어갈 용기는 못 내면서 가치 운운하는 거 쪽팔리지도 않나? 대가라도 제때 잘 내놓았으면 이런 말도 안 하지, 그런 것도 아니고…. 왜 내 물건 다시 가져가려는데 그게 당신들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어, 기분 뭐 같게.”
차분한 어조의 말이 공기를 한껏 얼어 붙였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애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는 낯이 되어 말했다.
“내 가이드 앞에서 사람 팰 일은 없었으면 하는데. 잘 보이고 싶거든요.”
그 말을 잘 보이고 싶은 장본인 앞에서 해도 되는 건가. 다 들리는데요. 나인은 황당하단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그노어의 제약을 무시하고 이능을 사용한 데 대한 부작용으로 애쉬의 코에서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혈액의 색이 비정상적으로 검다.
그가 이능을 사용할 때마다 검은 안개는 몸집이 조금씩 더 불어났다. 충분히 쉬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결코 완벽하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에서 나인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혹시 이능을 쓰면 쓸수록 안개가 불어나는 건가.
“애쉬.”
“응? 나 사람들이랑 얘기 중이잖아요. 말리지 마요.”
“말리는 게 아니라…… 안 아파요?”
그 말에 애쉬는 손등으로 코 밑을 슥 훑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안 아픈 게 어떤 건지 까먹어서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
뒤에서 몸집을 불린 안개가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꿈틀거렸다. 애쉬는 본인 몸에 이상이 보이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제 걱정을 하는 나인을 보며 태평하게 입가를 씰룩일 뿐이었다.
“……앗!”
그 순간 무형의 힘에 등을 떠밀린 남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자, 남자가 당황해 뒷걸음질을 쳤다.
웨에엥-! 애쉬의 이능 파장에 반응한 사이렌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붉게 깜빡이는 경보등 탓에 분위기가 더 험악하게 느껴진다.
쿨럭. 애쉬가 고개를 돌려 팔소매에 대고 짧게 기침했다. 그 자리에 묻어나는 핏자국에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들 그가 저지른 사건 사고에 가려 애쉬가 늘 폭주 위기를 달고 사는 에스퍼임을 잊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간절함 반, 질책 반의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말 한마디로 박물관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소장품이 날아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남자가 이를 악물고 웅얼거렸다. 소음까지 있는 와중에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쾅! 소화기가 날아와 진열장에 부딪쳤다. 금은 가지 않았지만 찍힌 자리에 희게 자국이 남았다.
“에스퍼님, 제,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그제야 다급해진 목소리로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낯빛이 창백하다. 전시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쉬가 이곳에서 폭주 증상을 보여 실려 간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줄줄이 엮여 곤란한 일을 만들 게 분명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피곤해서 잠시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누가 나한테 사과하래?”
애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그 순간 나인도 난데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애쉬의 말이 맞다. 남자의 사과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
나인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늦게 하는 사과였다. 하지만 나인의 머릿속에는 사과의 내용보다 다른 사실이 둥둥 떠다녔다.
애쉬에게는 권력이 있었다. 그의 요구는 갑작스러웠을지언정 영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애쉬가 제멋대로 굴어도 이들은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다. 평판 역시…… 그건 원래도 엉망이니 크게 지장이 없을 테고.
그렇기에 저 남자는 강자인 애쉬 대신에 쉽게 탓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은 것이다. 지금도 제게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애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됐어요.”
“저걸로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공간미아인 건 사실이잖아요.”
뼈가 있는 나인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나인에게, 애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순진하기는. 저놈은 지금 사실을 말해 준 게 아니라 당신 창피 준 거예요.”
“…알아요. 제가 그걸 모르게요?”
물론 화가 난다. 분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억지로 받아 낸 사과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자신들이 돌아가고 나면 남자는 여전히 애쉬가 아닌 나인을 탓할 것이다. 그게 더 편하니까. 만만하니까. 나인은 자포자기해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이 아닌 사과는 제게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짚고 넘어갈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편들어 준 건 고마워요.”
나인은 애쉬의 손을 꼭 쥐었다. 남자의 사과에 마음이 풀려서가 아니었다. 애쉬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쉬는 여전히 찝찝하고 못마땅한 듯 보였으나, 나인이 됐다니 굳이 나서서 남자를 족치려 들지는 않았다. 그도 여기서 또 나인을 감싸는 건 주제넘은 행동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박물관 관장이 넌지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난주에 방출형 게이트 핵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발광석 확보가 목적이시라면 그때 개방되는 게이트에서….”
애쉬가 코웃음을 쳤다.
“다른 지부 작전이잖아요, 그거. 직접 작전을 수행한 각성자 외에는 게이트 부산물 취득 자체가 안 되는 거 모르시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