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왜 저래, 다들 보고 있는데 갑자기 왜 키스 같은 걸….’
그렇게 생각하던 나인은 누구도 리온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혼자만 이 분위기에서 유리된 감각이 기묘했다. 나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이럴 상황이 아니란 걸 깨닫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상처 부위로 시선을 돌렸다.
“스, 슬라임의 점액에는 원래 독성이 없어요. 공격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만 독을 분비하거든요.”
저녁에 숲을 돌아다니며 봤던 웅덩이가 떠올랐다. 웅덩이는 나뭇가지를 부식시키기도 했고, 근처 나무에 불규칙하게 남아 있던 흔적들도 많았다. 아마 그것은 이들이 슬라임을 상대하다 남은 흔적임이 틀림없었다.
슬라임은 무척 약한 몬스터라 그것이 독침을 꺼내어 공격하기도 전에 가볍게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자고 있을 때만큼 사람이 방심한 때도 없기에 슬라임이 이곳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떠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안 그래도 돼요. 슬라임 독은 본체 성격과 닮아서 환부 아래만 다닥다닥 붙어 있고 몸으로는 퍼지지 않아요.”
독이란 말에 뒤늦게 소녀의 허벅지를 묶으려던 에스퍼가 흠칫했다. 그는 민망한 듯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물러났다.
“본부석은 여태 뭐 하는 거야. 퇴근했나? …씨발, 해독제만 있으면 될 텐데.”
체드는 센터 것들은 위험한 괴생물체를 투입시켜 애 다리를 조져 둔 주제에, 뭐 하느라 오지도 않는 거냐며 화를 냈다. 나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몬스터 독은 일반 해독제로 중화 못 해.”
“…그럼?”
그럼, 이라니? 나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왜 뻔한 걸 물어보나 싶었다.
“그야 슬라임 독으로 새로운 해독제를 만들어야지. 센터에서 생포한 슬라임이라니 이미 만들어 뒀을 텐데.”
“퍽이나.”
애쉬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이런 약한 괴생물체에게 독이 있다는 것조차 누구도 몰랐는데 센터에서 해독제를 만들어 뒀을 리가 만무했다.
체드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 병동에 해독제가 없으면?”
“괜찮아. 내가 만들 줄 알아.”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 나인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몇 가지 유리병들을 더 꺼내어 불빛 아래서 상세히 살폈다.
‘미량의 독. 앤트리온 즙을 독과 같은 비율로 섞은 후에 가열. 그리고 회복 약과 1:9의 비율로….’
나인이 에스퍼의 피가 섞인 점액을 병 입구로 떠서 담더니, 그것과 초록색 물약을 일정한 비율로 맞춰 섞기 시작했다.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 병을 제대로 구별하며 손을 바쁘게 움직이던 나인이 푸른 스크롤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고 찢자, 유리병 아래 깔린 액체가 부글부글 끓었다. 병 입구로 뿌연 김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에스퍼들은 나인이 하는 짓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나인은 끓는 액체 위에 투명한 회복 약을 조심히 들이부었고 해독제가 완성되었다.
그는 완성된 물약을 불빛 앞에 가져다 대고 경과를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기를 띠는 물약의 층이 세 개로 분리되었다. 분리된 액체의 층 사이에 까만 띠가 생겼다. 까만 층은 곧 뭉글거리며 저들끼리 뭉치더니 구체 모양이 되어 꿈틀거렸다. 나인이 병의 마개를 열자 까만 구체가 병 주둥이로 통 튀어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됐다.”
명쾌하게 말한 나인은 벌어진 소녀의 상처에 완성된 물약을 통째로 퍼부었다. 아끼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해독제의 양은 충분했고, 환부에서 거품이 끓더니 아까 전처럼 까만 독이 꾸물거리며 피부 위로 흘러나왔다. 해독제가 중화한 독은 아까 전과 같이 공기 중에 섞여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버렸다.
고통에 오래 고전한 것치고는 상당히 간단하게 치료가 되자 허무함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에스퍼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인과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감사합니다….”
눈물범벅의 소녀가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고통에 마비되었던 정신이 이제야 돌아온 듯했다. 나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즈로 환부를 다시 닦아 내고 새 회복 약을 꺼내어 상처 위에 골고루 발랐다.
“저걸로 되나. 거기 약 발라서 뭐 해. 꿰매야 하는 상처인데….”
그러나 이 자리에 있던 이들은 기적을 한 차례 더 목격할 수 있었다. 심각했던 상처가 점차 옅어지는 듯하더니, 갈라진 살이 맞붙고 언제 다쳤냐는 듯 상처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말끔하게 치료된 다리를 내려다보던 나인은 뒤늦게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시선들을 깨닫고 흠칫했다. 별것도 아닌데 저런 눈으로 쳐다보니 쑥스러웠다.
“아. 뼈가 상한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요? 희석 안 한 원액이라서 회복 속도가 좀 빨라요.”
“……”
조금 빠른 정도가 아닌 것 같았는데?
“다행이었죠,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라서 제 선에서 처리가 가능했으니까.”
나인이 민망한 얼굴로 덧붙인 설명에도 누구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는 한 상처가 단번에 낫는 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마법 같은 광경이었다.
소녀를 안고 있던 체드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내 친구 나인. 다들 처음 보지? 공간미아인데 여기 오기 전에는 마법사였대.”
뒤늦게 나인을 에스퍼들에게 소개한 체드가 뿌듯한 얼굴로 나인을 돌아보았다. 그게 아니라는 소리를 백 번은 한 것 같은데 역시 학습 능력이 없는 놈이었다. 나인이 웃으며 그 말을 정정했다.
“마법사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마법사….”
나인이 낫게 해 준 다리를 꼼지락거리던 에스퍼가 경외감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근깨가 박힌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거듭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해 봐도 소용없었다.
에스퍼들의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가장 어린 데다 첫 훈련부터 봉변을 당한 팀원을 구해 준 덕에 이미 나인은 그들의 은인이었다. 나인은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해도 반복 발음 주문에 걸린 양 마법사라는 명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을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체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사람 말을 듣지를 않네.
“의사 놀이 재밌었어요?”
애쉬가 다가왔다. 나인은 그가 내민 손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 조금 채취한 슬라임 독을 은근슬쩍 주머니에 챙기며 일어섰다. 몬스터 부산물은 귀하다.
“참,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슬라임이 지능은 낮아도 앙갚음은 제대로 하는 것들이니까.”
나인이 생각하기에 아마 이들은 슬라임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보낸 것 같았다. 제대로 싹을 잘라 낼 게 아니라면 아무리 하급 몬스터라도 피하는 편이 낫다.
무리에 해를 끼치는 존재를 공격해 영역을 지킨다. 하급 몬스터들은 지능이 낮고 단순하기에 일차적인 욕망에 더욱 집착한다. 몬스터 발정기에는 숲 출입이 통제되는 이유도 그와 비슷했다.
“그리고 텐트 근처에 뭘 뿌렸다는진 몰라도 슬라임은 후각을 못 느껴요. 아무 소용 없었을 거예요.”
“뭐라고요? 어머, 사기 당했네.”
리온은 괴물 퇴치 스프레이를 집어던지며 웃었다. 웃는 얼굴로도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나인은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몬스터들은 불을 싫어하긴 하는데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불을 피운다고 다 쫓아낼 수는 없으니까 항상 조심하셔야 해요.”
나인은 아까 전부터 거슬리던 사실들을 정정해 주었다. 불을 피운다고 해서 무조건 몬스터를 쫓아낼 수는 없었다. 그것들도 단순하게나마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것들이었기에 이만한 규모의 모닥불 정도는 요령껏 피해서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가 있는 것이다.
체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다시 오지 않을까?”
“걱정 마. 독침까지 쓰면 수명이 다해서 얼마 못 가서 죽어.”
이 근방을 수색해 본다면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슬라임의 사체가 끈적한 점액 웅덩이가 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공허계 슬라임이 아닌 게 어디야. 그건 피부에 닿기만 해도 살이 녹거든. 소탕하려면 보호 마법을 삼중으로 두르고 작업해야 할 정도야.”
“넌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배웠으니까?”
태연한 나인의 말을 들은 청중이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괴생물체에 대해 배웠다니…? 대체 누가? 저것들에 대해 어떻게 알고?
―괴생물체 올 클리어. 보호 결계 해제 중.
이제야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참 빨리도 대처하네. 에스퍼들이 일제히 비아냥대며 갖가지 욕을 중얼거렸다.
―현재 시각 오전 네 시 사십칠 분. 신호 발신 장치가 파괴된 레드 팀의 훈련이 종료됩니다. 훈련 전면 종료.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사태는 이미 마무리되었고 승패도 가려진 상황이었다. 팀원의 치명적인 부상으로 귀찮은 일을 피하려던 체드가 스위치를 넘겨준 덕에 애쉬가 승기를 잡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빨리 끝났네요.”
애쉬가 어깨에 팔을 걸치며 나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눈이 마주치자 눈매가 근사하게 접혔다.
안 그래도 하려던 말이 있었다.
“저기, 애….”
나인이 다른 에스퍼들의 시선을 피해 애쉬에게 한마디 하려던 때, 본부 사람들이 도착했다. 한밤중에 훈련이 종료되는 일은 무척 드물었기에 다들 정신없어 보였다. 결국 타이밍을 놓쳐 질문할 기회를 날린 나인은 남들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