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아뇨, 지름길로 갈까요. 나도 슬슬 피곤해서.”
여기에 지름길이 있어? 의아해하며 고개를 든 나인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애쉬가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놀랄 틈도 없었다. 애쉬는 나인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너무 순식간이라 이게 무슨 행동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
오렌지 향이 훅 끼쳤다. 동시에 공간이 전이되며 세상이 핑글 돌았다. 놀라서 발치까지 떨어진 심장이 이제는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나인은 이지러진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자마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뻗어 애쉬의 뺨을 힘껏 갈겼다.
퍽. 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한껏 돌아갔다.
“아프네….”
애쉬는 미동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안마는 시원찮더니 그런 주제에 손은 은근히 맵다 중얼대며 그가 얻어맞은 뺨을 문질렀다.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뭐야?’
뜬금없는 입맞춤에 생각 회로가 굳어 버린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빛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한데 모여 있던 일행은 애쉬를 보고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체드네 일행이었다. 그들은 애쉬를 발견하고 전의를 잃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바로 달려들거나 적대적으로 굴지는 않는 걸 보니 싸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 씨발……. 조졌네.”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소리 듣고 올 거라고.”
“닥쳐, 씹. 애 아픈데 그딴 소리 할 거면 들어가서 발 뻗고 처자라고 했지.”
저들끼리 투닥대던 일행들 틈에서, 체드가 먼저 반응했다.
“잠도 없냐. 왜 한밤중에 나다니고 지랄이야.”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스위치 같은 장치를 꺼내어 힘껏 던졌다. 애쉬의 발치에 정확하게 떨어진 것은 신호 발신 장치였다.
“갖고 꺼져.”
그러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란 뜻이었다. 체드가 이를 드러내며 경계심 어린 태도를 보임에도 애쉬는 그저 태연했다.
“좋지.”
애쉬는 잘됐다는 듯 웃으며 발로 그것을 짓이겨 부쉈다. 발 아래서 콰직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소리에 나인이 숨을 집어삼켰다.
체드네 팀은 훈련에서 패배했다는 데에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고 엉엉 울고 있는 어린 에스퍼만 둘러싸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이런 훈련 따위가 아니라는 듯 보였다.
나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만신창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닥다닥 붙어 설치된 텐트는 모두 처참하게 부서진 상태였다.
그리고 저쪽에서 우는 소리를 내며 입을 막고 있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까 오전에 혼자 다니다 애쉬를 보고 살려 달라면서 도망친 에스퍼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식은땀에 젖어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디 다쳤나?’
나인은 애쉬를 지나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다른 팀의 F등급 가이드 하나가 가까이 온다고 그를 신경 쓸 만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에스퍼들은 나인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소녀의 다리에 물만 연신 들이붓고 있었다.
“아파, 흑, 놔아!”
소녀가 울며 버둥거려도 어쩔 수가 없었다. 체드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녀가 버둥거리지 못하게 잡고 있었다.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들을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리온은 가까이 다가온 나인을 보고 인사차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뒤를 따라온 애쉬가 나인을 뒤에서 가볍게 안았다. 나인이 고개를 들어 애쉬를 마주 보니 또 그의 입술만 보이는 듯했다. 그는 그새 또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사탕인 듯 보였다. 오렌지 향의 출처임이 분명했다.
“…….”
쓸데없는 기억의 잔상에 나인은 은근슬쩍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아직까지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자신과 달리 동요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어쩐지 거슬린다.
어떻게 내게 입술까지 들이대 놓고 저렇게 태연한 거지?
“여기 꼴이 왜 이래요? 폭탄 맞았나.”
애쉬는 리온에게 물었다. 이런 상황에도 말다툼을 할 정도로 그녀가 철이 없지는 않았다. 리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가 다쳤어요. 보시다시피 괴물들이 기습적으로 텐트를 덮쳤거든요.”
리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죠. 불도 피워뒀고 괴물이 기피한다는 향도 텐트 근처에 뿌렸는데.”
애쉬는 리온에게서 괴생물체의 행동 패턴과 그것이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 들으며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그는 나인의 시선이 딴 데 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뭐 해요?”
나인은 다친 꼬맹이와 그녀를 둘러싼 에스퍼들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인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애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소리였다.
“……왜들 저러고 있어.”
내내 움찔거리던 나인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몸의 방향을 돌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뭘 하려는 건가 싶었던 애쉬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좀 봐요.”
나인은 꺽꺽거리며 우는 소녀의 앞에 앉았다. 그는 에스퍼들이 물을 들이붓고 있는 환부를 내려다보았다. 상처 위로 검은 안개가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응급조치를 제때 하지 않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그나마 알아서 지혈은 잘했는지 제법 길게 갈라진 환부에서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소녀의 종아리 전체가 투명하고 끈적한 거품으로 덮여 있었다. 물로 아무리 씻어 내고 천으로 닦아 내도 진액이 계속 퐁퐁 솟아나 상처 위를 뒤덮었다. 밝은 불빛 덕에 상처가 더욱 적나라하게 보이자 에스퍼들이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어, 그거 맨손으로 만지지 마!”
나인이 거품 위로 손가락을 가져가자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경고에도 나인은 두 손가락으로 거품을 떠서 문질러 보며 액체의 점도를 확인했다.
“만지지 말라니까….”
‘따가워.’
거품이 닿은 살갗에서는 작열감이 느껴진다. 그새 나인의 손가락에 생긴 상처에서 진물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부글부글한 거품으로 변해 빈자리를 채웠다. 맑은 콧물 같은 점도를 가진 액체를 확인한 나인이 말했다.
“걸리적대지 말고 잠깐 나와요. 슬라임 독침에 긁혔어요.”
나인의 말에 그녀를 안고 있던 체드가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그와 동시에 나인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작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투명한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병을 꺼냈다.
아예 낯선 일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 정도는 흔한 사례라 나인의 선에서도 충분히 처치가 가능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는 이런 일이 드물지만 숲과 인접한 지역이나 몬스터들이 출몰하기로 유명한 지역에서는 이런 식으로 다치고 실려 오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아카데미 역시 하급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숲을 등지고 있어 그것들에게 당하고 치유 마법사들의 실험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환부를 계속 물로 씻어 내신 건 잘하신 거예요. 한 시간이 지나도록 방치해 두면 상처 부위가 괴사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럼 무조건 흉 져요.”
심하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 말에 붉은 머리의 소녀가 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심한 상처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슬라임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위협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급 몬스터라고 해도 자기를 보호할 만한 수단은 있기 마련이다. 특히나 슬라임의 경우 날카로운 치아가 없기 때문에 몸속 깊은 곳에 돼지 꼬리 모양의 독침을 숨기고 다닌다.
나인은 회복 물약을 전부 제 손에 부어 꼼꼼히 손바닥과 손등에 바르고는 옆의 에스퍼가 들고 있던 거즈로 붉은 머리 소녀의 환부를 깨끗하게 훑어 내 시야를 확보했다. 손에 바른 회복 약이 독성을 띠는 액체로부터 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독부터 빼내야 해.’
슬라임 독이 여태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 부위에서 점액질의 진물이 계속 솟아나는 것이었다. 상처가 벌써 붙어 있었다. 나인이 허공에 손을 내밀며 물었다.
“칼 있으세요?”
“어, 잠, 잠깐만.”
에스퍼가 허둥거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 에스퍼의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잭나이프를 자연스럽게 훔친 애쉬가 나인의 옆에 앉으며 그것을 직접 손에 쥐여 주었다.
“……?”
손이 잠깐 맞닿았다. 손가락이 나인의 손바닥을 은근하게 훑고는 떨어져 나갔다. 좀 의아했으나 나인은 금세 잊어버렸다.
비록 손에 익은 도구는 아니지만 제법 예리한 날이 무척 쓸 만해 보였다. 칼을 손에 맞게 고쳐 쥔 나인이 예고도 없이 상처에 칼을 얕게 집어넣고 환부를 긁어내리자, 붉은 머리의 에스퍼가 끅,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그가 소녀의 상처를 다시 후벼 팔 거란 생각은 못 했는지 에스퍼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종내는 그녀의 몸이 고통에 바들바들 떨렸다.
그때였다. 성큼 다가와 쪼그려 앉은 리온이 소녀의 턱을 잡아 젖히더니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어?’
나인의 사고가 정지했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리온과 소녀의 입술이 정확하게 맞닿아 있었다.
“괜찮아.”
리온이 속삭이며 달래자 소녀가 끙끙거리다 말고 입술을 벌렸다. 리온은 소녀의 뺨을 쥐고 고개를 꺾어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질척한 소리에 나인의 귓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