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62)화 (62/63)

#62

나인은 입술을 슬쩍 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전, 리온은 다친 소녀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연인 관계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이딩실에서 제 손을 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이고 업무적인 접촉에 가까워 보였다.

애쉬도, 리온도 그저 동요 없이 태연하다. 키스가 인사 정도로 여겨지는 문화권이 있다던데…. 이제 정상의 범주가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잡혔다.

애쉬는 왜 자꾸 내게 닿지 못해 안달인 건지. 방금 전에는 왜 갑자기 입을 맞춘 건지. 그리고… 나와 달리 저렇게 태연해 보이는 이유가 뭔지.

나인은 여전히 많은 것들이 궁금했다.

* * *

블란체 제국은 몬스터 부산물에 대한 연구로 꽤나 앞서 나가는 편이었다. 다른 대륙에 비해 산맥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지형과, 현재 깨어 있는 유일한 용 덕택에 동 대륙 전체에 천연 마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마법 그 자체인 용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마력의 영향을 받은 몬스터들은 다른 대륙의 개체에 비해 훨씬 강력했고, 그로 인해 월등히 품질이 좋은 부산물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나인은 전날의 소원대로 에스퍼들이 이능을 쓰며 전투하는 것을 영상으로나마 원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98-CHC는 외부 충격이 가해지지 않으면 알이 부화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네. 하지만 알을 발견했다면 빠르게 장소를 벗어나는 편이 가장 좋습니다. 어미를 자극하고 싶지 않다면요. 사실 긴 다리 거미 자체는 유해하지 않아요. 산란기를 제외하면 먼저 영역에 들어온 사람을 공격하는 일도 드물고요. 사람을 잡아먹는 몬스터가 아니거든요.”

나인은 게이트 내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며 그가 아는 몬스터에 대해서는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침잠하는 늪 감시자예요. 마주치면 좀 골치 아픈 몬스터인데….”

게이트 환경 연구소에서 나온 사람이 흥분 어린 얼굴로 열심히 펜을 놀렸다. 그는 괴생물체 코드번호 옆에 나인이 말해 준 생물명과 특징을 적어 넣으며 스스로도 외우려는 듯 입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나인이라고 모든 몬스터를 도감처럼 달달 외우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흔히 널린 하급 몬스터들이나, 마법 약의 재료로 쓰이는 몬스터 부산물의 주인들에 대해 아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연구원이 몇 번이고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연구소를 나오자 애쉬가 그 앞에서 나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의 몬스터 연구는 크게 진전된 게 없네요.”

나인의 중얼거림에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에서만 나오는 것들이니까요.”

“왜요?”

“…왜라니요. 게이트 밖에도 그런 것들이 나오면 인간은 이미 멸종했겠죠.”

말도 안 된다는 듯 애쉬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인은 애쉬의 말이 더 신기했다. 몬스터 부산물은 각종 아티팩트나 생활용품을 만들 때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흔히 널린 동식물과 달리 그것들의 피부나 뿔 등이 마력을 더 많이 함유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몬스터 없는 세상이라니.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질 뿐이다.

‘좀 아쉽네.’

세상에는 유해한 몬스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면 가까이에 서식하며 어부들에게 안전한 바닷길을 알려 주는 몬스터도 있었고, 공격성이 없고 제법 귀엽게 생긴 것들은 애완용으로 길러지기도 한다. 히아크라 교수도 민물 털북숭이 한 개체를 교수 연구실에서 기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게이트 안에서 출몰한다던 ‘괴생물체’들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다지만 나인이 아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게이트의 환경 자체도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환경과 무척 유사했다.

그렇다면….

“애쉬.”

“불렀어요?”

“혹시 빛나는 몬스터는 본 적 없으세요?”

어쩌면 자신에게 익숙한 몬스터가 이미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빛나는 것 말인가요?”

“네! 어두워졌을 때 몸이 발광하는 것처럼 보인다거나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분비물을 뱉는 것들 말입니다.”

“…….”

“게이트에서 본 것 중에 그런 거 없었나요?”

애쉬는 기억을 되짚어 보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곧 의아한 시선을 나인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런 건 뭐 하려고요?”

“…….”

나인은 다른 누군가에게 그의 연구 계획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은 여전히 이방인이었으며 마법마저도 낯설게 느껴질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실은 만들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는 애쉬에게는 그에 대해 이야기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 애쉬는 에스퍼였다. 더 이상 병동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실험체를 구하기 마땅치 않았는데 잘됐다 싶었다.

“뭐가 필요한데요?”

이번에도 애쉬는 제게 한없이 관대했다.

“그게 뭐냐면….”

나인은 그에게 마력 반응 용액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했다. 자체 발광하는 성질을 띤 재료가 필요하다고. 그냥 빛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 약과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는 재료를 말이다.

“원래는 뭘 썼는데요?”

“정령 마법을 적용하거나 몬스터 부산물을 추출해서 넣었는데……. 굳이 그게 아니라도 천연 마석의 가루면 충분했어요.”

“……”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애쉬는 뒤늦게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빛나는 괴물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인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푸른 바다 길잡이, 절벽 새, 나선 소라. 모두 바닷가 절벽 쪽에 서식하는 발광형 몬스터였다. 나인이 지금 떠오르는 것만 해도 서너 가지나 되는데 아직 게이트 내에서 발견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괴생물체는 아니고, 생각나는 게 하나 있기는 해요.”

“……!”

“그걸 내가 알려 주면 뭐 해 줄래요?”

그가 가증스럽게 씩 웃었다. 또 대가를 운운하는 태도가 얄밉게 느껴질 만도 한데, 나인은 마음이 조급해 그것보다는 애쉬가 떠올리고 있는 게 뭔지가 더 궁금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바로 원하는 게 잡힐 것 같았다. 그래서 딱히 손해 본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뭔데요?”

“말로 하는 건 좀 그렇고 보여 줄게요. 그래서, 나인은 내게 뭘 해 줄 수 있죠?”

혹시 내게 특별히 원하는 게 있는 건가? 나인은 잠시 생각하다 남자가 가장 최근 제게 요구했던 것을 말해 보았다.

“안마라도 해 드려요?”

“음, 그것도 좋죠. 그런데 너무 약해요.”

“……뭐가 약해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사람을 부려먹어 놓고….”

아직까지도 혹사당한 팔이 좀 아픈 것 같았다.

“나인. 내가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려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구해 줄 수 있다면요?”

“……!”

그게 마음만 먹는다고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건가? 애쉬의 얘기를 듣고 보니 갑자기 조급해졌다. 빨리 가지고 싶다. 그간 머릿속으로 구상만 해 보던 것이 실체를 갖춘다고 생각하니 과장을 좀 보태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어요?”

“뭐, 뭐든지.”

“약속한 거예요.”

애쉬가 못을 박았다. 엥? 나인은 멍하니 말을 내뱉고 난 뒤에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

익숙한 어지러움이 그를 덮쳤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 보니 고요한 실내였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이건…….’

넓고 어두운 공간의 한가운데 찬란하게 빛나는 바위가 놓여 있었다. 남들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게 유리 케이스를 덧씌워 둔 채였다.

[자연 발광석은 B0등급의 방출형 게이트 작전 도중 익명의 에스퍼에 의해 최초 발견된 광물로, 자체적으로 빛을 방출하는 성질을 띤다.]

전시물 앞에 놓인 팻말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방 안에는 다른 전시물이 일절 없었다. 공간 자체가 이것만을 위해 마련되었을 정도로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어때요. 저거 정도면 만족하려나?”

“…….”

나인은 애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정도로 바위에 정신이 팔렸다. 경외감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

‘마석이잖아.’

게다가 저렇게 찬란한 빛이라니! 태양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처럼 밝고 환했다. 저 정도라면 용께서도 탐을 내실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잠재된 천연 마석일 것이었다. 게다가 전혀 가공되지 않은 상태를 보면 누군가 인공적으로 마법을 덧씌운 것도 아니리라.

그때였다. 웨에엥-! 애쉬가 유리 케이스에 손을 가져다 대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유리 케이스 바깥쪽으로 붉은 불이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의아한 얼굴로 바뀌어 애쉬를 보고는 들고 있던 소화기나 곤봉 등을 다시 내려놓았다.

“……에스퍼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저거 돌려줄래요?”

“예?”

“네?”

나인도 함께 되물었다. 마치 맡겨 놓기라도 한 듯 당당하게 나오는 태도였다.

“왜 그런 반응이에요? 원래 내 거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여기에 이그노어 이능까지 걸어 두고 있는 거야….”

“원래 관내 전시물에는 다 도난 방지를 위해….”

“지금 당장 이그노어 에스퍼 데려오면서 전시물 소유주 명단도 가져와 줘요. 지금 반납했으면 해서.”

애쉬가 아무렇지 않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애초에 발광석의 소유주가 애쉬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